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은 색의 절정이다 - 남한산성에서
사진 그리고 이야기/산에서 2007/11/03 00:00 색에도 절정이 있다.
색이 그냥 색이지, 색에 무슨 절정이 있겠냐며 되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색에도 절정이 있다.
가령 붉은 색이라면
아마 그 색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색의 주인을 찾는다고 하면
아마 붉은 장미가 가장 먼저 그 색의 주인을 자처하며 앞으로 나설지 모른다.
슬그머니 찾아온 봄기운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 추위가 더욱 완연할 때
붉은 색을 욱욱 토해내며 꽃을 피우는 동백도
그 자리를 양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불길로 확 번질 듯한 노을도
결코 그 자리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게 분명하다.
그러나 붉은 색의 절정은 누가 아무리 우겨도
역시 가을의 단풍이 그 주인이다.
노란색도 마찬가지다.
물론 개나리가 가장 먼저 그 색의 임자임을 주장하며
이른 봄에 이미 그 색을 자신의 색으로 점찍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색 역시 가을의 노란 은행잎에 이르러
비로소 색의 절정에 이른다.
단풍은 세상 모든 색의 절정이다.
11월 2일, 남한산성을 찾았다.
색들이 모두 절정에 올라 있었다.
여름내내 나뭇잎엔 초록이 고여 있었지만
가을이 되면 색이 나뭇잎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물든 것이 아니라
색이 절정을 향하여 흐르기 시작한다.
가을 단풍의 흐름은
때로 상류에서 붉게 시작된다.
아마 곧 아래쪽도 붉게 물들 것이다.
물은 지상으로 낮게 몸을 엎드리고 흘러가지만
단풍은 우리의 머리맡 하늘 위로 흐른다.
때로는 노란색으로, 때로는 붉은 색으로 흐른다.
그러다 어떤 단풍은 한자리로 그 흐름을 모아
거대한 붉은 호수를 이룬다.
또 단풍은 때로
은하수처럼 옆으로 띠를 이루어 흘러가기도 한다.
색은 흰색을 버리고 노란색을 취한다.
또 때로는 붉은 색을 취할 때도 있다.
물론 가을에 여름색이 일거에 모두 자리를 감추는 것은 아니다.
살펴보면 아직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여름색도 모두 색의 절정을 위하여
가을색을 준비 중이다.
어디나 준비가 더딘 경우는 있는 법이다.
가을에 단풍잎만 색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가을꽃도 나름대로의 색을 가진다.
보시라. 코스모스에게도 분명하게 색이 있다.
그러나 꽃의 색은 절정으로 치닫질 못한다.
피어날 때부터 그 색은 그 자리에 똑같은 색으로 고여있다.
색의 절정은 오직 단풍의 몫이다.
가을엔 갈대도 사람들의 눈을 현혹한다.
갈대는 꽁꽁 싸두었던 흰색을 머리맡으로 풀어놓고 바람에 흔든다.
은발의 유혹이다.
그러나 갈대의 흰색은 절정을 논하기 어려운 색이다.
흰색은 뜨겁게 불타오르기엔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다.
그러니 색의 절정은 갈대의 몫도 아니다.
가을에 색의 절정을 맛보려면 숲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색으로 물든 숲으로 가야 한다.
가을에 숲에 가면
그건 숲을 걷는 것이 아니라
색의 절정, 그 격정의 품 속으로 드는 것이다.
걷다보면 절정을 치닫던 색들이
나무들 밑으로도 자욱하게 흐른다.
이젠 발밑으로 깔렸지만
그 색들은 한때 높이로도 절정을 흐르던 색들이다.
그리고 절정의 색은 나무밑으로 떨어졌다고
금방 색을 놓친 않는다.
빛이 성긴 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무의 발밑을 파고들면
보통 때는 그곳을 환하게 밝히는데 그치지만
가을엔 나무 밑에 깔린 색의 절정에 물들어
노랗게 혹은 붉게 변색된다.
