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 나들이

반값 등록금으로 사람들 이목의 한가운데 선 대학이 있다.
서울의 전농동에 있는 서울시립대이다.
내가 다닌 대학이기도 하다.
나는 81년에 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 이후로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서울시립대 경상학부와 고대 국문과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서울시립대로 가게 되었으며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수중에 등록금이 한푼도 없었다는 것이 상당히 큰 이유가 되었다.
실제로 돈을 하나도 안들이고 입학을 했다.
말하자면 입학할 때는 전액 장학생이었다.
장학금을 정말 많이 줘서
대학다니는 동안 공부는 별로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내야 하는 여덟 번의 학기 중 다섯 번이나 장학금을 탔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 앞에서

학교 앞부터 내가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 높다란 건물이 서 있는 자리는
원래는 다 무너져 가는 누추한 여인숙이 있던 자리였다.
그 여인숙은 내가 다닐 때도 누추하기 이를데 없었다.
한번도 자본 적은 없다.
그때 이 학교 앞에서 서던 버스들의 번호는
이제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돈을 아끼려고 집에서 한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가곤 했다.
멀리 잠실로 돌아서 잠실대교를 건넌 뒤
화양리와 중곡동을 거치고 청량리로 가는 버스였다.
그때 가장 자주 이용했던 그 버스의 번호는 568번이었다.
바쁠 때는 내가 살던 명일동에서 500번이나 573번 버스를 타고 나가
건대앞에서 57번으로 바꿔탔다.
시간이 30분 가량 차이가 났었다.
예전에 학교가던 길과 중복되게 가보려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여 버스를 골랐다.
그리하여 장한평역까지 지하철로 나간 뒤 그곳에서 3216번 버스를 탔다.
한동안 승용차를 끌고 다녔는데 이렇게 버스로 찾아가 보니 느낌이 새롭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원래 학교 교문이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교문이 없다.
새로 만들기 위해 공사중이라고 한다.
내가 다닐 때는 교문이 이곳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학들의 출입구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지금은 회기역에서 드나들 수 있는 교문이 새로 생겼다.
예전에 교문이 하나이던 시절에는 학생과 전경이 대치하고 투석전을 벌이면
그 날은 그 시위가 마무리되기 전에는 학교를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대학에서 시위를 찾아볼 수 없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거의 한해내내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만 해도 학생과 전경의 그 대치를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했는데
취업에 여념이 없어 저항과 시위를 모르는 오늘의 대학생도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 되어버린 것은 여전한 듯 싶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예전의 교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이
아담한 크기의 음악관이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곳이 학생회관이었다.
우중충하기 이를데 없는 건물이었지만
나는 그 우중충한 건물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원래 밤에는 학생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열쇠를 잠가놓았는데
뒤쪽으로 깨진 유리창이 있어 앞쪽 문이 잠기면 그곳으로 드나들었다.
나는 이곳에 있던 방송국에서 활동했다.
방송국의 스튜디오는 카페트가 깔린 따뜻한 곳이었고
그곳에서 잠을 잔 적이 수없이 많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내가 다닐 때와 전혀 변함없는 모습을 간직한 것은 이 건물 뿐인 듯하다.
지금은 전농관이라 불리지만 당시엔 이 건물이 대학 본부였다.
총장실이 이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방송국에서 음악을 크게 틀면
총장님이 직접 전화를 하셔서 음악좀 줄여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었다.
입학할 때만 해도 큰 강당이 없어 이 건물 뒤의 공터에서 입학식을 했다.
입학한 나도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대학도 나못지 않게 가난해 보였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대운동장이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 운동장이 그냥 늪지대였다.
잡풀들이 무성하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여름철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은 시간에 나갈 때면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합창을 했다.
서울에 무슨 이런 대학이 다 있나 싶었지만
시골 출신이었던 나는 그 시골스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교문에서 학교로 들어오는 주된 출입로이다.
예전에는 그냥 길이 하나였고 차들은 없었다.
지금은 길을 반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사람이 쓰고 하나는 차들이 쓰고 있었다.
이 길에는 꽃사과가 심어져 있어 그 꽃들이 아주 예뻤는데
지금의 나무들이 그때의 나무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내가 다닌 경제학과는 캠퍼스의 가장 안쪽에 있는 사회과학관에서 공부를 했다.
이 길을 걸어 끝까지 들어가야 한다.
강의시간에 늦으면 가장 불리한 학과이기도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도서관 건물이다.
그다지 많이 애용하지는 않았지만 방학 때마다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 글을 썼다.
그리고 각 대학의 문예상에 응모를 했고 그 상금으로 등록금을 충당했다.
그 때문에 방학 때는 거의 항상 도서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번에 갔을 때 만난 한 후배는 내가 고시공부라도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에어컨이 없어 나는 정말 땀흘리며 글을 써야 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학교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오면 산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배봉산이라 부른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남녀가 손잡고 이 산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여자애의 배가 봉그랗게 되어 배봉산이 되었다는 전설을 들었다.
