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이 2016년 10월 23일 일요일 서울의 마포아트센터에서 정기공연을 가졌다.
시와 소설의 제목에 부제가 따라붙는 경우가 있다. 이소선합창단에는 항상 노동자 합창단이란 이름이 예외없는 부제처럼 따라붙는다. 이소선합창단은 합창으로 하나된 노동자이고 또 노래가 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리허설 때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회사를 파하고 숨을 몰아 쉬며 들어온 단원이 그 빈자리를 메꿨다. 숨을 고른 그는 곧 노래가 되었다. 노동은 그렇게 노래가 되었다. 리허설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은 덕택에 노동이 숨가쁘게 들어와 자리를 채우고 노래로 전환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때문에 내게 그들은 그냥 노래가 아니라 노래가 된 노동이었다. 내가 노래가 된 노동을 알 수 있었던 연유이다. 나의 행운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세상에서 노동은 노래가 아니다. 노래는 노동을 쉴 때 잠시 누리는 여흥 같은 것이다. 그래서 둘은 구분되고 갈라서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가 그렇지 않다고 내게 속삭였다. 노동이 노래가 되는 경우가 있어라고. 내게 그건 노동은 곧 노래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노래가 노동을 노래하는 것과 노래가 된 노동은 많은 차이를 갖는다. 노래가 노동을 노래하면 노동이 노래의 것이 되지만 노동이 노래가 되면 노래가 노동의 것이 된다. 그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노래를 갖는 것이다. 이소선합창단에선 노동이 노래를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소선합창단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노래를 갖는 세상을 위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듣는 내내 그들의 노래는 노동이 노래가 되는 세상을 향한 꿈이었다.
공연한 노래 중에 <사랑은 길게 흐른다>는 창작곡이 있었다. 이 노래를 연습하던 리허설 중에 지휘자 임정현이 갑자기 노래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한마디 했다. 여러분, 싸랑은~ 이렇게 노래를 시작하면 싸가지 없는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으로 시작해야 해요. 단원들이 모두 자지러졌다. 단원들은 곧 싸랑을 사랑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난 단원들이 터뜨린 그 웃음이 가장 좋았다. 때로 가장 좋은 것이 노래 밖에 있을 때도 있다. 그것을 누리는 것은 단원들만의 특권이다.
처음에 합창단이 노래를 부를 때는 노래였다. 그 중 두 곡의 노래를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함께 불렀다. 삼척에서 온 노동자도 있다고 했다. 함께 부르자 노래는 힘이 되었다. 노래가 힘이 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와 함께 한 관객이 있었다. 문득 힘이 된 노래는 세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합창단이 <바람씽씽>을 부르는 동안 노래는 봄을 기다리는 즐거움이었다. 노래 <어느 별이 되었을까>를 부를 때는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의 슬픔이 되었다. <해방을 향한 진군>을 부를 때는 노동 해방을 위해 총파업에 나선 분노의 함성이 되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는 즐거움과 슬픔, 분노를 오갔다.
합창단이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를 부를 때는 노래 제목이 구호가 되어 앞장을 섰고 그러자 노래가 그 뒤를 따랐으며, 다시 노래의 뒤를 구호가 따랐다. 때로 노래 속에서 구호와 노래가 하나로 단결한다.
이소선합창단은 모두 네 곡의 앵콜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 앵콜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나서 조금 뒤 한두 명이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를 같이 부르기 시작하더니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 노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모두의 노래였다. 정기공연은 모두가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