누구나 그 색의 절정 앞에선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녀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색의 절정을 갖지 못한 불운한 나무,
바로 소나무의 군락 한가운데서 색의 절정에 오른 나무 앞에 멈추었으며
한참 동안 색의 절정을 카메라에 담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사실은 그냥 단풍잎이 아니라 절정에 오른 색이다.
색이 절정에 오르면 색이 아니라 빛이 된다.
그리하여 마치 형광물질처럼 환하게 빛을 발한다.
가을엔 숲에 한번 가볼 일이다.
가을숲에선 색이 절정에 이르러 빛으로 반짝인다.
잎들이 노랗게 물들었다면 노란빛으로 반짝이고,
붉게 물들었다면 붉게 반짝이다.
만약 그 숲의 나무가 은행나무라면
우리는 노란빛으로 우리의 길을 밝힐 수 있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은 발밑을 내려다보면 금방 확인이 된다.
은행잎이 실제로 우리의 길을 노랗게 밝히고 있다.
다만 밝기는 그다지 밝지 않아
그 노란빛이 나무로부터 그렇게 멀리까지 뻗어가진 못한다.
그래도 빛을 밟고 걷는다는 것이 어디인가.
또 그 나무가 붉은 단풍나무라면
우리는 붉은 빛으로 길을 밝힐 수 있다.
단풍잎은 색의 절정에 올라 빛이 되며
그 빛을 그대로 안은채 나무밑으로 몸을 날려
붉게 혹은 노랗게 우리의 길을 밝힌다.
색의 절정으로 빛이 된 단풍잎이 길을 밝히고
그 길을 붉게 혹은 노랗게 밟으며 잠시 걸을 수 있는 계절,
그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가을숲엔 곳곳에 붉게 혹은 노랗게 빛이 밝혀져 있다.
색이 그냥 색이지, 색에 무슨 절정이 있겠냐며 되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색에도 절정이 있다.
가령 붉은 색이라면
아마 그 색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색의 주인을 찾는다고 하면
아마 붉은 장미가 가장 먼저 그 색의 주인을 자처하며 앞으로 나설지 모른다.
슬그머니 찾아온 봄기운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 추위가 더욱 완연할 때
붉은 색을 욱욱 토해내며 꽃을 피우는 동백도
그 자리를 양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불길로 확 번질 듯한 노을도
결코 그 자리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게 분명하다.
그러나 붉은 색의 절정은 누가 아무리 우겨도
역시 가을의 단풍이 그 주인이다.
노란색도 마찬가지다.
물론 개나리가 가장 먼저 그 색의 임자임을 주장하며
이른 봄에 이미 그 색을 자신의 색으로 점찍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색 역시 가을의 노란 은행잎에 이르러
비로소 색의 절정에 이른다.
단풍은 세상 모든 색의 절정이다.
11월 2일, 남한산성을 찾았다.
색들이 모두 절정에 올라 있었다.
여름내내 나뭇잎엔 초록이 고여 있었지만
가을이 되면 색이 나뭇잎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물든 것이 아니라
색이 절정을 향하여 흐르기 시작한다.
가을 단풍의 흐름은
때로 상류에서 붉게 시작된다.
아마 곧 아래쪽도 붉게 물들 것이다.
물은 지상으로 낮게 몸을 엎드리고 흘러가지만
단풍은 우리의 머리맡 하늘 위로 흐른다.
때로는 노란색으로, 때로는 붉은 색으로 흐른다.
그러다 어떤 단풍은 한자리로 그 흐름을 모아
거대한 붉은 호수를 이룬다.
또 단풍은 때로
은하수처럼 옆으로 띠를 이루어 흘러가기도 한다.
색은 흰색을 버리고 노란색을 취한다.
또 때로는 붉은 색을 취할 때도 있다.
물론 가을에 여름색이 일거에 모두 자리를 감추는 것은 아니다.
살펴보면 아직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여름색도 모두 색의 절정을 위하여
가을색을 준비 중이다.
어디나 준비가 더딘 경우는 있는 법이다.
가을에 단풍잎만 색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가을꽃도 나름대로의 색을 가진다.
보시라. 코스모스에게도 분명하게 색이 있다.
