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감각, 그 감각에 세상이 포착될 때 —계간 『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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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이름으로 지각되는 세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빗나갈 때가 있다. 가령 사람들은 보통 하루의 길이를 24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그 24시간을 지구의 자전 주기, 즉 지구가 한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지구가 매일 똑같이 24시간 동안 한바퀴를 돌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렇질 않다. 지구의 자전주기는 24시간보다 짧을 때도 있고 길 때도 있다. 과학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전파망원경에 동시에 도달하는 별의 전파를 이용하여 지구의 자전 시간을 재는 것으로 그 사실을 알아낸다. 그때의 과학은 100분의 1초나 1000분의 1초까지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한다. 그러한 정밀한 측정 범위에서 보자면 지구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다. 비록 1초에도 한참 못미치는 시간이긴 하지만 어느 때는 길고 어느 때는 짧다. 과학은 심지어 지구의 자전 시간이 차이가 나는 것이 바람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낼 정도로 세상을 섬세하게 지각하는 감각을 가졌다. 우리에겐 일정한 하루가 과학에선 들쭉날쭉하다.
그런 예는 또 있다. 가령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발 아래쪽의 시간과 머리 위쪽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 머리 위쪽의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지구의 중력이 시간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에서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지구궤도를 돌며 GPS 정보를 제공하는 인공위성에선 그 차이가 더 커진다. 이 때문에 인공위성의 빨라진 시간을 지상의 시간에 맞추어 수정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중력에서 멀리 벗어날 수록 시간이 빨리간다는 것은 과학에선 명백히 확인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시간에 맞추어 인공 위성의 시간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현실이 된다.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드물다.
과학의 지각력은 세상을 달리보게 만든다. 시의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시인은 사람들과 똑같이 지상을 살고, 또 어떤 과학적 장비도 없지만 세상을 남다른 감각으로 포착해내곤 한다. 나는 곧잘 과학의 지각력에 놀라듯이 시인의 감각에 놀라곤 한다. 올해 여름호 계간지의 시를 읽으며 나는 시인들의 그 놀라운 감각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2
최정례의 시를 가장 먼저 읽어본다. 그의 시 「안내말씀」은 썼다기보다 그대로 옮겨왔다는 인상을 준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배 안에서 있었던 안내방송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의 제목을 안내방송으로 잡지 않고 「안내말씀」으로 잡았다. “승객 여러분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서 가져온 것임에 틀림없다. 이 때문에 시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시의 제목까지 현실에서 그대로 옮겨왔다는 인상이 더욱 짙어진다. “08:52”의 시간에 “현재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시작된 그 안내 방송은 “09:42”의 시간에 다음과 같이 방송을 하며 끝을 맺는다.

09:42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안전하게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정례, 「안내말씀」(『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부분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옮겨온 듯 보이지만 시에선 상황을 옮겨올 때 시인의 의도가 가미된다. 그리고 그 시인의 의도가 이 시에선 보이지 않는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된다. 형식상으로 보면 배 안의 안내 방송을 그대로 옮겨왔으므로 시를 읽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든 모두 그 날의 배 안이 된다. 아마도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그 날의 배 안으로 승선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인의 의도에 동의를 하면 시를 읽는 순간, 우리 또한 모두 그 배의 승선자가 된다. 시인은 쓰면서 그 배에 승선하고 우리는 읽으면서 그 배에 승선한다. 우리는 그 배에 탔던 승선자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 그날 배 안에서 이 안내 방송을 끝까지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죽었다.
그리하여 시는 말한다. 사실 그날 우리 또한 그 배에서 모두 죽은 것이라고. 또 시는 말한다. 그 날의 참사는 그 날의 배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아마도 시인은 그 배에 함께 타는 것으로 비극이 되어버린 그때의 운명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나누어 갖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것이 배 안의 안내 방송을 그대로 옮겨와 시로 삼은 시인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안내 방송의 이면에서 우리 모두의 침몰을 감지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지각력이다. 시인의 지각력은 단순히 그 날 있었던 참사를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있었던 우리 모두의 죽음을 일깨운다.
허은실의 시 「유전」도 현실 상황 속의 얘기들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선 보자면 그의 시는 최정례의 시와 닮아 있다. 하지만 허은실은 시인의 얘기를 사이사이 가미하면서 형식을 달리한다. 시인이 옮겨온 얘기는 놀러와서 아기 젖을 먹이고 있는 “외손녀 옆에서 앞섶 풀어 젖을 꺼”낸 ‘외할머니’의 얘기이다. 시는 그 할머니의 얘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할머니는 자신의 젖을 “다른 사람들은 늙어서 젖이 쪼그라드는데 나는 멕이는 것처럼 커. 이 봐, 젖꼭지가 꼭 애기 젖처럼 뷘홍색이 잖아. 친구덜두 다 부러워해. 이 젖으루 일곱 명을 키운 거야”라고 말한다. 얘기는 계속 이어지고, “젖이 많아 갖구 웃물 짜서 한 양재기씩 내놓으믄 할머이가 쇠죽에도 붓구, 굴목에도 붓구, 샘물에도 갖다 쏟아붓구 그랬어. 굴목에 연기 나오듯이 젖 많이 나오라고. 샘물에 붓는 건 부정 타지 말라구”라는 얘기에 이르며, 그 얘기 끝에 시는 이렇게 마감된다.

