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 조용한 변혁의 언어들 —계간 『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1
시가 과학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이 세계를 인식해 가는 과정은 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한때 우주의 기원에 대해선 두 가지의 이론이 맞서 있었다. 하나는 정상 우주론이었다. 우주는 원래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 우주론은 앞으로도 우주가 현재의 상태에서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하여 밀도가 매우 높은 하나의 점이 크게 폭발한 뒤 팽창하여 현재의 우주에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빅뱅 이론이라 불리었다. 빅뱅 이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빅뱅 이론에 힘을 실어주게 된 결정적 계기가 나타난다. 그 계기의 주인공은 에드윈 허블이었다. 허블은 망원경을 통하여 우주를 관찰한 뒤 별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을 근거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로 빅뱅 이론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정설이 되었고,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 정도로 추정되었다. 빅뱅 이론은 정상 우주론과 더불어 우주의 기원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새롭고 획기적인 변혁이었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 망원경을 손에 잡지는 않는다. 시인은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언제나 맨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과학자가 망원경을 통하여, 또는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는 분광기를 통하여 보이는 것의 이면으로 넘어가려고 했듯이 시인도 보이는 세상의 이면으로 넘어가려 한다.
시인은 망원경도 없고, 빛의 스펙트럼을 살펴볼 수 있는 장비도 없다. 그런 것들을 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대신 시인에겐 텍스트의 자유가 있다. 그 자유는 시인에게 생래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 자유를 갖는 것은, 그것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를 갖는 순간, 시인은 습관적 시선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유의 힘으로 시인은 현상의 이면으로 넘어가는데 성공한다. 시가 습관적 텍스트가 고착시킨 현실을 넘어가면 우리는 시의 세상이라는 또다른 세상을 갖게 된다. 그 세상은 세상을 보는 또다른 관점 이상일 때가 많다. 마치 과학처럼 시의 세상 또한 관점의 변혁을 꿈꾼다.
2015년 가을호의 계간지에 발표된 시들을 살펴보며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혁을 그 시들에서 엿보았다.

2
이재연의 시로 시작해본다. 그의 시 「비행」의 첫구절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나무처럼 생긴
새의 울음소리를 허공에 풀어놓았다
—이재연, 「비행」(『문예바다』, 2015년 가을호) 부분

아마 이 장면의 풍경을 일반적 텍스트에 담았다면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보이지는 않지만 그 나무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말하여 이런 경우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나무를 지운다. 그 순간, 나무는 보이지 않고 “나무처럼 생긴/새의 울음소리”만 우리의 눈앞에 남는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나무를 지운데 이어 새까지 지우고 만다. 허공에 새의 울음소리를 풀어놓는 것이 새가 아니라 누군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이 시에선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이작 뉴턴을 떠올렸다. 사과가 떨어질 때, 그 사과를 아래쪽으로 당기는 중력이란 힘을 감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아마도 이재연의 누군가는 그 중력에 해당하는 힘일 수 있다. 다만 시에서는 힘의 방향이 중력 때와는 정반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허공이 유혹이 된다. 때문에 시인은 할 수 없이 “허공의 유혹을 끝없이 따라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비행 방법이다. 우리는 날개가 없다. 때문에 날려면 비행기의 힘을 빌어야 하지만 시인은 날고 싶을 때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나무 하나를 고르고, 나무와 새를 지워 그 울음소리가 흩어지는 허공을 유혹으로 만든 뒤 그 유혹의 힘으로 허공을 난다.
시인이 시의 힘으로 날게 된 허공에서 본 세계가 어떤 세상인지는 이 시에선 불투명하다. 가령 시인은 “허공에서 토대와 토대가 충돌했다”거나 “허공에는 입을 다문 물질이 가득했다”는 구절로 그 세계를 말하지만 그 세계가 쉽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때문에 나는 이 시에선 시가 관점을 새롭게 열어 발견한 세상을 투명하게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시인들이 관점의 변화를 가져올 길을 열기는 하지만 그 길이 항상 명확하게 열리진 않는다. 그러나 때로 시의 방법으로 길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재연에 비하면 이용헌은 분명하게 어떤 사회적 사건 하나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무 위에도 문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 사내가 제 몸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하늘로 떠났다
—이용헌, 「비밀의 문」(『문예바다』, 2015년 가을호) 부분