내가 직접 실천에 옮겨봤는데 전혀 근거없는 전설이었다.
내가 손잡고 들어갔던 여자들 중에 배가 봉그랗게 된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원래 거의 캠퍼스 어디서나 보이던 산이었는데
이제는 건물에 가려 가장 깊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보이질 않는다.
지금 연못이 있는 자리에는 뽕밭이 있었다.
초여름에는 정말 뽕이 열렸고 점심 시간이면 뽕을 따먹곤 했었다.
점심 시간 이후의 강의 때면 우리들의 입술은 모두 시커멓게 바뀌어 있었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바뀌는 변화를 가리켜 상전벽해라고 한다면
내가 다닌 대학은 정말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대학이 취업 준비 학원이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간만에 모교를 찾으면서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낭만은 죽고 영어책만 끼고 공부만 파는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곳으로 바뀌어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러나 여기저기 돌아보다 보니
캠퍼스 한켠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베짱이들이 있다.
역시 대학은 대학이다.
요즘 이런 풍경을 어디에서 볼 수 있으랴.
잠시 흐뭇했고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내 후배들이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구나 싶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인문학관은 영문과와 국문과의 본거지여서
이곳에서 공부를 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나에겐 특별한 인연을 선물한 곳이다.
나는 이곳의 시청각실에서 결혼을 했다.
그때 결혼한 여자와 아직까지 함께 살고 있다.
그 여자는 다른 대학을 다녔지만
우리 학교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리고 나는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사실 절친한 후배들은 모두 국문과 출신들이다.
국문과는 84년에 처음으로 생겼다.
내가 글을 쓰게 되면서 국문과 출신들과 많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사실 경제학과는 선배와 후배가 끈끈하게 이어질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와 달리 문학을 하는 선후배 사이는 과에 관계없이
글을 가운데 두고 끈끈하게 이어졌다.
특히 시립대는 시인들을 많이 배출하여
시집내면 축하해주는 자리로 인연이 계속되었다.
김점용, 한명희, 서상영, 진수미 등이 우리 학교 출신의 시인들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지금의 학생회관은 내가 방송국 활동을 접었을 때 완공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선 1층에 있었던 식당에서 밥먹던 기억이 거의 전부이다.
방송국이 이곳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방송국을 나올 때 다툼이 있어 그 뒤로는 찾지를 않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이 등나무 쉼터는 내가 학교를 다닐 때부터 있었다.
그때는 이 등나무 쉼터에 앉으면 거의 앞쪽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바로 턱밑까지 온통 건물들 뿐이다.
사실 벌레가 많아 앉아있다 기겁을 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학교의 풍경이 좋아 종종 톱스타들이 와서 촬영을 하곤 하기도 했었다.
강수연을 볼 수 있었고 정애리도 본 기억이 있다.
톱스타가 왔는데도 사인해 달라고 나서는 학생이 하나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방송국에 있었던 관계로 방송제 때 이 강당의 무대에 섰었다.
800명 정도 가량 들어가는 규모인데
3분의 2쯤 찬 관중들을 눈앞에 두고 공연하는 맛이 괜찮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건물마다 작은 카페들이 있는 듯 싶다.
카페들이 아주 예쁘다.
내가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가장 확연하게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학교의 남쪽으로 해성여상이 붙어있었는데
해성여상과 우리 학교 사이에는 소운동장이 있었다.
이제 소운동장은 없다.
그 자리는 법학관의 거대한 건물이 몽땅 다 차지하고 있다.
체육시간은 대부분 축구를 하며 보냈는데
그때면 여고 학생들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오빠들!”하고 소리치곤 했었다.
종종 주소를 적은 쪽지를 던지는 여학생도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소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는데
그 의자들이 이제는 모두 방향을 바꿔 돌아앉아 있었다.
하긴 법학관 건물을 마주하고 면벽 수행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 싶다.
비오는 날 이곳에서 우산을 쓰고 여자 친구랑 같이 앉아 있으면
저절로 분위기가 숙성되어 상당한 수준까지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 건물이 도서관이었다.
아울러 시위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건물 바로 앞이 넓은 광장이어서 이곳에서 모여 구호를 외치며 의지를 다졌고
그 다음에는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나갔다.
나는 거의 시위는 하지 않고 구경만 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숲속에 자리한 소강당 건물은 내가 제일 좋아한 곳이었다.
지금은 주변으로 높은 건물들이 빙 둘러섰지만
80년대 초에는 완전히 한쪽의 숲속으로 고립된 곳이었다.
초록이 진해지면 찐한 사랑에 목마른 청춘들을 잘 숨겨주었다.
물론 나도 애용했었다.
하루는 여자 친구와 손잡고 이 건물 뒤켠을 찾았는데
이미 선점한 커플이 있어 분한 마음을 달래며 물러나야 했었다.
지금은 자작마루라 불린다.
연극 공연을 이곳에서 했었다.
그때 연극반의 여학생들은
우리 학교의 일반적 여학생들이 보여주었던 미모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미모를 소유한 존재들이었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의 미모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공헌한 것은 단연 조경학과였다.
물론 연극반에서 발군의 미모를 과시했던 여학생들도 모두 조경학과였다.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3월 16일 서울 전농동의 서울시립대에서