할머니와 딸과 딸의 딸들과 딸들의 딸, 열두 개의 젖 모여 온 방에 젖내 진동하는 밤. 하늘에 은하수 흐르고 외할머니 고향샘에 부은 젖 흐르고 흘러 먼 바다 어린 물고기들까지 다 먹이는
—허은실, 「유전」(『실천문학』, 2016년 여름호) 부분

할머니는 자신의 젖으로 ‘일곱 명’의 자식을 키웠다고 말했지만 시인은 그에서 더 나아가 고향의 샘에 부은 할머니의 젖이 ‘먼 바다’의 ‘어린 물고기들까지” 모두 다 키워낸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할머니의 일곱 자식이 시인에게선 먼 바다의 모든 어린 물고기로 확대 된다. 이러한 급격하고 폭넓은 확대가 가능한 것은 시인이 할머니의 젖에서 무엇인가 젖을 넘어서는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이 본 것이 생명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했다. 젖은 여러 가지로 보일 수 있다. 할머니는 그것을 자식 일곱 명을 키워낸 양식처럼 말했다. 하지만 시인은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젖에서 생명의 원천을 본다. 젖이 단순히 할머니의 자식들을 벗어나 먼 바다의 모든 어린 물고기까지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보통 대지가 곧 어머니의 품이 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 경우에는 할머니의 젖이 곧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넓고 큰 바다로 확대가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방향은 반대이다. 할머니의 젖에서 바로 그 확대의 방향을 보고 듣는 것이 시인의 눈과 귀가 가진 지각력이다.
최정례와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김중일의 시선은 참사의 현장이 아니라 부모의 이름으로 남겨진 사람들에게로 옮겨져 있다. 시인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삼월과 사월의 사이, 삼월과 사월의 차이”에 주목한다. 순서로 보면 3월 뒤에 4월이 오지만 4월에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두고 있는 부모들에겐 그 두 달의 사이에선 시간의 흐름이 원만하질 못하다. 그 원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을 시인은 “삼월이면 어떤 부모들은 몰래 영정 같은 ㅁ받침을 미리 떼어와 숨을 불어넣으며 소매가 해지도록 닦”는다고 말한다. 4월이 오기도 전에 4월이 벌써 3월이 되는 것이다. 현실 속의 시간은 항상 3월이 4월으로 흐르지만 참사를 겪으면서 아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그 두 달 동안 “삼월 속으로 흐르는 사월”의 시간을 겪게 된다.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이 역전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역전되는 그 두 달 동안엔 사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미에서의 시간은 없다.

삼월과 사월은 바다라는 바람 한 장 차이.
삼월에서 사월 사이에는 흐르는 시간이 없다.
—김중일, 「삼월에서 사월 사이」(『작가세계』, 2016년 여름호) 부분

