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약간 내 자신이 측은해지곤 한다.
내 가진 것이 빗방울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름답고 영롱하고 곱다.
좋은 형용사를 모두 갖다 치장을 해도 손색이 없지만
한편으로 허망하다.
그 허망함의 반대편에서
마음을 든든하게 잡아줄 수 있는 확실한 것으로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투박해도 좋으니 굵직하고 넉넉한 금반지와 같은 것이다.
화려한 다이아몬드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겐 가진 것이라곤
비오는 날이면 3천원어치만 사도
온통 그녀를 통채 치장해주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떨이로 넘기는 장미 다발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장마철을 지루하게 넘기면서도
거의 눈길한번 주지 않는 빗방울 뿐이다.
가진 것이 그것 뿐인 나는
오늘도 눈길을 그 빗방울에 맞추고
그것을 엮어 사랑 연서를 쓴다.
나뭇잎이 바쳐든 그 빗방울 하나는 어떻게 나의 눈에 띈 것일까요.
나의 눈은 그것을 보고 있다기 보다
그것으로 빨려들고 있었어요.
나뭇잎은 많고, 그것이 받쳐든 빗방울도 많았지만
유독 그 빗방울로 빨려들어간 나의 시선은
내내 그곳에서만 머물고 있었어요.
당신을 만났을 때
내가 그랬어요.
나는 당신에게 빨려들어 가고 있었죠.
나는 알게 되었죠.
당신도 내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의아했어요.
바로 나의 옆에 크고 화려한 빗방울이 맺혀 있었거든요.
사람들의 눈은 모두 그리로 향하고 있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그 옆에도 또 빗방울은 있었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데도
당신의 시선은 그것을 비켜가고 있었어요.
시선이 스쳐 지나가기는 한가운데의 빗방울도 마찬가지였어요.
나의 자리는 한쪽 구석이었죠.
그러나 당신의 시선은 그 구석진 자리로
나를 찾아와선 내게 머물었어요.
당신의 눈에 다른 것은 보이질 않았죠.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전설은 사실이었어요.
그때 당신이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아시나요.
그때를 생각하면 자꾸 텔레비젼 광고가 생각나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스킨하나 바꿨을 뿐이라고.
당신은 그때 스킨은 커녕 그냥 세수만 하고
흐르는 물기를 그대로 방치한 채
바삐 내 앞에 나와도 그렇게 달랐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좀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가진 것이 빗방울밖에 없었던 나는
그 자격지심에 당신과 살면서 겪었던 현실의 하중을
마치 코를 꿴듯이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때 나는 그냥 허공으로 추락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를 붓들어맨 그 일상의 촘촘한 그물망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아무 말없이 내 곁을 지키기만 했었죠.
하늘을 보면 답답함이 풀릴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기도 했지만
하늘빛도 어둡기만 했어요.
그렇게 추락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삶은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나는 삶을 견디고 있었죠.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당신도 점점 오그라들고 축소되면서 그렇게 내 곁에서 세월을 견디고 있었죠.
이 빗방울은 어디서 와서 저기에 앉은 것일까요.
나는 빗방울 하나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어요.
빗방울을 키운 나뭇잎은 푸르고 싱싱하지 않았어요.
여기저기 황혼의 가을빛으로 물든 기색이 역력했죠.
눈을 돌려보니 싱싱한 나뭇잎에
하나도 아니고 둘, 셋, 아니, 넷, 다섯의 빗방울을 받쳐들고
비온 뒤끝의 세상이 빛나고 있었어요.
아주 화려했어요.
눈이 절로 돌아갈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빗방울은 하나일 때 가장 아름다웠어요.
처음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다른 빗방울은 하나도 보지 못할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어요.
아득히 잊혀졌던 그때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어요.
아하, 그런 건가봐요.
사랑은 셋이나 넷, 아니면 다섯, 여섯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일 때 가장 빛나는 것인가봐요.
처음 만난 날부터 내내 내게 눈멀었던 당신,
오늘 나도 영영 눈이 멀게 되었나 봐요.
그때처럼 하나밖에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