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는 시를 통하여 시를 보여주면서 시가 어떻게 시가 되는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즉 우리는 시에서 완결된 형태의 시와 함께 어떤 대상이 시로 바뀌는 시적 전환의 과정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시가 우리와 가까운 거리의 낯익은 현실을 담고 있을 경우, 우리는 현실이 어떻게 시가 되는가를 시를 통하여 경험할 수 있다. 시를 읽으면서 동시에 현실의 시적 전환에 대한 경험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 경험은 시 자체에선 얻어지지 않는다. 시는 이미 전환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적 전환을 경험하려면 시로 전환되기 전의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시는 시가 어떤 현실로부터 출발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담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시의 언어들을 실마리로 삼아 시로 전환되기 이전의 현실을 상상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 상상을 통하여 시적 전환 이전의 현실로 돌아가 볼 수 있다. 종종 그 작업은 크게 어렵지도 않다.
시를 읽으며 시의 모태가 된 현실을 상상하고, 그 현실로 돌아가보는 이 방법의 미덕은,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시의 모태가 된 현실로 돌아가게 되면 시를 읽는다는 행위가 현실의 시적 전환에 대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면 시적 사고, 즉 어떤 현실을 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사고의 힘도 가능해질 것이다. 시인이란 그런 시적 사고를 몸에 내면화시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과학자에게 과학적 태도가 있을 수 있듯이, 세상을 바라볼 때 시인만의 고유한 태도가 있을 수 있고, 그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바로 시적 사고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시적 전환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2016년 봄호에 실린 시들을 읽을 때 나는 주로 현실이 어떻게 시로 전환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의 출발점이 된 현실을 상상하고 그 현실이 어떻게 시로 전환되는가를 살펴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2
조송이의 시로 시작해본다. 시의 제목은 「리트레 사전 20 —엄마」이다. 시의 제목은 이 시가 연작으로 쓰여지고 있는 시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리트레 사전”은 프랑스의 언어학자 리트레가 편찬한 사전으로 프랑스어 사전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인터넷의 힘을 빌렸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다. 왜 시인이 시의 제목을 리트레 사전으로 잡고 연작을 쓰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엄마를 부제로 삼았는지를 점쳐보는데는 막연하지만 짐작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 짐작에 기대면 리트레 사전이 프랑스어 사전의 고전이니 그 필적할 연작의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꿈이 만져진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작의 제목인 리트레 사전이 아니라 부제인 ‘엄마’이다. 연작에선 부제가 실질적인 시의 내용을 가리킬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의 어디를 뒤져보아도 ‘엄마’라는 말은 없다. 왜 시의 부제는 엄마인데 시 속에 엄마는 없는 것일까. 시는 “망구가 벚나무에서 분홍이 어른댄다고 한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 속에서 현실 속의 엄마가 ‘망구’로 전환되어 있다는 것이다. 망구는 할망구의 줄임말이다. 왜 현실 속의 엄마는 시 속에서 ‘망구’로 전환된 것이며, 그 전환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엄마가 할망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현실 속 대화로 상상했다. 그 상상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어머니와 떠난 어느 하루의 나들이길에서 어머니를 보며, 아이구, 우리 엄마도 할망구 다 되었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는 그 할망구를 다시 망구로 줄인다. 말은 줄임말이 되면 대상과의 친밀도를 더욱 높인다. 아마도 현실 속의 엄마는 그렇게 하여 시 속의 ‘망구’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실이 시적 전환을 이루어 엄마가 ‘망구’가 되면 세상도 달라진다.