빈공간이 많고 시골스런 분위기의 학교였는데
오랫만에 찾아보니 이제 빈공간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입학하고 난 뒤 매년 한 해에 하나씩 건물들이 들어섰다.
아마 내가 졸업한 뒤에도
매년 건물을 하나씩 짓는 것을 꾸준히 계속 이어나갔나 보다.
이제는 빈땅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렇게 짓고도 여전히 부족한지 작은 규모의 건물들은 부수고
그 자리에 높고 큰 건물을 들여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눈에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대학의 모습으로 보일 듯 싶다.
하지만 빈터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갖고 있는 나에게
내 기억을 뭉개고 들어선 이 발전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이렇게 변해가는 것을.
다만 기타치며 노래부르고 있던 여학생들의 모습은
우리의 옛시절과 겹쳐지면서 오랫동안 흐뭇한 풍경으로 남을 듯하다.

14 thoughts on “서울시립대 나들이

  1. 역시 법학 전공자가 경영으로 합격은 무리군요 ㅠㅠ

    ㅎㅎㅎ IMF 전엔 공무원 구태여 할 필요 없었죠 ^^

    재미있는건 90년대 중후 대졸 보통 3000대 임금 받는다 해서 갔는데…

    지금 3000대면 고임금군이라네요 ㅠㅠ

    응원 감사합니다, ^^

    1. 임금이 계속 하향 평준화로 가고 있으니까요. 배불리는 건 자본가들 밖에 없는 듯. 올해 취직운이 드디어 피길 바랍니다. ^^

  2. 오랫만에 들렀네요 선배님~ ㅋㅋ

    저날 시험은 잘봤는데 컴터용펜이 너무 흐려서 0점처리되었습니다 ㅠㅠ

    그래서 할 수 없이 어제죠 토요일 23일에 서울도시철도 필기시험을 보고왔네요

    전 법학 전공자인데, 법학을 안뽑이니 경영학으로 ㅠㅠ

    문제가 너무 쉽게 나와서 고민입니다. 제가 실수한 항목들이 아주 큰 데미지로 돌아올듯한…..

