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시는 어떻게 밀고 당기고 있는가 – 김병호의 신작시

『현대시』 2013년 5월호의 김병호 신작시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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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언어가 우리 앞의 현상을 좀더 폭넓고 다양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까.
가령 예를 들어 지금 회색빛 콘크리트 길 위로 소나기가 한줄기 훑고 지나간 뒤 하늘이 다시 맑게 벗겨졌다고 해보자. 그랬다면 아마도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그때의 풍경은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 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구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왔기 때문에 웅덩이의 물은 곧 마른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 언어들이 사실은 우리 눈앞의 현실을 언어에 담아서 우리에게 건네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러한 언어들 속에 담는 순간 눈앞의 현실이 그 언어의 형태로 굳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언어란 살아있는 현실을 일정한 양태로 굳혀버리는 경화제 같은 것은 아닐까. 김병호의 두 번째 시집 『포이톨로기』에 실린 시 중에서 한 구절을 빌려오면 그러한 의심은 더욱 확연해진다.

꿈꾸는 회색이
고인 웅덩이에는 소나기였던 생이 응고하고 있다 그 위에 얇은 하늘을 입히면 먼 곳으로 통하는 작은 창이다 회색의 태생이 드러나는 바람 불지 않는 곳 그래서 풀들의 피 냄새가 향기롭게 퍼지는 이런 모순 없는 곳
—「연립방정식」 부분

콘크리트는 “꿈꾸는 회색”이 된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말라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소나기였던 생이 응고하고 있다.” 그 웅덩이의 물에 하늘이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 위에 “얇은 하늘을 입”힌 것이며, 그렇게 하면 “먼 곳으로 통하는 작은 창”이 생긴다. 그러나 물이 다 마르면 콘크리트는 “회색의 태생”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콘크리트로 덮지 않았다면 풀들이 자라고 있을 자리이다. 콘크리트는 풀들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 곳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선 사실은 “풀들의 피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콘크리트가 풀들을 쫓아내고 만들어준 그 길의 편리함 때문에 그 피 냄새를 피 냄새로 맡지 못한다. 편리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풀들을 쫓아냈건만 사람들은 그 길에서 어떤 ‘모순’도 느끼지 못한다. 혹 우리가 그렇게 둔감한 사이에 풀처럼 여리고 힘없는 사람들이 효율이라는 이름아래 이 사회에서도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폭력 앞에 쫓겨나고, 그 과정에서 크게 다치고 또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읽어가다 보면 우리는 일상적 언어에 담겼던 우리의 현실과 김병호의 시에 담긴 현실이 과연 똑같은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관찰자의 정신이”자 ‘의식’이며, 그 “의식이 현실을 응고시”(「시간과 사건, 현실과 인생 사이의 경험적 연쇄」)킨다고 말한다. 시는 그 응고된 현실을 뒤흔들고 싶다는 욕망의 산물이다. 보다 엄밀하게 구획을 하자면 현실을 가운데 두고 그 현실을 응고시키는 일상적 언어와 그 응고된 현실을 뒤흔들어 새롭게 재편된 또다른 현실을 보여주는 시의 세상이 있다.
나는 현실이 어떻게 굳어진 것이며 시가 어떤 한계 내에서 그 현실을 뒤흔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실마리로, 그리고 응고된 현실을 뒤흔들고 싶다는 언어적 욕망을 현실 속에 구현시킨 시의 실질적 예증으로 내게 건네진 김병호의 신작시 다섯 편을 읽었다.