여덟 살에 읍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한다
나무 밑에서 벌의 날갯짓이 회오리바람 일으키고 빛바랜 추억이 굶주린 듯 흔들리며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뽕짝 간주가 지나가고
곁에 그 바람이 와 머문다
—조송이, 「리트레 사전 20 —엄마」(『문예바다』, 2016년 봄호) 부분
아마도 딸과 어머니는 어머니가 “여덟 살”에 이사하여 살았던 읍내를 찾아간 듯 싶다. 찾아가선 살던 곳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나무 밑”에 섰고 그곳에서 벌을 보았다. 시는 “벌의 날갯짓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벌의 날갯짓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다. 하지만 엄마가 망구로 전환이 되면서 펼쳐지는 시의 세상에선 어머니가 과거에 살았던 곳에서 만나는 벌 한마리도 남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벌 한 마리도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반향을 가질 수 있다. “곁에 그 바람이 와 머”물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불쑥 다가서는 나이든 엄마에 대한 갑작스런 회한이 할망구가 다된 우리 엄마라는 애틋함을 부르고 그 애틋함이 엄마를 할망구란 말에 담기에 이른다. 그 말을 다시 망구로 줄이며 어머니와 딸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시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전환이 이룩한 시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조송이의 시가 나이든 엄마를 바라보는 현실속 딸의 심정이 어떻게 시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임지은의 시는 전혀 다른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보여준다. 임지은의 시는 그 제목이 「밴딩 엄마」이다. 제목의 ‘밴딩’이란 말은 시 속에는 없다. 하지만 시를 읽어 보면 그것이 ‘고무줄’이 아닐까 하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늘어나려고 해요? 엄마”라는 시의 첫구절은 그러한 짐작이 맞을 것이라는 느낌을 강화해준다. 그렇다면 왜 고무줄 엄마가 아니라 밴딩 엄마일까?
언어는 변한다. 예전이라면 몸빼 바지나 고무줄 바지라고 불렀을 옷을 요즘은 밴딩 바지라고 부른다. 몸빼 바지나 고무줄 바지에는 이제 촌스럽다는 뉘앙스가 따라붙는다. 밴딩 바지는 같은 방식의 옷이지만 그 촌스러움을 걷어내고 현대화한 바지이다. 임지은의 어머니는 「밴딩 엄마」이다. 나는 그것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밴딩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고무줄로서의 속성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밴딩 엄마는 그런 속성을 가졌다. 현대를 살아가는데도 과거의 습성을 그대로 가진다. 그래서 잔소리가 많고 딸에 대한 간섭이 많다. 바로 그 인식이 고무줄 엄마가 아니라 「밴딩 엄마」라는 말의 탄생을 가져온다. 제목 하나만으로 시적 전환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적 전환은 조송이와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엄마, 미안
이거 내 꿈속이야
—임지은, 「밴딩 엄마」(『문학과사회』, 2016년 봄호) 부분
“책상 위 좀 치울래? 딸”이라는 엄마의 주문에 대한 딸의 대답이다. 엄마가 사는 시대가 바뀐 것이다. 고무줄 엄마가 살던 시대와 달리 「밴딩 엄마」가 사는 시대의 딸은 자의식이 강하다. 조송이의 시선이 어머니에게 집중되어 있는 반면 임지은의 시선은 바뀐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자신에게도 나뉘어져 있다.
이번에는 백복현의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그의 시 「봄날, 단추를 달다」를 읽어 보면 “고가(古家)에서” ‘단추를’ 달고 있는 어떤 노파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파와 시인의 관계는 시 자체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저만치 굴러가는 봄
노파는 문간방에 앉아 단추를 단다
뜬구름이 기웃거리는 서까래 밑
동거하는 거미는 실을 짠다
—백복현, 「봄날, 단추를 달다」(『문예바다』, 2016년 봄호) 부분
어느 봄날 문간방에 앉아 단추를 달고 있는 노파가 이 시의 현실이다. 시의 둘째 구절은 그 현실을 거의 있는 그대로 전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첫 구절이다. 시인은 “저만치 굴러가는 봄”이라고 했다. 봄은 계절이기 때문에 엄격한 현실적 인식 속에선 대개 흘러간다. 시간이 굴러갈 수는 없다. 아마도 시인이 본 것은 길을 굴러가는 떨어진 꽃잎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현실적으로 보자면 저만치 굴러가는 떨어진 꽃잎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꽃잎이 봄꽃의 꽃잎이 떨어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봄꽃은 곧 봄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봄꽃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봄을 볼 수 있다. 시인은 그리하여 봄꽃의 꽃잎이라는 현실의 자리에 봄을 바꿔넣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시적 전환의 순간이다. 그 전환은 한 번으로 그치질 않는다. 전환이 연쇄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그냥 구름으로 떠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름한 고가의 “서까래 밑”을 기웃거릴 수 있게 되고, 거미가 “서까래 밑”에서 거미줄을 치는 것이 아니라 노파의 동거인이 되어 ‘실을’ 짤 수 있게 된다.