이 구절의 현실적 텍스트는 한 사내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을 하고 삶을 마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그 사내는 전 경남기업의 회장인 성완종이다. 그는 자살하면서 자신이 뇌물을 준 정치인 몇 명의 이름과 액수를 적은 쪽지를 남겼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조사는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시인은 그 사건을 시의 세상으로 다시 불러내며, 시의 세상에선 여러가지 변화가 생긴다.
현실에선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사내이지만 시의 세상에선 나무 위에 문이 있다는 것을 안 사내이다. 현실에선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뇌물을 준 정치인의 이름과 액수만 남긴 사람이지만 시의 세상에선 “소리마저 다 걸어 잠그고 하늘로” 간 사람이며, 아울러 “그가 사랑했던 이름들과 뜻 모를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는 쪽지만 한 장 남긴 사람이다. 수사를 종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의혹의 현실은 시의 세상에선 “말을 걸어 잠근 하늘마다 소문들이 매달려 있”는 세상으로 바뀐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작은 시적 비유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비유들이 모이고 축적되면 그동안 우리들이 갖고 있던 고착된 관점에 근본적 변환이 발생할 수 있다. 시의 마지막 구절들은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우리들은 대개 진실은 죽은 사람만이 알고 있으며, 저 세상에서 당사자를 만나면 그때 모든 비밀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과 달리 이용헌에게 저 세상은 죽은 사람들이 모두 ‘나무’가 되는 곳이다. 때문에 죽은 사내도 “별빛 푸른” 저 세상에서 나무가 된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 “나무엔 한 사내의 비밀이 손금처럼 환히 요약되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무이니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라온 세월의 모든 비밀을 남김없이 몸에 새기고 요약하는 것이 나무라면 굳이 나무에게 비밀을 물어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세상은 비밀을 묻지 않아도 훤히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아울러 그것이 나무이니 비밀을 밝히려고 더 이상 나무에 목을 맬 필요도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저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는 이런 근본적 변화가 작은 시적 비유들의 변화를 통하여 축적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용헌은 비유의 작은 변화를 축적하여 세계를 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용헌과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단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꾼 뒤, 작은 비유들로 그 근본적 변화의 세상을 채워가는 것이다. 박윤근의 시 「쇄빙선」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는 “병실 한구석, 쇄빙선 한 척 길게 정박해 있다”고 말한다. 병실에 쇄빙선이 있을리는 없다. 아마도 병원의 침대와 환자를 묶어 그리 말했으리라는 짐작으로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병실은 쇄빙선으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환자의 얼굴이나 몸에 “검게 번진 버짐”을 “결빙을 예감하지 못한 이들이/몸속 긴 해안을 걸어온 흔적”으로 비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통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잠시 통증이 완화된 순간에 멍하니 초점 풀린 시선으로 누워있는 환자는 “뒤축처럼 닳은 흉추의 통증이 풀리자/선단에 몸을 가누던 눈빛, 천장에 떠 있다”는 구절로 바뀌어 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한다. 급격한 관점의 변환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러한 작은 비유들은 병실에서 병의 세상을 몰아내고 얼음을 깨고 나가는 쇄빙선의 세계를 그곳으로 불러다준다. 따라서 환자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병을 부수고 헤치며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선 몸이 저릿한 것은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겪어야 하는 환자의 감각이 아니라 몸으로 바다가 온다는 신호가 된다.

