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 유계영의 시 「시」

시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시인의 시를 통해 듣게 될 때가 있다. 시인 유계영의 시 「시」도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이다. 어떤 얘기는 시를 읽을 때 도움이 되고, 어떤 얘기는 시를 쓸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들여다 보기로 한다.

1. 모자를 벗을 것. 타인의 모자는 벗길 것. 서로 바꿔 쓸 것. 신사숙녀 모자라면 조속히 벗길 것. 어린이의 머리통에는 카우보이햇이, 식자의 머리통에는 양동이가, 급진주의자의 머리통에는 별말씀이 꼭 맞을 것. 눈사람의 방울모자는 절대로 손대지 않을 것.
—유계영, 「시」 부분

모자를 시에 비유한 것이라면 자신에게 맞는 모자만 고집하지 말라는 얘기로 들린다. 신사숙녀라면 얼마나 전형적인 모자를 쓰고 다니랴. 시인은 그러지 말고 다양한 시를 즐기는 것이 좋다고 얘기한다. 시인은 또 어린이에게 호의적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카우보이 모자가 꼭 맞을 것이라고 했으니 시는 재미나고 멋진 순간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식자와 급진주의자에겐 호의적이질 않다. 식자들이 머리에 든 것도 없이 시를 평가는 경향이 있지 않냐는, 또 급진주의자가 사회적 효용으로 시를 재단하며 별난 소리나 해대는 족속들 아니냐는 시각이 느껴진다. “눈사람의 방울모자”는 사실은 효용을 벗어난 모자이다. 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모자의 이름으로 시가 왔을 때 효용으로 모자를 재단해선 안된다. 하긴 누가 눈사람의 방울모자를 쓸모로 씌워주겠는가. 알고보면 우리도 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2. 거기서 넘어질 것. 울지도 웃지도 않을 것. 같은 자리에서 내일 다시 넘어질 것. 늘 넘어진 자리에서 내일모레 또 넘어질 것. 모르는 곳에서 일어설 것. 그때 울거나 웃을 것.
—유계영, 「시」 부분

시는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들이 시를 읽다 넘어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그때 울거나 웃지 말고 시집을 덮어두었다 내일모레 또 읽어보라고 한다. 그렇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다 모르는 곳에서 일어서게 되는 날이 온다. 시인은 그때 울거나 웃으라고 한다. 시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읽히지 않던 시구절이 읽히는 순간, 누구나 울거나 웃게 된다.

3. 회문(回文)일 것. 입구와 출구를 만들지 않을 것. 동문서답일지라도 동분서주할 것. 어디든 길이므로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것. 어떻게 보아도 무늬이므로 하염없이 앉을 수 있을 것.
—유계영, 「시」 부분

회문(回文)은 한시체의 하나로 머리에서부터 내리읽으나 아래에서부터 올려 읽으나 같은 뜻으로 읽게 되는 어구를 말한다. 시를 회문이라고 한 시인의 얘기를 나는 시를 읽을 때 일목요연하게 해명하려 들지 말라는 얘기로 들었다. 시인은 하염없이 걸으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특별한 목표 지점을 두지 말고 산책하라는 소리이다. 산책을 해명하며 걷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그냥 산책을 즐긴다. 시는 길이자 무늬이다. 길은 걸으면 되는 것이고, 무늬는 무늬를 즐기면 된다. 시는 일목요연하게 해명을 해야 하는 문학 장르가 아니다.

4. 동물 외 출입 금지. 개 고양이 출입 가능. 돼지 소 양 말 염소 출입 가능. 비둘기 참새 닭 오리 출입 가능. 기린 하마 코끼리 사자 출입 가능. 인두겁 출입 금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유계영, 「시」 부분

시인에 의하면 시의 세상에는 동물들만 드나들 수 있다. 그런데 형상만 사람인 경우는 출입 금지다. 아마도 인간 아닌 것들이 시를 인간인 척하는데 이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런 금지를 내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차라리 동물인 걸 인정하고 살자는 얘기로 들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에서 멈칫할 수 있다. 시의 관계자가 누구일까. 당연히 시인이 관계자이고, 또 독자도 관계자일 것이다.

5. 아첨하지 않을 것. 자동판매기가 되지 않을 것. 한 사람이 다가와 지폐를 몇 장 넣고 레버를 돌린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을 것. 한푼 두푼 모은 돈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발로 걷어찬다면? 찌그러진 캔 하나 흘려줄 것. 망가진 자동판매기가 될 것.
—유계영, 「시」 부분

이 부분은 시를 쓸 때의 자세로 보인다. 아첨하지 말라는 말은 이중으로 적용된다. 일반적인 독자의 기호를 따라가지도 말고 문단의 눈치를 보지도 말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자동판매기에서 뽑아내듯 시를 써선 안된다. 사람들이 자동판매기에서 원하는 것은 뻔하다. 사람들의 그런 욕구를 따라가선 안된다. 또 독자들의 시에 대한 사랑을 고려해서도 안된다. 시가 너무 어려워서 읽히질 않는다며 화를 내는 독자들이 있다고 타협을 해선 안된다. 그냥 그런 독자들에겐 찌그러진 캔 하나를 흘려주면서 시인의 입장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시인이란 사람들에게 인기좋은 자동판매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망가진 자동판매기가 되어야 한다. 정말 시를 사랑하는 독자는 그 망가진 자동판매기에서 어떻게 하든 음료를 빼먹는다.