현실에선 구름은 구름으로, 거미는 거미로 나뉘어져 있다. 그 현실이 시로 전환이 되면 구름과 거미는 모두 노파를 중심으로 봄날을 함께 지나가는 일원이 된다. 아마도 이런 것이 시의 힘일 것이다. 굴러가는 떨어진 꽃잎의 현실이 굴러가는 봄으로 바뀌는 작은 전환으로 시작되어 이러한 전환이 몇 번 거듭되면서 그 힘은 자꾸 커진다. 그러면 오랜 세월 탓에 문고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고리가 손으로 바뀌고 그리하여 문을 “꼭 쥐고 있던 문고리도 떠나”가는 봄날이 가능해지고, “오십 년간 대문이 섰던 자리”가 ‘단춧구멍’으로 바뀌면서 집은 노파가 한 평생 입고 산 옷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궁극에선 노파와 노파가 달고 있는 단추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노파 자신이 “눈 어두운 단추”가 된다.
어떻게 노파는 단추가 된 것일까. 우리는 무엇이든 궁극에 이르면 행위와 행위자가 구별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하여 노래가 궁극에 이르면 노래와 노래하는 자가 구별이 되지 않고 노래하는 자가 곧 노래 자체가 된다. 춤이 궁극에 이르면 춤과 춤추는 자가 구별이 되지 않고 춤추는 자가 춤 자체가 된다. 예술의 세계에서만 그 합일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노파가 단추를 다는 사소한 행위에서도 그런 합일의 경지가 있다. 그 경지에 이르면 노파와 단추를 다는 행위 사이에 구별이 사라지고 노파는 곧 단추가 되고 만다. 그 합일의 순간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시적 전환을 통하여 축적된 시의 힘이다.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 힘은 꽃잎을 봄으로 전환하는 작은 시작으로부터 출발하여 중첩시키며 쌓아온 힘이다.
시가 항상 분명하게 어떤 현실을 시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의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인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류승희의 「둥근 사각형」이 그런 경우이다. 시인은 “사각형 위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꼭짓점을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만나서 어떻게 되었을까. “두 개의 선분이 만나는 끝점에서 우리는 약속을 하고 꼭지를 버렸다”는 것이 시인의 그 다음 전언이다. 그 때문에 “네 개의 꼭짓점에서 네 개의 선분”이 ‘결별’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결별 뒤에는 “발가락을 감추”는 일이 벌어졌다. “꼭짓점이 사라진 자리가 서서히 아물더니 둥글게 되었다”는 얘기로 미루어 꼭지를 버린 일은 상처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 꼭지를 버린 것이며 그것이 상처가 된 것일까.
이 시의 첫부분을 읽을 때 내가 떠올린 말은 세상을 깐깐하게 살던 누군가가 들었음직한 넌 너무 모나게 세상 사는 것 아니냐는 아주 흔한 현실적 얘기였다. 시는 추상적이었지만 아마도 그런 매우 구체적인 현실이 전환되어 사각형의 형태로 이미지화된 것이 아니었을까. 사각형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모나지만 우리들이 쉽게 내놓아선 안되는 삶의 길과 통한다. 발가락은 우리 몸에서 그 모난 삶을 감지할 수 있는 부위이다. 왜 하필 발가락이 그런 삶을 감지하는 부위가 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걸음을 걸을 때 가장 앞선 부위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막연한 짐작이었다. 길을 걸을 때 돌부리에 채여 통증을 크게 느껴본 부위가 대개는 발가락 끝이었다는 경험은 그런 짐작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시 속에서 사각형은 우리가 살아가고 싶었으나 버리고 만 삶이 된다. “나는 옆으로 가고 싶은 옆으로 긴 사각형”이었거나 “혹은 위로 팽창하고 싶은 위로 긴 사각형이었다고” 시인이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각형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자리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모난 심장을 가진 둥근 원이다
—류승희, 「둥근 사각형」(『문예바다』, 2016년 봄호) 부분
류승희의 시적 전환은 “원의 테두리에 갖”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적 전환으로 오히려 현실을 환기시키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그 전환으로 사각형의 기억을 ‘심장’에 담아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현실의 환기가 현실에의 안주는 아니다. 현실의 변화는 현실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변화로 가는 출발점을 선 것이며, 그 출발점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시이다. 시는 현실 앞에서 종종 무기력해 보이지만 때로 변화의 출발점으로 우리들의 등을 밀어주는 힘을 보여준다.
