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난 바닷가에서 – 소록도 해수욕장

가끔 나는 관객이 다 빠져나가고 난 뒤의 텅빈 무대와 그 느낌이 궁금했다.
그건 내가 관객들 속에 휩쓸려 있는 느낌보다
그냥 아무도 없는 무대와 노닥거리는 느낌을 가져보고 싶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대학 때 무대를 이용해 볼 수 있었던 기회가 한두 번 있었던 나는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면 슬그머니 혼자 강당으로 들어가곤 했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객석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텅빈 무대를 바라보는 혼자의 시간을 즐기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철지난 바다가 좋았다.
물론 젊을 때는 제 철의 바다가 좋다.
그렇지만 사실 제 철의 바다는 바다와 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에 휩쓸리다 오는 것이다.
철이란 그러고 보면 사람이 붐비는 철이란 뜻이지
바다의 철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래서 철이 지나면 그곳에서 사람이 텅빈다.
그러면 바닷가에서 바다와 노닥거릴 수 있다.
9월 8일, 그녀와 나는 소록도 해수욕장에 있었다.
소록도 해수욕장은 소록도의 동쪽 해변에 있다.
철지난 해변이었다.
나는 철지난 그곳의 텅빈 바다가 좋았다.

Photo by Kim Dong Won

참, 이상하다.
이미 나무들로 차 있는데
나무들만 있을 때는 바닷가의 숲이 비어보인다.
그러다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자리를 차지하면
그땐 답답하도록 숲에 자리가 없어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혹시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 빈 공간이
사실은 빈 자리가 아니라 길이기 때문이 아닐까.
바람이 흠흠 흙냄새를 맡으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숲길,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 공간은 바로 그런 숲길이 아닐까.
길이 막히면 답답한 법.
사람들이 숲에 텐트를 치면 사실은 길을 막는 것이고,
그래서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닐까.
그러나 철지난 바닷가의 숲엔 나무들밖에 없다.
나무들만 있을 때면 숲은 멀리까지 휑하니 비어있는 느낌이다.
그건 바람이 많은 바닷가의 숲으로 철지난 걸음을 했을 때 얻게 되는
아주 독특한 느낌이다.

Photo by Kim Dong Won

물이 몰려나갈 때면
물풀도 물따라 함께 몰려나갔다.
하지만 물풀의 마지막은 항상
물의 발끝이라도 잡으려 안간힘으로 팔을 뻗다가
물을 놓치고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는 안타까움이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뭇잎은 가볍게 물결을 타고 바다로 갈 수 있었지만
물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잠시 물풀 곁에 머물며
물을 향해 팔을 뻗다 엎어진 물풀의 아픔을 위로해 주기로 했다.
때로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Photo by Kim Dong Won

개 한마리가 자꾸 황새를 쫓아다닌다.
친구삼고 싶은 눈치였지만
황새는 그 마음을 모르는 듯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음, 바다는 난하게도 엉덩이를 흔들며 나가셨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냥 이리저리 걸어보며
제 발자국 소리를 선명하게 들어보는 것도
텅빈 무대의 매력 중 하나이다.
철지난 바닷가를 찰박거리며 걸어볼 때의 느낌도 그와 비슷하다.

Photo by Kim Dong Won

물이 빠져나간지 얼마되지 않았다면
흙이나 모래가 밟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디딜 때마다 물이 아주 얇게 밟힌다.
그 느낌도 아주 좋다.

Photo by Kim Dong Won

조개의 문양은 다양하다.
그 문양이 삶의 흔적이라면
이 조개는 상당히 소용돌이치는 삶을 산게 분명하다.

Photo by Kim Dong Won

바닷가에 평상이 있었다.
그곳에 누웠더니
하늘이 한가득이었다.
가슴 가득 하늘을 담고 싶다면
적당히 자리를 깔고 누워볼 일이다.

10 thoughts on “철지난 바닷가에서 – 소록도 해수욕장

  1. 11월이나 12월에 제주도나 일본 둘 중에 하나는 갈 예정이랍니다.
    일본은 책도 사올겸 겸사겸사 가는건데…제주도도 놓치기싫은 곳이네욤~~

    1. 축하드려요.
      저는 쓰고 있는 책의 글이 오늘 아침부터 슬슬 필이 오는 것 같아요.
      하와이보다 제주도가 더 좋다고 그러는 사람들 많이 봤어요.
      좋으시것다. 세상에서 여행떠나는 사람이 제일로 부러워요.

  2. 제주도 여행에서 만났던 외국인들처럼 바다에 풍덩 하고 싶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아쉬운 단 한가지였어. 바다에 풍덩하지 못한거.
    아마도 휴양지가 아니고 삶의 현장이어서 그랬던 것 같어.

    1. 풍덩은 제주도 갔을 때 해야 해.
      거긴 섬 전체가 휴양지나 다름없으니까.
      번역 두 권 다하게 되면 제주도 가자.
      그나저나 경숙씨 책이 feel 안와서 걱정이다.

  3. 그림이나 글이나 삘받을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무슨 공장에 찍어내는줄 안다니까요…..
    저도 여행좀 다니면서 재충전이 절실하네요~

    1. 출판사들은 좀 각성을 해야 해.
      진득한 기다림이 좋은 글과 그림을 만드는 법인 것을.
      무슨 독촉이 좋은 글과 그림을 만든다고 생각한다니까요.

  4. 갑자기 가을바다로 가고싶어요!
    음..소록도 참 아름다운 바다군요.
    저는 사진으로 첨 보았다는,좋은곳에 여행을 다니시고
    고운 감성으로 이야기 꽃을 피워 주시니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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