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3일 서울 합정동에서
얼음과 커피가 만나 얼음 커피가 된다.
싸늘하고 투명한 표정,
반듯하게 각진 사각의 얼굴,
시간이 지나면 완고한 각을 풀고 시원하게 녹아드는 그 유연함,
입에 하나 물면
적어도 입속에서만큼은 여름을 곧바로 물리치는 그 즉각적 위력,
깨물어서 잘게 부수면
사탕도 아니면서 사탕보다 더 빠르게 녹아드는 그 속도감,
얼음은 매력적이긴 했다.
그래서 둘의 만남은 항상 커피의 기다림으로 이루어졌다.
커피는 기다렸다.
커피의 기다림은 하얀 김으로 솟아올라 바깥을 기웃거리며
얼음이 언제 오는지 목을 빼게 하곤 했다.
혹자는 커피의 기다림을
진한 갈색 향기의 기다림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 기다림은 대개 봉지에 털어낸 건조한 가루를
뜨거운 물에 녹이면서 시작되었다.
기다리는 가슴은 뜨거웠다.
그 뜨거운 가슴의 체온을 모두 내주며 얼음을 받아들일 때
드디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음 커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불현듯 방문한 합정동의 어느 가정집에서
전혀 다른 얼음 커피를 만났다.
그날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 둘의 관계가 정반대로 뒤집혔다.
기다림은 이제 커피가 아니라 얼음의 몫이었다.
얼음들은 컵에 담겨, 혹은 커피가 오는 길목에 모여 커피를 기다렸다.
커피는 마치 강림하듯 얼음의 머리맡으로 와서
그 향기로 일단 커피에 대한 얼음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뜨거운 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마치 씨앗처럼 커피 가루 위에 심어졌고
그 뒤에 발아를 도와줄 비처럼 뜨거운 물이 커피의 밭에 뿌려졌다.
그리고 나서 조금 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드디어 축복처럼 커피가 내려왔다.
가장 뜨거운 가슴으로 가장 낮은 온도의 얼음 세상으로 내려와
얼음과 체온을 맞추어주는 구원의 커피였다.
얼음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커피였다.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습성을 아는 주인이
좀 연하게 해줄까를 물었지만 나는 그냥 마시겠다고 했다.
내가 생전 처음 마셔보는 얼음 커피였다.
항상 커피의 기다림과 얼음의 강림으로 만났던 얼음 커피를
합정동의 아는 집에 놀러갔다가 얼음의 기다림과 커피의 강림으로 만났다.
그 집이 왜 그렇게 커피에 집착을 하는지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도 있었는데 이제는 좀 알겠다.
그 집에선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정반대로 뒤집어져 있었다.
그 세상에선 커피를 만난 컵 속에서 얼음이 꽃잎처럼 떠 있었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그 뒤집혀서 온 세상에선
커피를 정말 맛있게 마실 수 있었다.
때로 커피는 사람에 따라 좋고 싫고가 갈리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어떤 가슴 벅찬 만남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2012년 6월 13일 서울 합정동에서
6 thoughts on “얼음과 커피”
아주 가끔 글이 무의식 깊은 곳에 있던 것을 일순간 꺼내 보여주는 경우가 있어요.
혼자만 보는 손일기를 써갈 때 그렇죠.
위 글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저조차 언어로 형상화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일순간 꺼내 보여주신 거예요.
그렇죠!
저는 거꾸로 살고 싶고, 커피도 그저 ‘거꾸로 커피’를 하고 싶죠.
이것은 은밀하게 숨겨놓은 꿈이기도 하고, ‘내가 정말 그것을 원하나’를 의심하기도 하면서요.
이렇게 사진 속 인물의 감추인 무의식까지 찍어주는 사진과 글은 뭐라 이름 붙여야 할까요?
예언자적 글? 미아리적 글? 처녀보살적 글?ㅎㅎㅎㅎ
이 글 고대~로 모셔가서 제 블로그에 걸러도 되겄지유?^^
블로그로 가져가면 저의 영광입지요.
그게 프로랑 아마추어는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입니다. 집에서도 커피를 내려마시는데 별로 감흥을 못받다가 역시 프로가 내리는 걸 보니 손의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띄게 다르더라구요. 다음에는 좀더 미세하게 관찰해볼 생각입니다.
꺼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날 나눈 대화들 옮겨 놓은 거예요. 제가 그날 물었잖아요. 마치 씨앗을 뿌리는 것 같다구요. 친절하게 답해주구선..
다들 아이스 커피라 하는 걸 얼음 커피라 하시니 새롭네요.^^
>>싸늘하고 투명한 표정, 반듯하게 각진 사각의 얼굴,
>>시간이 지나면 완고한 각을 풀고 시원하게 녹아드는 그 유연함.
저는 커피 묵상엔 이르지 못하고 얼음 묵상에서 반했습니다.
바리스타 정에게서 특별 대접 받았습니다.
너무 짧게 놀다와서 다음에는 좀 길게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커피는 마치 강림하듯 얼음의 머리맡으로 와서 /
ㅎㅎㅎ 여름엔 정말 냉커피 좋지요!
얼음이 짜릿하긴 한가봐요
그런데 …이 글을 읽으니 커피가 한 수 위인듯 하고요 ㅋㅋ
아니 둘 다 …고수…여름엔 얼음 커피…ㅎ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렇게 냉커피 만드는 건 생전 처음 봤어요.
역시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분에게서 얻어 마시니까 남다르긴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