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은 2023년 6월 1일 목요일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 추모문화제에 함께 했다. 리허설을 위하여 집회 시간보다 일찍 집회 장소인 광화문의 파이낸스 빌딩 앞에 도착한 단원들을 맞아준 것은 집회를 준비하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집회 장소를 점거하다 시피 채우고 서 있는 경찰들이었다. 항상 집회가 열리곤 했던 보도는 커다란 화분들이 서서 집회 방해를 획책하고 있었다. 경찰들의 복장은 중무장 상태여서 이들이 집회를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테러를 진압하기 위해 온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집회는 민주주의의 호흡 같은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경찰들의 복장만으로도 호흡 곤란을 겪었을 듯 싶다. 집회 공간도 엄청나게 축소되어 있었다. 윤석열 정권 아래서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위협 받고 위축되고 있는지를 축소된 집회 공간이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죽음을 삶의 끝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죽음을 사나흘의 시간 동안 우리 곁에 두었다가 보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보낼 수 없는 죽음이 있다. 해명되지 않는 죽음이 그렇고, 내몰린 죽음이 그러하다. 그러한 죽음은 죽은 것으로 죽지 않는다. 죽음은 죽어서도 살아있다. 양회동 열사의 죽음이 그렇다. 그 죽음은 건설노동자로 살며 인간을 찾고자 했던 삶을 폭력배인인양 몰아부쳐 억울함을 낳고 그 억울함이 분노로 이글거리다 몸의 불로 발화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멈춘 심장은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건설 노동자들의 심장으로 이식된 듯 옮겨가 여기저기서 뛰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는 많은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있는 자를 보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모여 그를 추모한다. 그 추모의 끝에서 그를 보내려면 그의 죽음을 몰고온 윤석열 정권을 쫓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때의 세상이 비로소 수많은 노동자의 심장으로 뛰던 그가 평화로운 안식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추모제에서 이소선합창단이 노래 불렀다.
첫 곡은 <벗이여 해방이 온다> 였다. 소프라노 최선이 홀로 불러 노래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합창단 단원이 홀로 연 그 노래의 길에 들어서 그 길을 모두의 목소리로 가득 메운다. 소프라노의 목소리 하나로 “그 날은 오리라” 예언하고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라 약속하며 시작된 노래는 합창단 모두가 입을 모아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새날을 여는” 노래가 된다. 새날과 해방은 같은 이름이다. 새날은 해방과 함께 와야 하며, 해방이 오는 날, 비로소 날은 새롭다.
두 번째 곡은 <진군의 노래> 였다. 노래는 “깨지고 짓밟혀도 우린 노동자 자유와 평화 지키는 이 세상의 일꾼”이라 말한다. 또 노래는 “뺏기고 또 뺏겨도 우린 노동자 착취의 장벽 부수는 이 세상의 일꾼”이라 말한다. 노동자는 탄압과 수탈 속에서도 그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이 땅의 내일”이 그 노동자의 손에 있다. 노래는 노동자의 진군을 노래하면서 자본이 여는 미래가 짓밟고 수탈하는 미래라는 것을 동시에 말한다. 어느 것이 인간의 이름에 값하는가는 자명하다.
세 번째 곡은 <그날이 오면>이었다. 노래는 남자 단원들의 중저음으로 시작된다. 여자 단원들이 목소리를 보태 완성해내는 그 날은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날이다. 그날이 와야 모든 노동자들의 가슴 속으로 흩어져 만인의 심장 박동이 되어버린 한 삶을 다시 그의 몸으로 모아 비로소 죽음으로 누이고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세 곡의 노래는 말한다. 그 날은 해방을 향해 걸어간 진군과 함께 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진군의 맨앞에 건설노동자들이 서 있었다. 그가 억울하게 죽어서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가 모두의 가슴에 흩어진 심장 박동으로 살아있어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죽음은 심장이 멈춘 뒤에 모든 이의 심장에서 뛴다. 이소선합창단이 세 곡의 노래로 그 산자와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