또 몸으로 바다가 오는지 먼 곳 발끝부터 저리다
—박윤근, 「쇄빙선」(『문예바다』, 2015년 가을호) 부분

박윤근이 병실의 침대를 쇄빙선으로 바꾸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급격하게 변환시킨 것은 아픈 사람들에게 병을 헤쳐나가는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이 그 반대 방향으로 접근해야 드러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삶은 죽음이 아니지만 때로 죽음보다 더 힘겨운 삶들이 있다. 일제 병탄시기에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모두 빼았기고 성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그렇다. 김중일은 그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삶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삶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가 할머니들에게 “이제 죽음도 많이 늙었군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한 시각에 서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에선 “죽음의 등에 청춘을 업혀 같이 세월 건너온 소녀들”이 보인다. 원래 청춘의 시절은 죽음이 그림자도 드리우기 어려운 시기이나 할머니들에게선 그 시절의 청춘이 죽음의 등에 업혀 세월을 건넌다. 또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부정하고 있는 현실이나 아직 공식적 사죄와 배상도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 정부의 무능과 외면을 생각할 때면 “늙은 죽음이 다 죽어가도록 위안받지 못하는 소녀들”이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또 한 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은 날, 이 시를 썼는가 보다. “또 한 명의 소녀가 일생 유서처럼 간직한/몸을 두고 가는 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죽음 앞에서 시인은 아직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삶마저 삶이라 말하지 못한다. 위안부의 삶은 삶이 아픈 것이 아니라 죽음이 아픈 것이다.

이미 청춘이던 죽음을 날벼락처럼 만나
한몸으로 늙어온 소녀들.
청춘의 첫날부터 함께한 죽음도
이제 많이 늙었군요.
무릎 아프듯 죽음 아픈 소녀들.
—김중일, 「죽음 아픈 소녀들」(『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부분

대개는 삶을 살아가다 죽지만 때로 어떤 이는 죽음을 살다가 가며 그것이 바로 이 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던 삶이었다. 그 삶은 죽음으로 바라볼 때 더 진실에 가깝다.
삶을 죽음이라고 불러야 그 삶이 겪어온 죽음 같은 세월이 드러날 때가 있듯이 어떤 죽음 또한 죽음 그대로는 드러낼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시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도 한다. 죽음의 참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오히려 평온의 길을 걷는 것이다. 김지윤의 시 「물속의 사람들」에서 내가 접한 경험이 그러했다. 시는 “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던 날/너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던 식탁이나/소란스러운 설거지가 만든 이 나간 유리그릇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나는 「물속의 사람들」이란 제목이 복수이고, “네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는 대목을 하나로 묶어 이 시를 세월호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는 진행되면서 세월호의 경우와는 온도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시는 “사후는 주말 식탁에 앉아 홀로 밥을 먹는 세계/너는 정갈한 그릇에 담긴 한 사람 몫의 음식 같았다”고 했을 때 나는 죽은 사람을 위해 차려놓은 상을 생각하며, 시 속 너의 죽음이 차분하게 마무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세월호의 죽음은 제대로 마무리가 되질 않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온도 차이는 더 커진다.

수면을 향하는 물거품들이 탄산수 같다던 네 말처럼
마음껏 슬퍼한 기억은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
—김지윤, 「물속의 사람들」(『창작과비평』, 2015년 가을호) 부분