그러나 꽃의 색은 절정으로 치닫질 못한다.
피어날 때부터 그 색은 그 자리에 똑같은 색으로 고여있다.
색의 절정은 오직 단풍의 몫이다.
가을엔 갈대도 사람들의 눈을 현혹한다.
갈대는 꽁꽁 싸두었던 흰색을 머리맡으로 풀어놓고 바람에 흔든다.
은발의 유혹이다.
그러나 갈대의 흰색은 절정을 논하기 어려운 색이다.
흰색은 뜨겁게 불타오르기엔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다.
그러니 색의 절정은 갈대의 몫도 아니다.
가을에 색의 절정을 맛보려면 숲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색으로 물든 숲으로 가야 한다.
가을에 숲에 가면
그건 숲을 걷는 것이 아니라
색의 절정, 그 격정의 품 속으로 드는 것이다.
걷다보면 절정을 치닫던 색들이
나무들 밑으로도 자욱하게 흐른다.
이젠 발밑으로 깔렸지만
그 색들은 한때 높이로도 절정을 흐르던 색들이다.
그리고 절정의 색은 나무밑으로 떨어졌다고
금방 색을 놓친 않는다.
빛이 성긴 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무의 발밑을 파고들면
보통 때는 그곳을 환하게 밝히는데 그치지만
가을엔 나무 밑에 깔린 색의 절정에 물들어
노랗게 혹은 붉게 변색된다.
누구나 그 색의 절정 앞에선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녀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색의 절정을 갖지 못한 불운한 나무,
바로 소나무의 군락 한가운데서 색의 절정에 오른 나무 앞에 멈추었으며
한참 동안 색의 절정을 카메라에 담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사실은 그냥 단풍잎이 아니라 절정에 오른 색이다.
색이 절정에 오르면 색이 아니라 빛이 된다.
그리하여 마치 형광물질처럼 환하게 빛을 발한다.
가을엔 숲에 한번 가볼 일이다.
가을숲에선 색이 절정에 이르러 빛으로 반짝인다.
잎들이 노랗게 물들었다면 노란빛으로 반짝이고,
붉게 물들었다면 붉게 반짝이다.
만약 그 숲의 나무가 은행나무라면
우리는 노란빛으로 우리의 길을 밝힐 수 있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은 발밑을 내려다보면 금방 확인이 된다.
은행잎이 실제로 우리의 길을 노랗게 밝히고 있다.
다만 밝기는 그다지 밝지 않아
그 노란빛이 나무로부터 그렇게 멀리까지 뻗어가진 못한다.
그래도 빛을 밟고 걷는다는 것이 어디인가.
또 그 나무가 붉은 단풍나무라면
우리는 붉은 빛으로 길을 밝힐 수 있다.
단풍잎은 색의 절정에 올라 빛이 되며
그 빛을 그대로 안은채 나무밑으로 몸을 날려
붉게 혹은 노랗게 우리의 길을 밝힌다.
색의 절정으로 빛이 된 단풍잎이 길을 밝히고
그 길을 붉게 혹은 노랗게 밟으며 잠시 걸을 수 있는 계절,
그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가을숲엔 곳곳에 붉게 혹은 노랗게 빛이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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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forestory 2007/11/04 22:24 DELETE
Subject: 산성의 가을1
08-glen_hansard-fallen_form_the_sky.mp3 며칠 전 찾은 산성에 가을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나무들은 제 색으로 한껏 차려입었으며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가을이 좀더 멀리 가기 전에 가을산성을 음미해보는 것 또한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 같다. 가끔 하던 일을 멈추고 푸른 하늘을 봐야 하듯, 가끔 일을 멈추고 산성의 가을에게 달려가 볼 일이다. 그러면 매일매일 밥만 먹던 어제와 똑같은 오늘도, 매콤한 비빔국수나 쫄면을.. - Tracked from Photo Ring Project 2007/11/16 14:51 DELETE
Subject: Photo Ring #48 단풍놀이 가세~!!
김동원님께서 11월맞이 포토링 마흔여덟번째 주제로 '단풍놀이 가세~' 를 말씀해주셨어요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