시간은 항상 앞으로만 흐르지만 지각력이 예민한 시인은 시간의 역류를 체감한다. 시인이 자신에게 체감된 시간의 역류를 전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는 두 달 동안, 이 땅엔 시간마저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잊어선 안된다는 뜻일 것이다. 때로 시인이 감지하는 세계는 역류된 시간을 전하며 그것을 잊지 말아야할 시간으로 기록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신용목의 시로 넘어가 본다. 그의 시 「달과 칼」은 “달과/칼”이 “왠지 닮아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아마도 초승이나 그믐의 달을 올려다 보았던 모양이다. 그때쯤의 달이라면 칼와 비슷했을 것이다.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누구에게서나 어느 정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시인에게선 “달과/칼”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통하여 달이 칼이 되고 나면 밤은 “깊숙한 칼집”이 된다. 그러나 그 칼집으로서의 밤은 신비롭다. “수없이 찔리고도 한 번도 베이지 않는 칼집”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의 그 말을 수없이 찔리면서도 칼집은 죽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 읽었다. 그러나 시인은 내 생각을 뒤흔든다. “사실 칼집은 베인 채 태어났다. 깊숙이 찔린 상처로 태어났다. 죽은 것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며 칼집에 대한 내 생각을 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찔리면서도 죽지 않았던 칼집이 “시체로 태어난 시체”가 되어 버린 것일까. 그 전환은 그 두 가지 생각의 사이로 놓인 한 구절, 바로 “아침마다 피 흘리는 사람들이 귀신처럼 서서 죽은 아이를 쳐다보는 나라”가 우리가 사는 나라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게 된다, 시인이 밤하늘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를. 처음에 시인이 본 것은 칼에 찔리는 고통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끊임없이 살아나는 어머니였지만 아이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면 그동안 살아온 삶도 삶이 아니게 되는, 시의 구절을 빌자면 “시체로 태어난 시체”가 되어버리는 어머니였다. 그 때문에 시인은 밤에게 ‘엄마’를 묻는다.

밤에게

죽어서도 아파? 엄마를 물었지.
—신용목, 「달과 칼」(『문예바다』, 2016년 여름호) 부분

시인은 그렇게 물으면서 생각한다. 죽어서도 아픈 사람이 있다고.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그렇다고. “그래서 밤의 어딘가에는 늘 우는 여자가 있”는 것이라고. 시인의 지각력이란 그런 것이다. 그 지각력은 달과 칼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으로 출발하여 밤에게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아픔을 물어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그런 아픔이 없도록 “잘 지내”야 한다.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 고통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 장이지의 시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칼로 그어보면/눅진한 점자로 통증이 돋아난다”말은 이 통증을 몰아오는 상처가 자해임을 알려준다. 제목 또한 「자해 —유령」이다. 그러나 시 속의 ‘나’에게 자해는 고통을 고통으로 덮기 위한 일반적인 자해가 아니다. 시인은 자해를 하면서 “몸은 사라지려 하는데,/나는 죽기 전에 유령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기 전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 유령이 된다고 알고 있다. 시인에게선 그와 반대로 유령의 시간이 죽음에 앞서 온다. 그 얘기를 확대하면 “그 전에 나는 유령이 된다”는 시인의 얘기는 죽기도 전에 먼저 유령이 되는 것이 우리의 시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의 시대가 어떤 시대이길래 그렇게 된 것일까. “그 많던 물신들이 몸을 잃고 금융 자산이 된 것”이란 구절은 그 실마리가 되어준다. 우리의 시대는 한동안 물신의 시대였다. 물질적 부가 신으로 추앙받던 시대이다. 이제는 그 물신의 자리를 금융 자산이 대치했다. 시인의 눈에는 금융 자산이 물신의 유령으로 보인다. 시대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때문에 물신의 유령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기도 전에 유령이 된다. 자해는 죽기도 전에 몸이 사라져 유령이 되어버리는 시대에 몸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이다.

유령 따위는 되고 싶지 않은데.
칼로 그어보면 신의 유언이 붉게 돋아날까.

‘나 여기 있어요.’
—장이지, 「자해 —유령」(『포지션』, 2016년 여름호) 부분

그러니까 자해는 때로 모든 것이 유령이 되어 버리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있는지를 몸의 고통으로 확인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고통으로 아직 유령이 되어버리지 않은 나를 확인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시인이 감지한 우리의 세상이다.
여성민의 시 「시간」은 “내 손을 구름에 넣은 적 있어 손등을 지나 손목까지”라는 얘기로 시작된다. 그 구름은 시계이다. 시인이 곧바로 이어 “커다란 시계로 덮고 다닌 적 있어/거즈처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시계는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둘의 사이를 곧바로 건너갈 수가 없다. 이 둘의 사이를 건너가려면 나는 둘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했고, 내가 상상한 것은 자판에 구름 문양이 그려져 있는 시계였다. 요즘은 자판에 갖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시계들이 많이 나온다. 그렇게 상상하고 나면 시를 평범한 일상적 언어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바꿔보면 내게는 언젠가 구름 문양이 그려진 시계가 있었고, 그 시계를 찰 때마다 마치 구름 속으로 손을 집어 넣는 느낌이 들었어라는 얘기로 시의 내용을 구체화할 수 있다. 물론 시의 세상은 그런 일상적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의 세상이란 구름이 그려진 시계에서 시계를 지우고 구름만을 남길 수 있는 세상이며, 때문에 그런 시계를 찰 때면 시계가 아니라 내 손을 직접 구름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계는 또한 ‘거즈’이기도 하다. 시인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계를 풀었어 하얀