실제의 현실에선 아이들을 보낸 부모들이 한 해가 지난 뒤에도 그 참혹한 죽음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죽음을 붙들고 있다. 그 참사로 인하여 아직 바닷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대로 풀려는 노력은 커녕, 오히려 의혹을 풀려는 노력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가 아이들의 죽음을 마무리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참사 앞에서 지겹다는 말을 내뱉기까지 했고, 그런 말 앞에서 유가족들은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는 처지로 내몰리곤 했다. 시에서와 달리 현실에선 아이들의 죽음이 마무리가 되질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세월호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김지윤의 시는 죽음이 평온하게 마무리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여주며, 그 필요는 현실의 결핍을 드러낸다. 죽음은 죽은 이를 기려 떠난 날에 상을 차리고, 그 상을 죽은 이에게 홀로 내줄 수 있을 때 마무리가 된다. 또 죽음은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을 때 마무리가 된다. 세월호의 참사로 인한 죽음은 그 둘을 모두 결핍한다.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풀리질 않아 부모들은 아이들의 상을 차리기 보다 여전히 아이들의 죽음을 붙들고 진실 규명을 외치면서 거리로 나서야 하는 자리에 서 있으며, 그들의 슬픔마저 사람들의 몰이해가 빚어낸 벽에 부딪치곤 했었다. 때로 오해없이 시를 읽기 위해선 시의 시간을 현재가 아니라 현재의 결핍이 모두 해소된 미래로 옮겨 읽어야 할 때가 있다. 그때의 시는 현재의 결핍을 해소하라는 요구일 수도 있다.
현실의 실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시의 시간대를 미래로 가져가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과거를 고집해야 현실이 뭉개고 있는 소중한 다른 것이 보일 때가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개발이란 이름으로 자주 과거가 뭉개지는 일이 발생한다. 뉴타운 개발이 좋은 예이다. 아마도 동작구의 대방동도 그 대상 지역의 하나였는가 보다. 이영주는 그 재개발 지역에서 마치 발굴하듯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간다. 그 기억 속엔 살던 곳의 “계단 아래에서 잠이 들었”던 과거의 어느 날이 있고, 또 “된장찌게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어느 날도 보이며, 끓이다 태우기도 했는지 “맛있는 연기가 복도로 기어 나올 때”도 있다. 엄마와 관련된 기억도 있다. 아마도 시인은 곧잘 가출을 하기도 했었는가 보다. “엄마는 내가 사라진 날이면 머리를 감았지”라는 대목이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물론 그 날은 엄마가 “대야에 머리칼을 담그고” 머리를 “눈물로 감았”던 날이기도 했다. 그렇게 재개발을 위하여 사람들이 비워진 곳에서 과거를 더듬어 가다 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저녁은 왜 개발되었을까….
—이영주, 「대방동」(『시와사상』, 2015년 가을호) 부분

개발된 것은 사실 저녁이 아니라 대방동이다. 그 점은 제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종종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한 지역의 주거 시절이 낙후되면 재개발을 통하여 그곳의 집들을 헐고 새로 짓는다. 한때 부동산 수익에 대한 욕망과 맞물려 이러한 재개발이 광풍처럼 도시 지역을 휩쓴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헐리고 새로 들어서는 것은 집들이다. 그런데 시인은 집이 아니라 왜 ‘저녁’이 개발된 것이냐고 묻는다.
이영주가 말하는 저녁이란 기억과 동의어임과 동시에 기억의 거처이다. 기억이란 머리로 기억하는 것 같지만 기억과 더불어 기억의 거처가 말할 수 없이 중요해질 때가 있다. 가령 누군가 해준 소중한 선물에 대한 기억은 선물 자체와 질기게 결합한다. 선물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 선물에 대한 기억의 거처이다. 그때 그 선물을 잃으면 똑같은 물건이나 그것보다 더 좋은 물건을 다시 장만한다고 해도 그 물건은 선물의 기억과 관련해선 아무 의미도 갖질 못한다.
집도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그 집의 기억은 기억의 거처인 집과 질기게 결합되어 쌓여간다. 재개발을 하면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이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집은 집의 기억이란 차원에서 보면 아무 의미를 갖질 못한다. 다른 무엇보다 기억의 거처가 소중하기 이를데 없는 기억이 그 거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기억의 거처를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집은 새로 또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기억의 거처를 ‘저녁’이라고 부른다. 저녁은 말하자면 기억이 들어가 쉬고 있는 공간이자 시간대이다. 새로운 집에도 저녁은 찾아 오겠지만 그 저녁은 당분간 기억의 거처가 되질 못한다. 같은 공간을 오래도록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야 저녁이 그곳에서 기억의 거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집에는 그 기억의 거처로서의 저녁이 없다. 그 저녁을 가지려면 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한다. 시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인이 “어느 집 찬장이든 해골 하나씩 들어 있다는 유럽 속담은 다른 병으로 옮겨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속담은 어느 집이나 그 집만의 비밀이 있다는 얘기이며, 그 비밀이란 시인에겐 그 집에 담긴 시인의 기억과 동일선상의 것이다. 그것을 비밀처럼 시사한 것은 그것이 개인적이면서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시인은 알고보면 우리가 새집을 얻고 저녁을 잃는다고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새집을 얻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댓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시인이 고집스럽게 발굴해내면서 붙들고 있고 싶어한 과거의 기억들이다. 때로 과거의 기억이 잃어버린 기억의 거처를 통하여 소중한 현재의 상실을 보여준다.
대방동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고 재수가 좋으면 재개발의 불운을 비켜가면서 집이 잉태해준 우리의 비밀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세상이다. 우리는 모두가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세상을 살며 권창섭은 그 세상이 우리를 지배해온 양상을 나이키라는 상표를 통하여 보여준다.
나이키는 단순한 상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이키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세상을 나눈다. 대부분은 나이키를 가진 자가 되고 싶어 한다. 나이키를 가지는데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을 살 수 있는 돈만 있으면 된다. 결국 나이키는 세상 사람들을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을 가진 자와 돈을 갖고 있지 못한 자로 분리한다. 나이키를 가진 자는 그것을 가짐으로써 승리 의식을 갖는다. 나이키를 가진 자가 훨씬 더 적어도 그 소수의 집단이 만들어내는 승리 의식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을 억누르기 일쑤이다.
그런 구분으로 세상 사람들을 분리하고 나이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자본의 힘이다. 시인에 의하면 그러한 힘의 영향력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실제의 나이키는 아니고 실내화에 나이키 로고를 그리는 것으로 만족을 얻던 시절이다. 중학교 때는 실제 나이키가 등장한다. 시인은 “그때서야 나이키가 왜 승리의 여신인 줄을 배웠”다고 했다. 아마도 부모의 재력이 시험 성적을 결정하게 된 시대를 체험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재력은 나이키를 신은 아이의 집안이 갖고 있었으리라. 시인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엄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보다 정확히는 아버지 뿐만이 어머니까지 돈을 벌어야 자식 둘의 공부를 감당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집안의 경제력이 아버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만큼 넉넉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네 문제집 살 돈이랑 학원 다닐 돈은 걱정 말라”며 어머니까지 나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도 시인은 나이키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다. 드디어 “엄마의 어깨를 조금씩 모아, 정기 세일을 하던 날, 난 처음으로 내 나이키를 손에 거머쥐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을 탓할 수는 없다. 그만큼 나이키의 소유로 세상이 나뉘는 자본주의의 위력이 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날 “기쁨의 최대치”를 누렸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녀석을 신고 처음으로 농구를 하던 날,” 시인은 아버지가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고 “나이키를 신고 뛰”어야 했다. 시는 이렇게 매듭된다.