6. 충격적인 백지일 것. 생각을 쓸어 담을 것. 빗자루를 들고 허리를 숙일 것. 그러나 손가락으로 쓸어 담을 것. 언어에게 모두 떠넘기고 힘껏 모를 것.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주세요”하고 말할 것. 누구에게? 어린이에게. 누구에게? 무릎을 꿇고.
—유계영, 「시」 부분

시는 그러니까 백지로부터 탄생이 되지만 그 백지에 충격적인 것을 담아낸다. 시에 담기는 것은 시인의 생각이다. 생각을 쓸어 담으라고 했으니 생각을 아주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빗자루로 쓸어 담아선 안된다. 그건 너무 수월하기 때문이다. 시는 도구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 수공업이어야 한다. 시는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언어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으며, 언어가 불완전해 보여도 어쩔 수가 없다. 대개는 시의 언어가 뮤즈, 그러니까 시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신비의 존재로부터 오는 선물이라고 보지만 유계영은 그것을 우리 안의 아이가 가져다주는 선물로 보고 있다. 그 선물을 받으려면 물론 공손해야 한다.

7. 실용적일 것. 잘게 썰어 끓인다면 맛없는 수프가 될 것. 나와 타인 사이에 세운다면 문이 될 것. 못대가리를 내려친다면 망치가 될 것. 말없이 내민다면 말이 될 것. 머리맡에 둔다면 꿈의 연장이 될 것.
—유계영, 「시」 부분

시에 대해 실용을 말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시가 실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오해의 여지가 있는 실용을 말하면서 그 실용이란 말 아래서 시의 실용을 알려주고 있다. 시는 수프 정도의 포만감에 상응할 정도의 만족감은 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맛난 것은 아니어서 그렇게 많이 읽을 수는 없다. 시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운데 세워놓으면 둘이 서로 드나들 수 있다. 시인은 시로 못대가리를 내려치면 망치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못이 무엇인가를 단정적으로 분명하게 말할 때의 못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분명하게 못박는다의 못이다. 그럼 시는 그 못을 내려치는 망치가 될 수 있다. 시는 말없이 내밀면 말이 되어 상대에게로 건너간다. 그리고 머리맡에 두면 꿈으로 연장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시의 실용이다.

8. 독점하지 않을 것. 고통과 외로움 속에 소외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강물에 빠진 꿈을 바라보는 어린이 곁에 설 것. 나란히 걸을 것. 나란히 가라앉을 것. 나의 고유함을 믿지 않을 것. 나누어줄 것. 흔해빠질 것. 그러나 흔해빠지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떨 것.
—유계영, 「시」 부분

무엇을 독점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마도 시의 이름으로 그 어떤 것도 독점하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고통과 외로움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소외감을 달래주는 것이 시가 되어야 한다. 또 꿈이 강물에 빠져 울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 곁에 서주어야 한다. 시는 삶으로부터 유리되어선 안되며 삶과 나란히 함께 걸어야 한다. 시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시인은 그 고유함을 너무 믿지는 말라고 한다. 고유함과 함께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눌 수 있는 공통의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란 얘기로 들린다. 그런 측면에서 시는 이율배반적이어야 한다. 고유하면서도 보편성을 동시에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면서도 동시에 너무 뻔해선 안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어렵다.

9. 액자 보관 하지 않을 것. 거기까지 보여주고 끝까지 살게 할 것.
—유계영, 「시」 부분

액자에 넣지 말라는 얘기는 틀에 가두지 말라는 얘기로 들린다. 나는 이를 시는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쓰여진 곳까지 보여주고, 나머지는 시가 스스로 살게 하란 말로 이해했다. 시인이 하는 일은 자신이 쓴 시를 쓴 곳까지 보여주는 것이며, 시는 독자에게 와서 끝까지 살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모든 시는 시인이 쓰고 나면 끝이 난 듯 보이지만 사실 시의 끝은 읽는 자들이 읽으면서 완성한다.

10. 미래의 시가 마저 쓰게 할 것.
—유계영, 「시」 이상 전문

나는 이를 오늘의 시가 갖는 미흡한 구석을 미래의 시에게 맡기라는 얘기로 들었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꾸준히 시를 읽으며 시간이 메워줄 시의 완성을 기대하면 된다는 얘기가 된다. 읽다 보면 오늘 메워지지 않는 시의 빈구석을 미래의 시들이 꾸준하게 메워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상적으로 시를 사랑하고 읽는 일이 중요하다.
시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시 얘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 얘기를 듣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재미나다. 유계영의 「시」에서도 그 점은 예외가 없다.
(2021년 10월 4일)
(인용한 시는 유계영 시집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아침달, 2021에 실려있다. 인용한 시의 구절은 첫구절이 모두 볼드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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