시의 현실이 국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여행지가 시의 현실이 되는 일은 빈번하며, 그 여행지가 해외에 자리하고 있는 경우 또한 빈번하다. 보통 그런 경우 여행지를 시에 담기 마련이다. 조용미의 시 「시라쿠사의 밤」도 그렇다. 제목의 시라쿠사가 어디인지는 인터넷 검색의 힘을 빌어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확인을 하고 나면 시라쿠사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도시란 것을 알 수 있다. 시는 이 도시가 고대 그리스의 도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인이 “비가 내리”는 날 그 도시를 돌아보다 살펴본 곳은 “디오니시우스의 귀”란 곳이다. 시라쿠사에 있는 “거대한 동굴”이다. 시인은 “파피루스가 자라고 있는 연못의 난간에 기대어 나의 언어로 속삭이듯 오늘 여기, 고대, 그, 리, 스, 의, 도, 시, 로, 왔, 다, 고 소리 내어 말해”본다. 그곳에선 아무도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그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모국어는 도시의 어느 성당 앞에서 “긴 머리”에 “눈이 깊은 청년이” “무쇠 솥뚜껑 같은 악기”로 연주하던 음악으로 전환이 된다.
시라쿠사의 밤 나의 모국어는 핸드팬보다 따뜻하고 신비한 음색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나의 속삭임이 파피루스의 언어가 되는
—조용미, 「시라쿠사의 밤」(『포지션』, 2016년 봄호) 부분
현실 속의 우리는 여행을 할 때면 여행지에 주목을 한다. 여행지에 주목을 하면 여행지의 풍경밖에 얻을 수가 없다. 그 여행지에서 모국어를 속삭이면 모국어가 핸드팬이란 악기의 “따뜻하고 신비한 음색”으로 전환이 되는 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아울러 그곳에서 나의 속삭임은 “파피루스의 언어”로 전환이 된다. 해독되지 못하는 탓이다. 시적 전환은 작은 행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
모국은 아름다운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말과 소리”가 구별되는 공간이다. 말은 의미를 갖지만 소리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굳이 그 구별을 갖지 않으려는 분야가 예술이기도 하며, 특히 음악은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무쇠 솥뚜껑 같은 악기”, 바로 핸드팬이란 이름의 악기에서 시인이 “물방울이 떨어져 번지듯 맑고 고혹적인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은 소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말과 소리”의 구별이 지워진 경지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음일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지의 언어를 지어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모국은 말과 소리의 경계가 엄격한 세상이다. 해외의 여행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인의 모국어를 모른다는 사실로 인하여 모국어가 지닌 말과 소리 사이의 그 엄격한 경계가 지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냥 조용히 모국어를 속삭이는 것만으로 모국어가 “따뜻하고 신비한 음색”으로 울릴 수 있다.
이번 순서는 송재학의 시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이다. 이 시의 현실은 단순하다. “양철 주전자”에서 물을 끓이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주된 현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단순한 현실을 시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다면 시로 바뀌는 과정에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종일 비가 와서 바깥은 경극의 배경과 어울렸다 찻잎을 물에 띄울 때 고요의 눈썹은 내가 그린 듯 가깝다 먹구름과 싸우면서 제 높이를 슬슬 키웠던 능선 그림자도 한 움큼 불러 물에 담갔다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물이 쉽게 끓기나 할까마는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 양철 주전자가 물의 온도에 접근하면서 마침내 쇠붙이까지 물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고 때마침 뚜껑은 들떠서 십 리쯤은 도망갈 기세이다 물도 주전자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
—송재학,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문학동네』, 2016년 봄호) 전문
바깥에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시인은 비내리는 바깥 풍경이 경극의 배경으로 삼으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현실적 풍경은 나의 설명과는 약간 다르게 바뀌어 있다. 현실적으로는 비내리는 바깥 풍경이 경극과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종일 비가 와서” 바깥이 “경극의 배경과 어울렸다”고 말한다. 비내리는 바깥 풍경이 경극의 배경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바깥 풍경을 경극의 배경으로 가져다 쓰게 해준다. 그러나 “종일 비가 와서”라는 생각은 바깥이 경극의 배경과 어울리는 것이 비의 덕택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현실적 생각은 바깥 풍경의 용도를 만들지만 시인의 생각은 그 소용을 낳은 것이 무엇인가에 눈을 돌리고 있다.