…나는 나이키를 신고 뛰었고, 응급실의 아버지는 대머리가 되어 있었지. 아버지가 퇴원하던 날, 나는 두발검사에서 걸려 머리를 삭발하게 되었고, 우리 집에는 두 명의 마이클 조던이 생겼어. 졸업을 앞두고 두 마이클은 목욕탕에서 마지막으로 일대일을 겨뤘고, 승리한 나는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었지. 나이와 키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난 다시는 나이키를 사지 않았어.
—권창섭, 「나이키의 역사」(『작가세계』, 2015년 가을호) 부분

나는 “난 다시는 나이키를 사지 않았”다는 시인의 말을 아버지의 입원과 퇴원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시인의 반성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석하면 시에서 너무 고리타분한 도덕 교과서적 냄새가 나는데다 시가 너무 경쾌하게 진행되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무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작은 저항의 깨달음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세상을 뒤엎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 저항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자본이 세상을 나이키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구분할 때, 그 구분에 저항하여 나이키를 못가진 자가 아니라 나이키를 사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본에 의해 형성된 교묘한 지배의 관점이 나이키를 못가진 자라면 나이키를 사지 않는 자는 그에 맞서 시인이 세운 저항의 관점이다. 자본주의 세상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자본의 관점, 즉 자본력으로 세상을 가르려고 하는 관점에 대해선 얼마든지 저항하며 살아갈 수 있다. 시인은 그러한 저항을 돕는다.
권창섭은 교묘한 자본 지배적 관점에 맞서 저항의 관점을 성공적으로 세웠지만 현실의 세계에선 관점과 관점이 대책없이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종교 문제가 사이에 끼면 대개 불신과 믿음이 서로를 공격하며 대립하는 일이 흔하게 발생하며 이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 경우 믿음은 불신을 지옥으로 밀어넣기에 주저함이 없으며, 불신은 믿음을 맹신이라고 조롱한다. 사람들은 대개 그 대립의 둘 가운데서 하나를 고른다. 그러나 이날의 시는 그러한 관점의 대립을 보여주면서도 오히려 공존을 추구하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시의 사연은 “월세로 쓰던 아버지의 사무실”을 새로 옮기면서 일어난 일로 시작된다. 새로 사무실을 알아보면서 “처음 계약이 틀어지고/두 번째 계약한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처음 곳에서 가계약금 3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자 “이 돈은 어머니의 기도 주제가” 된다. 어머니는 그 가계약금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하면서 언제나 “웃으며 찾아갔고 웃으며 돌아왔”으며, “일곱 번을 찾아가 두 번에 걸쳐 15만 원씩, 결국 다 받아내”기에 이른다. 시인은 그 어머니와 자신의 차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문제가 생기면, 나는 생각을 하고 어머니는 기도를 한다
좀처럼 답이 나지 않으면, 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고 어머니는 ‘영적으로 약해졌다’고 한다
답을 찾으면, 나는 ‘이제 알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이날, 「유사한 사유」(『포지션』, 2015년 가을호) 부분

