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며칠 쌀쌀하더니
오늘은 내려앉았던 기온도 마지막 반항을 한결 누그러 뜨린 것 같다.
봄으로 향하던 계절의 걸음이
심술궂게 뒷걸음질 친다 싶었지만
역시 시간이 흐르고 고이면서
계절을 밀어내는 그 힘은 어쩔 수 없는지
이제, 겨울은 가고 있다.
올겨울엔 내가 사는 서울엔 그다지 눈이 많지 않았지만
띄엄띄엄 눈소식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빼놓지 않고 눈을 찾아 나섰던 것 같다.
겨울이 가는 마지막 길목에서
올해와 지난해의 눈 사진을 뒤져
사랑 연서를 엮는다.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눈이 오는 날,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나무들 모두 제 자리에서 한발자국의 움직임도 없지만
우리는 그날 완전히 다른 세상에 서게 되죠.
사랑이 오는 날,
바로 그랬어요.
우리 모두 제 자리에서 한발자국의 움직임도 없었지만
그때 당신은 다른 사람이었죠.
굳이 멀리 산으로 걸음할 필요도 없어요.
무심히 함께 하던 일상도 어찌 그리 모습을 달리하는 지요.
모자처럼 흰눈을 뒤집어쓴 계량기 앞을 지날 때면
저절로 시선이 그리로 돌아갔어요.
사랑이 오던 날,
당신도 그랬지요.
그냥 마주 앉아 함께 하는 아침만으로도
그 아침이 달랐어요.
아침을 먹는 내내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죠.
시냇물이 아무리 재잘거려도
언제나 개울가의 돌들은 귀를 막고 살았죠.
그러나 눈이 덮인 날,
그 앞을 지날 때면
이제 돌들이 물소리에 귀를 연 느낌이었어요.
물소리가 포근한 눈 속으로 스며들어
돌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 듯 했으니까요.
사랑이 오던 날,
당신의 그 수다도 내 가슴으로 그렇게 스며들었어요.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들이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계단이예요.
오늘 그 자리에 눈이 대신 앉았어요.
우리가 앉아 사랑을 얘기할 때도
오늘처럼,
계단은 저런 하얀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눈이 온 날은 걷고 싶어요.
그 희디 흰 순백의 눈밭에
내 발자국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끝간데 없이 걷고 싶어요.
사랑이 오던 날도 그랬죠.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요.
걸어가다 돌아보면
우리들의 발자국이
조용히 숨을 죽인채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는 듯 했어요.
우리의 발자국도
우리의 얘기가 궁금했던 것일까요.
눈이 오던 날,
그렇게 세상은 순백으로 바뀌었죠.
나는 그 순백의 세상에 눈이 부셨지만
순백은 이 세상의 빛깔같지가 않았어요.
나는 그게 못내 두려웠죠.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당신도 이해할 거예요.
내 것 같지 않은 것을 내 곁에 두었을 때의 그 설레임과 불안을.
나는 곧 알아차렸어요.
그 순백의 눈이 녹아 없어진다는 사실을.
그나마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잡은 눈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제 고결함을 잃지 않은채
이 세상에 순백으로 왔다가
떠나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사라져 갈 수 있으니까요.
양철 처마의 지붕 위에서
따뜻한 햇볕 속에 잠자듯 녹고 있는 눈을 보면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놓아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런 가요.
그 누가 생활의 한가운데서 발을 뺄 수 있겠어요.
눈은 사람들 발길이 지나갈 때마다
질퍽거리기 시작했죠.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의 사랑이 생활의 한가운데 놓였을 때
순백으로 왔던 우리의 사랑은
그 순간을 전설처럼 과거로 보내고
생활의 한가운데서
서로의 발길에 밟힐 때마다 질퍽거리기 시작했죠.
우리의 사랑이
생활의 한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 질퍽거림은 더더욱 심해졌죠.
정말 눈이 오긴 왔던 것일까요?
이 질퍽거리는 것들이
정말 한때 눈이라 불리었던 것이 맞긴 맞는 걸까요?
정말 우리에게 사랑이 있긴 있었던 것일까요?
나는 질퍽거리는 거리를 걸으며
문득 그게 의심스러워졌죠.
하지만 당신,
당신은 알고 있죠.
올겨울 다시 추위가 찾아와
우리들이 방구석에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다시 눈소식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그러면 그때 나는 떠날 거예요.
그 순백의 풍경을 찾아 눈덮인 설악산으로.
아마도 당신은 알고 있겠죠.
어느 날의 눈소식에
이른 새벽 홀연히 떠나버린 내 걸음이
그냥 눈을 보러 간 것이 아님을.
그래요,
나는 사실 힘들었죠.
생활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사랑이 질퍽거릴 때마다
나는 생활의 힘겨움보다
그곳엔 마치 사랑이 없는듯 여겨져 그게 더 힘들었어요.
나는 그렇게 힘들 때
눈을 찾아 나선 것 같아요,
마치 사랑을 찾아 나서듯이.
이제 생각해보니 사랑은 그런 건가봐요.
순백으로 와서 우리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고,
그러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질퍽거리며 사라지고,
그렇게 사라진 듯 했을 때,
다시 순백으로 와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는,
눈과 같은 것인가 봐요.
그러니 사랑은 한결같다는 건,
다 새빨간 거짓말이예요.
사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계절과 같은 거예요.
왔다가 가고, 갔는가 싶으면 또 다시오죠.
이제 나는 당신에게서 사랑의 계절을 보게 되었어요.
앞으로는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겨울에도 눈은 있고,
또 겨울이 가면 봄은 오는 거니까요.
4 thoughts on “눈으로 엮은 사랑 연서”
여섯번째 사진이랑 열한번째 사진처럼 눈의 느낌이 그대로인 사진 너무 좋아요.^^
여섯번째 사진은 강원도 구룡령 꼭대기에서,
마지막 열한번째 사진은 저희집 지붕에서 찍었죠.
이제 꽃피면 또 꽃을 쫓아다녀야 겠죠.
빨리 날씨가 좀 푸근해 졌으면 좋겠어요.
멋진 사진들과 함께 술술 잘 풀려나간 이야기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니 더욱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