거즈 자국이 손목에 남는다 시계를 푼 손목은 고무나 젤리같이 느껴지기도 해
—여성민, 「시간」(『문예바다』, 2016년 여름호) 부분

시의 세상에선 바로 이렇게 감각의 호환이 가능해질 때가 있다. 구름이 시계가 되며, 그 시계가 거즈가 되면서 서로 이어지고, 그 끝에서 “아픈 손목을 만질 때 우리는 잠깐 시계를 차는 느낌”을 갖게 되며, 그것으로 “손목을 지나 손등까지/거즈를 덮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시의 세상이다. 마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지키며 에너지가 그 형태를 바꾸듯이 시의 세상에서도 형태를 달리하면서 감각이 호환되며, 시인은 그 감각의 호환을 감지해낸다.
문성해는 그의 시 「먼 데」에서 “공원 미니 동물원에” “들어와 살고 있”는 “미어캣 다섯 마리”의 관찰기를 들려준다. 미어캣은 “모래를 파다가/뾰족한 두 발로 모래를 파다가/두 발로 곧추서서 먼 데를” 보는 것이 특징이다. 미어캣에게 그 “먼 데는 적이 오는 곳”이다. 동물원에 갇혀 있으니 사실 더 이상의 적은 없다. 하지만 미어캣은 먼 데의 적에 대한 그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다. 시인은 미어캣의 현실을 “있지도 않는 먼 데”를 무서워하고, “올지도 모른다는 먼 데”무서워하는 삶으로 요약한다. 두려움에 갇힌 것이 본능적인 미어캣의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훨씬 나은 것일까.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읽고 나면 사정은 그렇질 못하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먼 데를 본다
—문성해, 「먼 데」(『문예바다』, 2016년 여름호) 부분

시의 마지막 구절은 미어캣의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먼 데”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으로 뒤바꾸어 놓고 있다. 인식을 이렇게 바꾸면 우리는 이 두려운 세상을 인식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분명한 위험이 도처에 있는데도 모르고 살고 있고, 닥칠 것이 분명한 앞으로의 위험도 내다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사람들의 지각력이 미어캣의 본능에서 멈출 때 시인의 지각력은 그 너머로 넘어가 우리의 현실을 자각한다.
박성준의 시 「다른 자를 위한 기도」를 읽으면 마주 앉은 두 남녀가 떠오른다. 남자는 시인 자신이고 여자는 시인의 연인이다. 그러나 둘의 사이는 원만하질 않다. 마주 앉았다고 했으나 여자는 거의 돌아앉아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너의 뒤통수는 여러 개인데 돌아본 적이 없는 너는 오직 한 사람”이라는 구절은 여자가 여러 번 뒤통수를 보이며 돌아서 간 적이 있으며, 여러 번 돌아서 간 여자가 한 여자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서로 얘기도 통하질 않는다. “말을 다 하지 않아서 생긴 오해가 있다”는 대목에서 둘 사이의 냉랭함이 만져지며 “말을 더 할 수 없어서 나는 빈 곳이 되”었다는 대목에선 할 말이 없어진 시인의 입장이 느껴진다. 둘의 사이가 삐걱댄 것은 처음이 아닌 듯하다. “헤어지잔 말도 이제 면역이 생겨, 혹시나 했던 일이 역시”가 될 정도로 이제는 그런 말이 벌써 짐작이 생길 지경이 된 듯하기 때문이다. 둘의 사이는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 것일까.

