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호흡하며 보낸 하루

Photo by Kim Dong Won
2023년 4월 19일 서울 이대입구의 한 술집에서

길고 긴 일정의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방화의 거처를 나설 때만 해도 일정은 아주 단순했다. 천호동 집에 가서 들고간 빨래거리를 내놓고 동네의 치과에 들러 진료를 받은 뒤 다시 거처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돌아올 때 지난 번에 가져갔던 속옷과 수건을 다시 챙겨오기만 하면 되었다. 지난 번에 집에 갔을 때 작업한 뒤 놓고온 매직 마우스를 챙겨오는 것도 염두에 둔 일 중 하나였다. 7시쯤 방화의 거처를 나선 걸음이 천호동 집에서 점심을 먹고 12시쯤 다시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일정은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방화에선 항상 앉아서 나가지만 천호동 집이 있는 굽은다리역에선 지하철을 타도 곧바로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운이 따르는 날엔 두 정거정 만에 강동에서 자리가 나기도 한다. 멀리 방화의 종점까지 가야 하는 나는 자리가 나지 않으면 굳이 서서 방화까지 갈 이유가 없어지고 만다. 지하철에서 자리가 나질 않자 나는 왕십리에서 열차를 내렸다. 2호선으로 바꿔타고 홍대입구까지 갈 생각이었다. 열차를 내려 2호선으로 걸어갈 때 일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더니 차주일 시인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전화를 걸고 나서 2호선으로 향하던 걸음은 타고 나온 5호선의 반대편 승강장으로 옮겨졌고 다시 아차산역으로 돌아가 차주일 시인과 차 한 잔 했다.
역에서 내려 차시인이 알려준 곳을 지도앱에서 살펴보고 걸어가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이 알려준 곳의 맞은 편 커피집에 있다고 했다. 커피집의 이름은 문앤도어였다. 내 취향이 커피보다 술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차시인이 주인에게 맥주 같은 것도 있냐고 물었을 때 하이볼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냥 카페인 없는 음료를 한 잔 달라고 했다.
내가 집 나왔다는 얘기에 차시인은 아주 신이 난 듯했다. 그가 집나와서 혼자 산지 10년이 넘은 상당한 선배란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뭐든 먼저 많이 경험한 사람은 해줄 얘기가 많은 법이다. 그다지 수긍이 되지는 않았다. 그 얘기 속에서 10년 넘은 세월이 혼자의 자유를 상당히 희석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가 회복시킨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얘기했지만 집나온지 두 달된 사람에게는 아주 먼얘기로 들렸다. 그래도 그는 두고 보라며 내 앞길의 운명을 별렸다. 나는 내가 너같지 않다며 운명에 대한 그의 장담을 밀어냈다.
차시인은 이대입구에서 누군가를 만날텐데 같이 보자고 했다. 예전에 한 번 얼굴본 시인이었다. 둘은 아차산역에서 탄 5호선을 왕십리역에서 2호선으로 바꿔타고 이대입구로 향했다. 열차 속에서 뜻하지 않게 이소선합창단의 테너 나석채를 만났다. 차시인을 나석채에게 소개했다. 차시인은 내 소개의 끝에 왜 자기 소개에 빠뜨려선 안될 형용사를 빠뜨리냐고 했다. 시인이란 말 앞에 붙여야할 그 형용사는 ‘훌륭한’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내가 빠뜨린 형용사가 ‘재수없는’ 같다고 했다. 셋이 낄낄대고 웃었다.
이대입구에서 약속한 시인을 만났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카페 투섬플레이스였으나 내가 이곳에서 맥주를 파냐고 했더니 약속한 시인이 그럼 맥주집으로 갈까라고 물었다. 셋은 그곳을 나와 이대 정문쪽 골목으로 이동을 했다. 골목은 내가 예전에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던 시절의 기억을 배반하고 있었다. 맥주집 찾기가 쉽지 않았다. 셋은 이 학교 학생들은 요즘 공부만 하나보다고 했다. 이래서야 술은 언제 배울지 셋이 함께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곳이 도대체 무슨 곳인지 궁금하여 들어간 곳에서 드디어 맥주파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둘은 맥주를 마시고 한 명은 탄산음료 환타를 마셨다. 오래 떠든 것 같다. 얘기의 사이에 간간히 낄낄거리는 웃음이 끼어드는 대화였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내가 너무 우리만 떠든 거 아니냐고 했더니 차시인이 약속한 시인이 떠드는 거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내 걱정을 무마해 주었다.
셋은 그곳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시인은 근처가 집이라 집으로 걸어갔고 차시인은 가는 곳이 나와 반대였다. 그의 열차가 먼저와서 그가 먼저 갔고 나는 이대입구에서 열차를 타고 홍대입구에서 내렸다. 홍대입구에서 탄 공항철도가 가양대교를 건널 때 서쪽 하늘에 저녁해가 붉게 지고 있었다. 저녁해는 방화대교에 걸려 있었다. 아침 일곱시쯤에 나간 걸음을 저녁 일곱시쯤 붉은 저녁해가 맞아주는 귀가길이었다.
거처로 올라왔을 때 문밖에 택배가 놓여있었다. 택배 속에 들어있는 것은 전자렌지에 돌려먹을 수 있는 생선이었다. 삼치구이 하나를 뜯어서 전자렌지에 돌렸다. 삼치를 안주로 맥주 한 캔 마셨다.
다소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이 하루의 일정을 내가 기록해 두는 이유는 이것이 하루 종일 내게 자유의 호흡이었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일정은 자유의 호흡이 된다. 억압의 호흡도 있다. 어떤 억압이 호흡마저 억눌러 숨을 쉬면서도 가슴이 답답한 날이 된다. 그러나 내가 집을 나온 뒤부터 세상은 대기가 바뀌어 있었다. 그 때문에 요즘 내게 하루하루는 그냥 하루하루가 아니라 대기가 바뀐 전혀 다른 행성의 하루들이다. 자유를 호흡하며 보낸 하루가 그렇게 길고 오래 흘렀다. 길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술마시고 떠들며 보내는 모든 시간이 자유의 호흡이 되는 하루이다. 지금이 내게 그런 시절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23년 4월 19일 서울의 가양대교를 건너는 전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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