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패배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12월 19일 서울 천호동의 성덕여중에서

12월 19일날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둘이 함께 가서 둘이 함께 찍었다.
우리가 찍은 후보는 문재인이다.
나의 마음은 김소연이나 김순자에게 가 있었으나
우리는 문재인에게로 표를 모았다.
김소연과 김순자는 작은 꿈을 위해 잠시 접어두는 큰 꿈 같은 것이었다.
길게 늘어선 줄 속에서 보이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승리할 것 같다는 기분좋은 예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했다.
많이 허탈했다.
우리 사회 보수의 벽이 이렇게 높은가 싶었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당선의 견인차가 된 것이
50대와 60대란 얘기를 들었을 땐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고
나이로 보면 바로 그 나이대에 들어와 있는 나는
그렇잖아도 거추장스러운 나의 나이를 모두 팽개쳐 버리고 싶었다.
절망과 허탈감이 뒤섞여 아주 힘들게 보내야 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한겨레 신문에서 선거 후의 후속 취재를 보게 되었다.
기사는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이
지역으로 보면 경기도와 인천, 세대로 보면 50대라고 말하면서
경기와 인천 지역에서 나타난 그 이해할 수 없는 투표 결과를
그 지역 50대의 경제적 불안감이 원인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기사는 이 지역에선 문재인이 되면 집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본 것 같다는
한 주민의 말도 덧붙여 전하고 있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어느 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뉴타운의 광풍이 휩쓸었던 서울의 상황이 기억에 떠올랐다.
뉴타운은 번듯한 아파트로 내 집을 업그레이드하면서
개발 이익을 내 주머니에 챙길 수 있다는
사람들의 내밀한 욕심을 건드린 정책이었고
새누리당의 전신인 당시의 한나라당은
그 정책으로 서울을 모두 휩쓸며 승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뉴타운 같은 구체적 정책은 아니었지만
경기도와 인천에서 민생의 이름으로 포장된 박근혜의 정책은
이번에는 가장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의 불안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성공했다.
기사는 집을 갖고 있지만 대출금이 워낙 많아
자신의 소득으로 대출금 이자 갚기도 벅찬 하우스푸어가
수도권에 33만 가구에 이른다고 전하고 있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무엇이라도 잡고 싶지 않았겠는가.
내 생각에 불행히도 그들은 박근혜라는 지푸라기를 잡았다.
내게 있어 한겨레 신문의 기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경기도와 인천의 선거 결과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답이었다.
사기범들은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이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 잘 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
박근혜의 당선을 이끈 두 개의 견인차는
영남이 든든하게 받쳐준 지역색과
불순한 집권욕을 민생이란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자극하는데 넘어가버린
사람들의 내 집에 대한 소유 욕망이다.
박근혜 당선의 이 전제가 맞다면
이번 패배가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문재인을 찍은 1469만 2632표라는 엄청난 수의 표는
지금까지의 지역색과 집에 대한 소유 욕망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번 대통령 선거는 그냥 선거가 아니라
지역색에 저항한 경상도 사람들과
자신의 개인적인 경제적 소유 욕망을 내려놓고
상식이 통하는 바른 정치를 꿈꾼 사람들이 모두 함께 똘똘 뭉쳐
구태의 정치와 한판 붙은 매우 뜻깊은 싸움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대구에 살고 있는 한 분은
술잔을 기울이며 선거 패배의 우울함을 달래다 트위터에서 내게
“형님 전 이제 꼬꾸리짐니닷ㅎ 경상도에 살아서 죄송욧ㅎ ~~”이라고 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아니, 무슨 얘기냐. 당신은 경상도의 레지스탕스다.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당신에게 내가 오히려 고마운 심정”이라고 했다.
이번 싸움에서 전라도는 우리의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충청도에선 양쪽을 곁눈질하며 지역적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 분들이
이번 싸움의 응원군으로 동참해 주었다.
이 싸움은 싸움만으로도 값지다.
어떠한 타협도 없이 벌인 가장 소중했던 꿈의 싸움이다.
이제 다시 힘이 난다.
꿈을 잃지 않고 이번 선거에서 함께 표를 모아 싸워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투항자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부디 그들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빌어주고 싶다.
그리고 빠뜨리고 지나갈 수 없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 있다.
바로 안철수이다.
그는 이번 꿈의 싸움에서 우리의 꿈에 불을 지핀 사람이다.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새정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알겠다.
문재인을 통하여 안철수를 지지한 그 표들은
안철수의 새정치가 지역색을 내려놓는 것이며,
경쟁을 통하여 자기 이익을 이기적으로 챙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버리고
모두가 함께 사는 공존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안철수는 국민이 가리키는 대로 가겠다고 했는데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밝힌 길은 놀랍게도 구태를 넘어선 꿈의 길이었다.
고맙다, 안철수.
당신이 우리의 꿈에 불을 지폈다는 걸 내 평생 잊지 않겠다.
우리는 졌지만 최소한 꿈은 잃지 않았다.
5년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또 화이팅이다.

8 thoughts on “소중한 패배

  1. 평소 피사체엔 번뜩이는 눈으로 렌즈를 들이대시더니, 피사체가 되실 때는 조금
    긴장하신 모습입니다.^^ 저는 내심 기대를 하면서도 만약 이겼다면 이번엔
    제대로 된 5년이 펼쳐질까 하는 의구심이 한쪽 구석에 서성거렸던 것 같아요.
    비록 다시 비싼 수업료를 치르면서 지켜봐야 하는 신세가 됐지만, 이번의 소중한
    패배가 새 정치 –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 를 여는 중요한 단초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1. 이명박 때와 같은 현상 같아요.
      전과 14범인 걸 알면서도 그런 것 다 상관없다 잘살게만 해다오하면서 찍어주고 이번에는 독재의 과거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독재를 뿌리째 용서해줄테니 잘살게만 해다오 하면서 찍어주고. 그러나 이명박 때에 비하면 문재인을 민 표의 수로 보건데 엄청나게 발전한 거죠. 이제는 잘사는 게 곧 민주화가 답인 것도 모르고 말예요. 가끔 산에나 함께 가면서 다시 또 5년 버텨 봅시다요.

  2. 방금 소주 마시고 왔습니다.
    대구살아요.
    온통 그녀지지자들 속이라고 생각하니 ㅎㅎㅎㅎ
    자동 맨붕.
    하다못해 식당해서 입에 침바르며 당선축하모드소리 들리니….

    그들이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것에서 이 잔인한 모순에 참 견디기가
    역겨워서요….
    아..당장 소주값이 인성이라니….

    1. 대구 분이셨군요.
      속많이 상해도 너무 술많이 드시지 마세요. 5년을 또 버텨야 하니까요.
      그곳에서 살며 꿈을 지켜주셔서 더욱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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