2
먼저 첫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앞의 이 편리하면서도 “견고한 현실”(「시간과 사건, 현실과 인생 사이의 경험적 연쇄」)은 어떻게 이렇듯 완고하게 굳어진 것일까. 다섯 편의 신작시 가운데서 「흐르는 흔적」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김병호는 “삼백만 겁 동안 너를 이르고서야 이름으로 퇴적”이 되는 것이며, “그 이름을 삼천만 번 부르고서야 부름이 생”긴다고 말한다. ‘겁’이란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을 하고 난 뒤 다음 개벽을 할 때까지의 시간이라고 한다. 말할 수 없이 긴 시간이다. 때문에 나는 이 시의 첫구절을 아주 오랜 세월 ‘너’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그 이름이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읽었다. ‘부름’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시인의 얘기를 무수한 반복이 ‘부름’을 만들어낸다로 읽었다. 부름은 아마도 부름의 형식일 것이다. 같은 이름도 부르는 형식이 다를 수 있다. 누구는 목소리로 부를 수 있고, 누구는 글자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이름에 담기면서 현실은 그 이름으로 굳어진다.
이름이란 말하자면 “모든 뒤척임이” 뒤척임을 멈추고 굳어져버린 ‘화석’이며, “딱딱한 기억의 음각들”이다. 음각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새겨진 기억이다. 새겨진 이름은 지우고 다시 쓰기가 어렵다. 그만큼 이름이 완고해졌다는 뜻이 된다. 그렇긴 하지만 “흐름이 흘렀을 적을 잊고 부름이 불리었을 시절을 가루로 날”릴만큼 오랜 시간의 뒤켠에서 이제 우리 앞의 현실은 거의 모든 것이 이름을 갖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름의 시대는 동시에 이름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이기도 하다. “일러지지 못한 이름들”이 “모두 공허로 녹아들어” 허공으로 떠버렸기 때문이다. 이름은 우리들로 하여금 대상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일러지지 못한 이름들이 떠도는 허공은 바라보아도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때문에 이름을 얻으면서 동시에 이름을 잃어버린 그 상실의 시대에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모두 초점을 잃”는다.
이름을 얻으면서 굳어져버리면 그때부터 현실은 “움직이는 일”이 “하나 없는 곳”이 되어버린다. 물웅덩이는 그저 물웅덩이로 굳어 있을 뿐, 현실 속에선 절대로 “먼 곳으로 통하는 작은 창”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이러한 세상에선 현실이 이름 하나를 얻으면서 동시에 그 이름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시인은 말한다. 그런 세상에선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너”라고. 좀더 정확히 하나의 이름만을 남기고 무수한 다른 이름을 잃게 되는 것이 너라는 얘기일 것이다. 무수한 다른 이름이란 좀더 구체적으로는 시적 은유란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너는 “각진 기억”이다. 음각되어 새겨진 기억이란 뜻으로 읽힌다. 그 너는 너로 한정되지 않고 나로 확장되어 “너라는 나”가 되어버린다. 이름을 얻은 존재였던 너와 나는 실제로는 “은유 없는 흔적들”에 불과했다. 시 「흐르는 흔적」은 그렇게 우리가 이름을 얻는 대신 은유를 잃어간 과정을 축약하고 있다.

삼백만 겁 동안 너를 이르고서야 이름으로 퇴적되고 그 이름을 삼천만 번 부르고서야 부름이 생기듯 흐르고 흘러 모든 뒤척임이 화석으로 굳어지고서야 나는 그것이 흐름인줄 알았으나 모든 세월을 거친 그 딱딱한 기억의 음각(陰刻)들, 흐름이 흘렀을 적을 잊고 부름이 불리었을 시절을 가루로 날리고 나자 일러지지 못하는 이름들 모두 공허로 녹아들어 시퍼렇게 멍든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들 모두 초점을 잃었으니 움직이는 일 하나 없는 곳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너, 너라는 각진 기억, 너라는 나, 그 은유 없는 흔적들
—「흐르는 흔적」 전문