    선배님때는 졸업하면 서울시 8급~ 들어갈수 있었죠~

    흑흑… 저 졸업때부터 그게 하필이면 없어져서~ ㅠㅠ ~

    극심한 취업한파에…ㅠㅠ…

    10년전에 국정원 7급 붙었을때 갈걸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

    군대보다 더 경직되어 괜히 몸만 상할까봐… 아는 분이 걍 사시하라고해서 하다가..

    학원에서 공기업 강의도 하고 원장한테 돈뜯기고….

    배운도둑질이 공기업 분야라 계속 공기업만 파고 있는데,

    나이 많고 무경력이라~ 매번 면접 탈락하네요 ㅠㅠ

    올해는 마사회나 도로공사 꼭~ 들어가야 하는데~

    잘되라고 기도 좀 해주세요~~~ ^^ ~~~~~

    가끔 놀러오겠습니다~ ^^ ~

    1. 우리 때는 공무원으로 가는 건 많이 꺼렸죠. 저는 취직은 아예 하질 못하고 여지껏 살고 있어요. 올해 꼭 합격하여 행복한 회사 생활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할께요. ^^

        1. 작가는 평생 야인이죠, 뭐.
          사진찍고 글쓰고 그러면서 살고 있어요.
          후배님의 인생에 평화와 안녕이 함께 하길 빌어요. ^^

  3. 저의 학교 선배시군요 ^^

    전 연대인문학부 > 건대 부동산 > 시립대 법학과 이렇게 돌아와서

    법학을 전공했구요

    90년대 이과 가서 할게 별로 없을듯하여 실용성 강한 법학을 전공했더니

    이젠 문돌이~ 가 문죄~네요

    학사장교 전역하니 1달뒤 서른살… 고시 5년하고

    학원에서 공기업 논술 강의하고 강사료 뜯기고 ㅠㅠ

    남은 학생들 회유로 같이 공기업 준비하다가

    공기업 준비만 5년차에 필기는 다 붙는데 면접에서 나이가 많아 죄다 탈 탈탈

    시험장소인 건대 인문학관 검색하다가 우연찮게 인연이 되어 들렀습니다 ^^

    선배님은 요즘 뭐하고 사시나요? ㅎㅎ

    가끔~ 궁금하긴해요 우리학교 선배님들이 아주 잘나가서 유명한 사람말고

    저처럼 평범한~ 범인들은 뭐하고 있는지….

    예전에 경기고 선배이자 시립대 환조 선배였던 임홍균 이란 형은

    전공이랑 무관하게 공인중개사 한다고 하던데…ㅠㅠ….

    제가 군대 갔다오고 연락이 끊겨 뭐하는지 모르겠고 …ㅠㅠ….

    아무튼~ 걍~ 궁금해서 끄적여봤습니다~

    이번 주말~ 건대 인문학관에 서부 발전 필기 셤 보러 갑니다~

    이번엔 최종 합격을 빌어주세요

    1. 하도 많이 변해서..
      우리 시대의 얘기는
      이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로 들릴 것 같아요.
      그래봤자 겨우 30년 정도 지난 얘기인데 말예요.
      본관 건물도 헐고 다시짓는다고 하더군요.
      기억은 허물어지고..
      건물은 또 새로운 기억을 쌓아나가기야 하겠지만 조금 슬프기도..

  4. 사진에만 그런 것인진 몰라도 건물들이 대체로 나즈막한 게 인상적입니다.
    입학부터 거의 수시로 장학금을 타신 수재셨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네요.^^

    1. 전체적으로 높은 건물은 없는데 제가 다닐 때는 아예 건물이 없던 시절이라 저는 건물들이 너무 많아서 좀 답답하더라구요.
      이 학교는 장학금을 못타는 학생이 바보 취급 당할 정도로 다들 타는게 장학금이었다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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