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물

Photo by Kim Dong Won

전화를 끊고 다시 일을 하려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컵을 힐끗 살펴보게 되었다. 막 흘러넘칠 듯이 물이 컵에 가득 담겨 있었다. 물은 흘러넘치고 싶은 욕망을 표면장력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물을 많이 따라 놨었나 의아해하며 입을 가져다 표면의 물을 후루룩 입 속으로 거두어 들였다. 금방 수위를 낮추며 여유가 생겼다. 컵을 들어 컵 속의 물을 모두 마셨다. 이상하다. 그녀의 시간을 들이킨 느낌이었다.
창동의 그녀가 전화를 했었다. 수유역이라고 했고 던킨 도너츠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커피가 너무 맛이 없어. 도너츠 집이라서 그런 가봐. 전화를 타고 귓속으로 넘어온 그녀의 말이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라는 소리를 여러 번에 걸쳐서 반복했다. 간간히 자신의 사진도 찍어서 보냈다. 사진의 얼굴엔 고양이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음 대화를 시작할 때 혹시 야옹 소리를 내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끝내 야옹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귀엽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고양이는 아니었다.
간간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전했다. 술취한 남자가 눈길에 휘청거리며 쓰러졌고 친구들이 부축하고 있다고 했다. 그랬다. 그녀는 도너츠 집에 앉아 내게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걸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중계했다. 아, 잊을 뻔했다. 여기는 눈이와라는 말을 그 전에 했었다. 그 말에 나는 방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눈이 뿌리는 듯 했으나 비 같기도 했다. 베란다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깥은 조용했다. 조용한 것을 보니 눈이 분명했다. 비는 소리를 가지나 눈은 소리를 갖지 않는다. 여기도 눈이 와. 그런데 비인지 눈인지 헷갈려. 내가 잠시 소리로 변신을 하고 전화기를 타고 가 그녀에게 알려준 말이었다.
그렇게 오랫 동안 그녀와 전화를 했다. 그녀가 맛없다고 하면서 커피를 다 마셨네라고 했다. 그 오랜 시간의 뒤에서 내가 한 말은 나 이제 일해야 할 것 같아라는 것이었다. 알았다며 말을 받은 그녀가 갑자기 황급하게 아, 잠깐만 기다려봐 라고 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이 58분이니까 우리 2분만 더 얘기해. 그래서 우리 1시간 채워. 요즘의 스마트폰은 전화 시간을 친절하게 알려주는가 보다. 나는 2분을 더 얘기했다. 그녀가 이제 1시간 채웠다며 되었다고 전화를 끊었다.
다 들이키고 속을 비운 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로 컵에 전화로 나눈 그녀와의 1시간이 찬다. 물이 넘치지 않게 그녀는 전화 시간을 딱 1시간만 채웠다. 물을 들이킬 때 느낌이 이상했던 연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로 우리는 물대신 물로 바뀐 그녀의 시간을 마신다. 그 순간 멀리 수유역 부근에서 보낸 그녀의 1시간이 천호동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내 안의 것이 된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냐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미리 물을 컵에 가득 부어 놓고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녀와의 시간이 물로 변하는 놀라운 일을 믿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