어느 해 여름, 퇴촌의 한강변에서
사진 그리고 이야기/여행길에서 2009/01/02 00:00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니 일이 끝나는 시간이 대중이 없다.
어떨 때는 한낮에 끝나고, 어떨 때는 야심한 시간에 마감이 된다.
옛날 사진들을 뒤적이다 보니
2004년 6월 13일엔 일이 아침 9시 30분쯤 끝났다고 되어 있다.
그날 오전에는 그녀의 부탁으로 사람들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에는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팔당쪽으로 나갔다.
우리는 그곳을 분원마을 들어가는 입구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퇴촌의 도수리나 오리 정도가 아닐까 싶다.
평상시에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지만
버스가 그곳까지 가는 관계로,
버스를 타고 간 나는 그날 버스 종점에서 내려
마을들이 끼고 있는 한강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버스가 하남을 지날 때 차창으로
상점 앞에 늘어선 자전거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어린이용 자전거들이다.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 눈을 거두지 못하고
한참을 자전거 위에 얹어놓았다가 가는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어릴 때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왜 그렇게 못견디게 갖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또 갖고 나면 왜 그렇게 빨리
그것에 주었던 마음이 시들해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은 못견디게 갖고 싶었던 어릴 적의 그 마음을
슬쩍 지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아이로 돌아갈 때가 있다.
가끔 나도 그렇다.
나는 타고간 버스의 종점에서 내렸다.
종점에 내릴 때면 갈 때까지 악착같이 가보는 느낌이다.
종점에서 내려선 한강쪽으로 터덜터덜 다시 걸어 내려왔다.
길가의 논엔 심어진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벼들이 가득이었다.
시골에서 자랐는데도 농삿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항상 산으로 들로 나간 것은 그곳의 바람과 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벼와 정이 쌓였을리가 없다.
그러나 어릴 때 많이 봤다고 벼가 심어진 논만 보면 정감을 느낀다.
짜식, 어릴 때 그렇게 놀고 먹고 크더니
이제 와서 아는 척이야 하면서
벼들이 면박을 줄 것 같다.
사람이 좀 뻔뻔해져
그러거나 말거나 논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가곤 한다.
한강으로 흘러가는 개천이다.
S자 곡선을 그리며 흘러간다.
대개의 개울은 곡선을 그린다.
개울은 직선과는 별로 친하질 않다.
어어어, 뒤로 넘어간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그래도 엉덩방아찢는 나비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황새는 고고하다.
왜?
목에 기브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고고하단 말인가.
나르시스의 미학이다.
개울가의 풀들만 보면 별로인데
물에 비친 모습은 아름답다.
혹시 나르시스도 실제로는 별로였는데
물에 비친 모습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은 있는 그대로를 비추지 않는다.
물은 세상을 그 안에 아름답게 담아낸다.
나는 자랄 때 나무 이름과 그 나무의 열매 이름을
달리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사과였고,
감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감이었다.
물론 뽕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뽕이었다.
그런데 서울오니 그 뽕을 일러 오디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럼 뽕나무라고 하지 말고 오디나무라고 하던가.
물론 내가 이렇게 나가면
그럼 소나무에서 열리는 건 소냐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겐 뽕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뽕이다.
뽕이 익을 때면 뽕은 우리가 따먹고 잎은 누에에게 양보했다.
아니, 누에는 잎은 자신들이 먹고 뽕은 우리에게 양보했다.
누에와 우리는 덕분에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클 수 있었다.
뭍에 머리를 누이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배들은 속삭인다.
어제 강물에서 노닐던 유영의 하루를.
그녀는 이 사진을 보더니 이국적이라고 했다.
이 풍경이 이국적이라?
국적이 두 개란 뜻인가?
난 종종 그녀가 건네준 말을 갖고
원래 가야할 방향을 버린 채
엉뚱한 방향으로 튀곤 한다.
황새 한마리가 팔당호의 물 위로 날아간다.
갑자기 노래 하나가 생각난다.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내가 잘 부르는 노래이다.
아, 오해마시라.
난 노래 못부른다.
내가 노래부르면 사람들이 모두 뒤집어진다.
난 노래부를 때마다 고마해 소리를 가장 많이 듣지만
꿋꿋하게 끝까지 부른다.
여기서 잘 부른다는 것은
그냥 자주 부른다는 얘기이다.
자주 부른다는 측면에선
난 노래 잘 부르는 편이다.
물빛이 그림같이 보이지 않는가?
퇴촌의 광동교 다리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
물의 화판 위에 빛과 바람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의 문양이 끊임없이 바뀌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위기 확 깨는 얘기 하나.
이곳은 경기도 광주의 경안천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합류하는 부분이다.
사진의 분위기와 달리 한강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보이는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르다.
얼굴이 예쁘다고 속마음까지 고운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다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난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긴 하지만 별로 믿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그곳을 꿈꾸진 마시라.