기다란 유리병은 비어 있는데
유리에게 병은 나의 병이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없는 병이라
병은 다시 나타나 너를 엿보고, 투명한 병은 계속 비를 엿보고 아픈 적이 없었다고, 내가 비처럼, 나비는 날고 있다. 내가 아닌데, 빗속을 날고 있다. 병도 아닌데, 투명한 마음마저 믿을 수 없어. 마음을 믿지 않아 아주 간신히, 합장한 날개로 날아가는 나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기도를
—박성준, 「다른 자를 위한 기도」(『문학동네』, 2016년 여름호) 부분

이런 경우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말이 안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의 사이에 놓여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기다란 유리병”과 그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꽉막힌 둘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유리병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이지만 용기로서의 병이 시인에게선 질환으로써의 병이 된다. 이런 오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오해는 무섭다. 유리병의 병을 질환으로써의 병으로 바꾸어놓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 병은 “나타났다, 사라졌다”하지만 사실은 “없는 병”이다. 이런 병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행이 둘이 앉아있는 곳의 바깥에 비가 내리고 그 빗속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그 나비를 끌어들여 자신의 기도로 삼는다. 나비는 날개를 펼쳤다 모았다 하면서 날아간다. 시인의 눈엔 날개를 모을 때의 나비가 두 손을 모은 합장의 순간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감지를 하고 나면 시의 세상에선 나비의 “합장한 날개”를 가져다 “나의 기도”로 쓸 수 있다. 남녀 사이가 삐걱거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시의 세상에선 나비가 날면서 두 남녀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다. 시는 사이가 안좋아져 티격태격할 때 나비를 끌어다 둘의 기도로 쓸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3
나는 과학이 감지하는 세상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세상과는 다를 때가 있고, 시인이 감지하는 세상 또한 그렇다고 했다. 과학이 소중한 것은 과학의 감지력으로 우리의 감지력 너머에 있는 세상을 확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는 시의 세상 또한 같다고 보는 편이다. 시인 또한 그들의 감지력으로 일상적인 인식 너머의 또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계간지의 여름호에 실린 시들을 둘러보며 나는 시인의 지각력으로 열린 또다른 세상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문제는 있다. 시인이 자신들의 감지력으로 그 세상을 감지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시인의 전언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제니의 시 「현악기의 밤」이 그 답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은 “우리만 아는 세계 속에서 살자”고 말한다. 시인이 말한 그 세계란 “목구멍 속으로 삼킨 말들이 음악이 되는 세계”이며, “쓰여지지 않은 말들이 그림으로 펼쳐지는 세계”이다. 따라서 시인이 말한 이 세계를 알고 있고, 또 이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면 음악을 들을 때 누군가 “목구멍 속으로 삼킨 말들”을 들을 수 있고, 그림을 볼 때는 “쓰여지지 않은 말들”이 눈앞에서 색과 형상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러나 현실이 그와 같지 않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시인도 그 세계의 공유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시인이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기 위해서 너와 나는 만난다. 그리고. 그런 뒤. 무언가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채로 너와 나는 헤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 것일까.

주저하며 망설이며 나아가듯 되돌아가는 길들이다. 익숙하지 않은 배웅처럼 걸음과 걸음 사이에 문득 문득 슬픔이 끼어들면서. 너를 너로써. 나를 나로써. 있는 그대로 그 자리로부터 울리면서 물들어가는. 어두운 밤이다. 밤의 노래를 듣고 있다.
—이제니, 「현악기의 밤」(『시와사상』, 2016년 여름호) 부분

나는 이 구절은 시를 읽을 때 어려우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처럼 들었다. “나아가듯 되돌아가는 길들”이라고 했으니 항상 나아가야 되는 길은 아니다. 그러니 꼭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잠시 내려놓아도 된다. 다만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시를 내려놓으며 잠시 슬퍼할 필요는 있다. 현실 속에선 많은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며 시를 내던지고 시인에게 시를 쉽게 쓰라고 부당한 요구를 한다. “있는 그대로 그 자리로부터 울리면서 물들어” 가면서 쓰는 것이 시라면 시를 읽을 때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읽는다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 없다. 우리는 일상적이란 이름의 인식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런 일상적 인식은 있는 그대로 읽으려는 시각을 방해할 때가 흔하기 때문이다. 방법은 많이, 또 자주 읽으며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니는 그렇게 하여 시인의 세상이 “우리만 아는 세계”가 되고 나면 그 “비밀스런 세계”에선 “어두운 밤”이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그 세상에서 “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시인은 자신의 지각력으로 그 세계를 열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 지각력에 의탁하는 것으로 쉽게 그 세계로 갈 수 있다. 어찌 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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