그렇다면 시는 “그 은유 없는 흔적들”에 은유의 방식으로 새롭게 언어의 초점을 맞추어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의 일상적 언어가 그렇게 탄생되어 현실이 굳어졌다면 은유는 어떻게 탄생되는 것일까. 이번에는 「삶의 총론 1—흔들리는 은유」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 현실의 특징이라면 그 대척점에 서는 시적 은유는 반대로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다. 이미 제목에서 은유의 그러한 특징을 시사하고 있는 이 시는 “먼발치에서 훔친 여자의 얼굴을 그믐의 잠에 담그고 아흔아홉 개의 해가 지나는 길을 피해 견디다 건지면 여자, 아흔아홉 개의 열매로 올라왔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먼발치에서 훔친 여자의 얼굴을 그믐의 잠에 담그고 아흔아홉 개의 해가 지나는 길을 피해 견디다 건지면 여자, 아흔아홉 개의 열매로 올라왔다 마지막 하나는 죽음이기에 열매들, 외면하기 위해 번식한 아흔아홉 개의 은유 같아서 절망의 비탈에 매달려 들이마신 과즙은 시디신 환멸의 맛이었지만 환멸의 고랑에 얼굴을 처박고 격한 들숨으로 들이키면 눈 못 뜨고 처음 빨던 엄마의 마른 젖멍울 맛이었다 고통이었지만, 단 한번 스쳤던 떨림의 기억을 찾으려 모든 열매를 따먹으며 아흔아홉 개의 구비(口碑)를 외웠으나 백발을 파고드는 바람의 개수에 따라,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진흙의 점성에 따라 맛은 변했다 은유는 물결처럼 뒤챘기에 남은 건 내 무른 오해뿐이었다
—「삶의 총론 1—흔들리는 은유」 전문

아마도 시인은 먼발치에서 “여자의 얼굴”을 훔쳐본 것으로 여겨진다. “그믐의 잠”에 담갔으니 그믐께 잠을 자면서도 그 여자를 생각했을 것이다. “아흔아홉 개의 해가 지나는 길을 피해” 견뎠다고 했으니 그 여자를 직접 만나고 싶은 욕망을 백일 가까이 애써 눌렀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여 시인은 “아흔아홉 개의 열매”를 얻었고, 그 열매는 시를 계속 읽어나가면 “아흔아홉 개의 은유”같은 것이라는 말로 구체화되어 있다.
일상적 언어와 달리 은유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잠에 담그고” 해를 피해 견뎌내는 시간을 거쳐야 은유가 얻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은유를 얻었다고 하여 그 은유가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그 맛이 “시디신 환멸의 맛”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 그 맛은 “눈 못 뜨고 처음 빨던 엄마의 마른 젖멍울 맛”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마른 젖멍울 맛이니 빨아도 젖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본 한 여자에 대한 두근거리는 가슴을 은유적 표현으로 옮겼으나 느낌이 확 다가오지 않은 경우가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은유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 한번 스쳤던 떨림의 기억을 찾”기 위해서이다. 찾았다 싶었던 그 은유라는 열매의 맛은 “백발을 파고드는 바람의 개수”나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진흙의 점성”과 같이 외부적 요소에 따라 맛이 변한다. 다시 말하여 느낌에 일정함이 없다. “은유는 물결처럼” 몸을 뒤채며 끊임없이 변하며 시인에게 “내 무른 오해” 만을 안길 뿐이다. 은유는 굳어있지 않으나 대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 은유는 쉽게 얻어지지 않고 또 명확하게 해명이 되지 않는 것일까. 「삶의 총론 2—맥락이 진동하다」가 그 실마리를 알려준다.