사진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것을 숨길 때가 있다.
어떨 때는 한낮에 끝나고, 어떨 때는 야심한 시간에 마감이 된다.
옛날 사진들을 뒤적이다 보니
2004년 6월 13일엔 일이 아침 9시 30분쯤 끝났다고 되어 있다.
그날 오전에는 그녀의 부탁으로 사람들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에는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팔당쪽으로 나갔다.
우리는 그곳을 분원마을 들어가는 입구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퇴촌의 도수리나 오리 정도가 아닐까 싶다.
평상시에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지만
버스가 그곳까지 가는 관계로,
버스를 타고 간 나는 그날 버스 종점에서 내려
마을들이 끼고 있는 한강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버스가 하남을 지날 때 차창으로
상점 앞에 늘어선 자전거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어린이용 자전거들이다.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 눈을 거두지 못하고
한참을 자전거 위에 얹어놓았다가 가는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어릴 때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왜 그렇게 못견디게 갖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또 갖고 나면 왜 그렇게 빨리
그것에 주었던 마음이 시들해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은 못견디게 갖고 싶었던 어릴 적의 그 마음을
슬쩍 지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아이로 돌아갈 때가 있다.
가끔 나도 그렇다.
나는 타고간 버스의 종점에서 내렸다.
종점에 내릴 때면 갈 때까지 악착같이 가보는 느낌이다.
종점에서 내려선 한강쪽으로 터덜터덜 다시 걸어 내려왔다.
길가의 논엔 심어진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벼들이 가득이었다.
시골에서 자랐는데도 농삿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항상 산으로 들로 나간 것은 그곳의 바람과 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벼와 정이 쌓였을리가 없다.
그러나 어릴 때 많이 봤다고 벼가 심어진 논만 보면 정감을 느낀다.
짜식, 어릴 때 그렇게 놀고 먹고 크더니
이제 와서 아는 척이야 하면서
벼들이 면박을 줄 것 같다.
사람이 좀 뻔뻔해져
그러거나 말거나 논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가곤 한다.
한강으로 흘러가는 개천이다.
S자 곡선을 그리며 흘러간다.
대개의 개울은 곡선을 그린다.
개울은 직선과는 별로 친하질 않다.
어어어, 뒤로 넘어간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그래도 엉덩방아찢는 나비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황새는 고고하다.
왜?
목에 기브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고고하단 말인가.
나르시스의 미학이다.
개울가의 풀들만 보면 별로인데
물에 비친 모습은 아름답다.
혹시 나르시스도 실제로는 별로였는데
물에 비친 모습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은 있는 그대로를 비추지 않는다.
물은 세상을 그 안에 아름답게 담아낸다.
나는 자랄 때 나무 이름과 그 나무의 열매 이름을
달리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사과였고,
감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감이었다.
물론 뽕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뽕이었다.
그런데 서울오니 그 뽕을 일러 오디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럼 뽕나무라고 하지 말고 오디나무라고 하던가.
물론 내가 이렇게 나가면
그럼 소나무에서 열리는 건 소냐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겐 뽕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뽕이다.
뽕이 익을 때면 뽕은 우리가 따먹고 잎은 누에에게 양보했다.
아니, 누에는 잎은 자신들이 먹고 뽕은 우리에게 양보했다.
누에와 우리는 덕분에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클 수 있었다.
뭍에 머리를 누이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배들은 속삭인다.
어제 강물에서 노닐던 유영의 하루를.
그녀는 이 사진을 보더니 이국적이라고 했다.
이 풍경이 이국적이라?
국적이 두 개란 뜻인가?
난 종종 그녀가 건네준 말을 갖고
원래 가야할 방향을 버린 채
엉뚱한 방향으로 튀곤 한다.
황새 한마리가 팔당호의 물 위로 날아간다.
갑자기 노래 하나가 생각난다.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내가 잘 부르는 노래이다.
아, 오해마시라.
난 노래 못부른다.
내가 노래부르면 사람들이 모두 뒤집어진다.
난 노래부를 때마다 고마해 소리를 가장 많이 듣지만
꿋꿋하게 끝까지 부른다.
여기서 잘 부른다는 것은
그냥 자주 부른다는 얘기이다.
자주 부른다는 측면에선
난 노래 잘 부르는 편이다.
물빛이 그림같이 보이지 않는가?
퇴촌의 광동교 다리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
물의 화판 위에 빛과 바람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의 문양이 끊임없이 바뀌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위기 확 깨는 얘기 하나.
이곳은 경기도 광주의 경안천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합류하는 부분이다.
사진의 분위기와 달리 한강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보이는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르다.
얼굴이 예쁘다고 속마음까지 고운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다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난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긴 하지만 별로 믿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그곳을 꿈꾸진 마시라.
사진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것을 숨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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