현실에선 용도에 집착을 한다. 시는 그 용도를 버리고 용도를 낳게 한 것이 무엇인지에 시선을 돌린다. 그것이 시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시인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런 태도는 연쇄적 전환을 부른다. 그 연쇄적 전환 속에선 “찻잎을 물에 띄울 때” 나타나는 물결이 눈썹으로 보이고, 시인은 그것을 “고요의 눈썹”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먹구름이 끼면서 험악해지는 날씨가 먹구름과 능선의 싸움으로 보이고 날이 살짝 개면서 좀더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능선 그림자”는 능선이 그 싸움에서 이겨 “제 높이를 슬슬 키운” 까닭에 얻어진 것이다. 현실의 세상이 시적 전환을 이루면 그 “능선 그림자도 한 움쿰 불러 물에 담”글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전환의 끝에서 물은 끓어서 뜨거워지는데 그치지 않고 뜨겁다는 외침이 된다.
그런데 시인은 시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물이 외친다고 하질 않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너희’는 “물도 주전자도” 아니다. 이 순간의 이전에 시인의 방에서 홀로 끓고 있던 물은 어느 새 바깥으로 나와 있다. 시적 전환의 힘은 방안에서 홀로 끓고 있는 물을 사회의 한복판으로 가져다 놓을 수 있게 해준다.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는 시 속의 구절은 마지막 구절과 결합되어 시인이 시를 시인의 방안에 고립시켜 두지 않고 사회의 한가운데로 가져가려는 장치였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외쳐야 할 것이 많은 세상이라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바깥 세상엔 사회가 있다.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사회적 관심사를 무시할 수가 없다. 사회적 관심사가 된 현실로 눈을 돌렸을 때 내가 만난 것은 정창준의 시였다. 그의 시 「이상성애 강철거인」에서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밀양에서 벌어졌던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곳의 노인들이 겪어야 했던 삶이다. 시 속에서 송전탑은 “강철거인”으로 전환된다.
강철로 조립된 거인은 노인성애자였다. 그들은 도시에서 밀려나 노인들의 거주지로 스며들었다. 굵고 긴 케이블로 연결된 그들의 네트워크는 단단했고 늙고 아픈 자들의 자리만 골라 디뎠다. 그들은 도시에서 유배되었지만 도시를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반갑지 않은 이웃이었지만 도시의 안전을 위해 송전탑은 거기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창준, 「이상성애 강철거인」(『시와사상』, 2016년 봄호) 부분
현실에선 밀양의 송전탑 사건이 환경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한전의 무리한 사업 추구나 주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사업의 부작용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시는 그 특유의 시적 전환을 통하여 이러한 사건의 궁극적 원인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도시 생활에 대한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거인은 시체성애자였음이 드러났다”는 전언을 통하여 이 욕망이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불러 그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시적 전환의 세계에선 도시를 사는 우리 모두가 밀양의 수난에 책임이 있다.
3
과학자에게는 과학적 태도가 있을 것이다. 그 태도 속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과학적 세계로 전환이 된다. 경제학자에게는 경제학적 태도가 있을 것이다. 그 태도 속에서 바라보면 세계는 경제학적 세계로 전환이 된다.
같은 논리 선상에서 시인에게는 시적 태도가 있을 것이다. 그 태도 속에서 바라보면 현실은 시의 세계로 전환이 된다. 과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다른 학문 분야와 달리 그 전환은 어떤 체계적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시인의 수만큼이나 많은 시적 전환의 세계를 접한다. 그것이 시를 읽는 매력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시를 읽을 때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나는 2016년 계간지의 봄호에 실린 시들을 현실의 시적 전환이란 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 전환은 때로 작아 보이지만 작은 전환이 축적되면서 매우 큰 변화로 이어지곤 한다. 그 전환에 함께 하면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전환이 몸에 체감된다.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그 전환의 순간에 우리도 동시에 바뀐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심지어 전혀 변화를 표면적으로 외치지 않으면서도 시는 암암리에 사람을 바꾸며, 사람이 바뀌면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도 바뀐다. 겉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으나 아마 나도 이 봄에 시를 읽으며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원래 꽃들은 그 시기를 약속하고 대체로 약속한 시기를 오랫동안 그대로 잘 지켜왔으나 올해는 어느 봄날에 모두 손잡고 함께 나타나더니 일제히 꽃을 피웠다 일제히 졌다. 봄이 축포처럼 터졌다 꺼진 느낌이었다. 때문에 올해는 맞은 봄을 낯설게 보내야 했다. 하지만 시 속의 봄날은 언제나의 약속처럼 완연했다.
(『문예바다』, 2016년 여름호, 시 계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