시인에겐 세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시의 세상에서만큼은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관점으로 기울지도 않는다. 시인은 나의 생각과 어머니의 기도를 마주놓지만 둘의 균형을 맞춘다. 또 문제를 풀어갈 때 시인은 해결에 필요한 나의 시간과 어머니가 추구하는 영적인 힘을 마주놓지만 역시 둘의 균형을 맞춘다. 문제의 답을 찾았을 때도 시인은 이제 알겠다는 자신의 정리와 어머니가 받은 응답의 태도를 마주놓고 둘의 균형을 맞춘다.
“어려선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고 기도도 했다”는 말을 빌면 시인은 이제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어머니도 아들에게 믿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다. 시인은 어릴 적 교회에 갔을 때 “다른 어린이들이 눈을 감고 있을 때/몰래 한쪽 눈을 뜨고 그들을 살펴봤”으며, 그때 자신이 마치 ‘윙크’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나는 그 윙크를 대립의 두 관점이 서로의 관점을 팽팽하게 고집하는 이 세상에서 드물게 만나는 공존의 관점에 대한 제안으로 보았다.

3
과학은 세계를 보는 관점에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다. 그 변혁은 목소리를 높이는 구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과학의 세계에선 현재의 관점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관찰이 세계를 보는 관점의 변혁을 가져온 동력의 근원이다.
시에서도 현실에 대한 남다른 관찰과 언어를 통해 이룩해내는 그러한 관점의 변혁을 볼 수가 있다. 그 변혁이 이루어지면 눈앞의 나무와 새를 지워 허공의 유혹을 만들어고 그 유혹의 힘에 의탁하여 공중을 나는 비행이 가능해진다. 시인의 저 세상은 저 세상에 갔을 때 이승에서 들을 수 없던 말을 들어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살아온 삶을 몸에 새겨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훤히 들을 수 있는 나무의 세상이 된다. 병을 앓던 몸들이 얼음을 깨고 나가는 쇄빙선으로 바뀌고, 죽음을 부르면 그 죽음이 죽음보다 끔찍했던 삶을 드러내며 위로를 전하는 세상이 시속에 있으며, 죽음의 뒤끝에서 아직 오지 못한 평온을 노래하면 시는 그 평온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 오늘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재개발의 허명아래 우리가 새집을 얻고 그것에 들뜰 때, 시인은 그 자리에서 우리가 잃은 소중한 것을 저녁의 이름으로 발굴해내며, 상품으로 이름으로 와서 교묘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자본의 힘에 맞설 수 있는 작은 저항의 실마리가 시 속에서 마련되기도 하고, 불신과 믿음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상의 터가 시 속에 닦여 있기도 하다.
2015년의 가을호에서 만난 그 어느 시도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그 속에서 세상은 확연하게 바뀌어 있었다. 종종 시는 세계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라기 보다 조용히 세상을 변혁하고 바꾸는 힘이 된다. 현실이란 이름의 우리 세상보다 그 힘의 동력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훨씬 살만할 것이다.
(『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시 계간평)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