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없는 시대를 흔드는 여자

Photo by Kim Dong Won
2018년 4월 22일 경기도 퇴촌과 서울의 동서울을 오가는 버스 속에서

가끔 퇴촌의 그녀에게로 놀러간다. 동네의 우성아파트 앞에서 13-2번 버스를 타고 가서 퇴촌 농협 앞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를 탈 때만 해도 자로 잰 듯 빈틈없이 출발한다. 빈틈없는 출발은 아이폰을 꺼내고 경기버스정보 앱을 띄워 명학골 가는 13-2번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버스앱은 버스가 강동 농협을 지나고 있고 5분쯤 뒤에 내가 서 있는 우성아파트에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버스앱에 이어 지도앱을 띄운다. 퇴촌 농협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한다. 1시간 7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나는 버스가 도착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에 1시간 7분을 더하고 그 시간에 약간의 여유를 보탠 시간을 계산한 뒤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다. 3시 15분에 도착할 듯. 퇴촌 농협으로 나와. 문득 지금의 시대는 너무 자로 잰듯 빈틈없는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녀는 그 빈틈없이 계산된 시간을 아무 소용없게 만든다. 언제나 계산된 시간보다 늦게 나오기 때문이다. 버스도 오늘은 계산된 시간보다 무려 15분을 일찍 도착했다. 퇴촌 농협 앞에 내린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오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또봉이 통닭이 문을 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또봉이 통닭으로 와. 퇴촌 농협이나 또봉이 통닭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문자를 보내는 동안 남자 둘이 같은 건물의 왼쪽 끝에 자리한 실내포차의 문을 잡고 흔들어 문이 잠겼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나도 또봉이 통닭 앞에서 몇 번 그랬던 경험을 갖고 있다. 이곳의 가게들은 닫힌 문과 꺼져 있는 실내의 등으로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경우가 잦았다. 어느 날 만났던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여기 가게들 멋지지 않아? 꼭 장사할 생각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처럼 장사를 해.
승용차 두 대가 차 대기 좋게 경사를 비스듬하게 낮추다가 차로변에서 아예 높이를 없앤 경계를 넘어 인도로 머리를 들이민다. 두 대의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파리바게트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동안 간판만 내걸고 문이 잠겨 있었던 이 건물의 파리바게트는 근래에 들어 안을 단장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때부터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보는 가게들 중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되었다.
나는 내가 자로 잰 듯 계산해서 보내주었던 시간을 조금 늦게 나타나는 것으로 흔들어 놓은 그녀를 치킨집에서 만나 맥주를 마셨다. 그녀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내게 말해주었으며 나는 내가 여느 때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쓰고 있는 원고가 잘 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붙여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요즘을 얘기하고 맥주를 마시고는 그녀를 보냈고 나는 집으로 오는 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자로 잰듯 계산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계산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의 차창 밖엔 가장 예쁠 때의 초록이 연두빛깔로 채워져 있었으며 그것은 돌아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오는 길에 귀에 끼운 이어폰 속에서 롤링 스톤스의 Paint it Black이 흐른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롤링 스톤스의 미크 재거가 아니다. 게이트 플라워즈의 박근홍이 그 노래를 불러준다. 문득 지금은 Paint it Black의 시절이 아니라 Paint it Green의 시절이란 생각이 든다. 차창 밖으로 초록으로 칠해진 풍경이 연이어 지나간다.
만남은 시간을 계산하게 만든다. 그러나 퇴촌의 그녀는 계산된 만남의 시간을 흔들어 놓는다. 돌아오는 길의 귓속에선 박근홍이 롤링 스톤스의 노래를 부르며 눈에 보이는 빨간 문을 검게 칠해버리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차창 밖의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칠해져 있었다. 초록이 노래를 흔들었다. 버스도 조용하게 길을 가진 않았다. 자주 심하게 버스가 흔들렸다.
(2018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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