젖은 땅속에서 나무의 혈관을 타고 끝에 이른 죽음이 열매로 맺혔다가 웅덩이로 떨어진 날부터 거품처럼 떠오른 비명은 어느 이름이 목적지인지 까맣게 잊고 산의 응달로만 맴돌기 시작했다 비명은 이내 사람들 사이에 메아리치며 귓바퀴에 패인 골의 모양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메아리의 주인은 잘못 찾아든 골짜기를 헤매다 빠져 죽은 어느 칼바람이었다고 말하는 노인 옆에는 웅덩이의 바닥에 겨울로 이어진 작은 틈이 열리면 메아리는 한파의 온도를 가진 한숨의 것이라고 잠꼬대하는 아이가 시들어가는 여름처럼 졸고 있었다 산으로 스며들던 연기의 한 자락을 맛본 나그네 산그늘을 밟지 않으려 종종걸음 치다가 개울에 빠졌고 살려달라는 비명 대신 이제 산의 주인은 메아리라고 자신도 모를 말을 외쳤다 각각 다른 모양으로 춤추는 소문은 그렇게 모두 다른 귀의 것이었지만 칼바람과 한숨만은 앞뒤 서며 등장했고 그 마지막 말에서는 그날 산그림자의 냄새가 났다 산그림자 안이어야 이야기는 증발하지 않았다
—「삶의 총론 2—맥락이 진동하다」 전문

이 시가 그려내는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살펴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 밑에 물웅덩이가 있다. 어느 날 그 웅덩이로 나무의 열매가 떨어진다. 김병호는 그 열매를 “젖은 땅속에서 나무의 혈관을 타고 끝에 이른 죽음”이라고 말한다. 나무 끝에서 열매로 맺혀 영글고 나면 사실 모든 열매는 떨어진다. 말하자면 죽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열매는 곧 죽음이다. 시인은 열매에서 결실의 이미지 대신 삶의 마지막을 본다. 열매를 죽음으로 환치시킨 이러한 시각은 일반적으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하지만 그 열매의 자리에 한 인간의 인생 말년을 놓으면 곧바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즉 맥락을 실질적인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비유적 차원에서의 인생 말년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이 표현은 수용될 수 있다. 그 열매, 즉 인생의 말년은 잘 해명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하여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래도 젊을 때는 삶의 목적이 어느 정도 분명한데 나이가 먹을수록 그 목적이 흔들린다. 그런 상황이 극에 달하면 누구나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비명’은 따라서 삶의 길을 찾을 수 없다는 회의의 극단적 양상이다. 그 비명은 ‘메아리’가 되지만 메아리는 답을 갖고 돌아오지 못한다.
“메아리의 주인”에 대한 얘기를 전하는 ‘노인’과 ‘아이,’ ‘나그네’의 말을 접하고 나면 시를 읽는 우리의 혼란은 더욱 심해진다. 그들의 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 메아리의 주인이 “잘못 찾아든 골짜기를 헤매다 빠져 죽은 어느 칼바람”이었다고 말한다. 아이는 ‘잠꼬대’를 하면서 “메아리는 한파의 온도를 가진 한숨의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그네는 “이제 산의 주인은 메아리라고 자신도 모를 말을 외”친다. 즉 메아리를 둘러싼 소문은 “각각 다른 모양으로 춤”을 춘다. 그 소문들은 모두 맥락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맥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에선 맥락이 단선적으로 굳어있질 않고 진동을 하기 때문이며, 때로 그 진동폭이 매우 크다. 이런 이해의 선상에서 나는 김병호가 “산그림자 안이어야 이야기는 증발하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산그림자를 맥락의 진동 한계로 읽었다. 은유도 지나치게 맥락을 벗어나면 증발해 버린다. 증발해 버리면 시를 쓴 시인 자신 이외에는 거의 그 은유를 손에 잡을 수가 없다. 시가 어려운 이유이다. 시인에겐 맥락의 진동폭에 어느 정도 한계를 두며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김병호의 신작시 다섯 편 가운데서 세 편을 현실과 시적 은유의 관계에 대해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는 시로 읽었다. 아마도 그 세 편에서 드러난 시인의 시에 대한 시선은 세상을 바라볼 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매운 기침」을 들여다 보자.

내 왼 호흡에 섞여 나오는 네 야유소리에 깜짝 놀랄 때마다 내 왼쪽 볼에 난 상처가 네 것이기 때문이라고 되새기는 내게 진공의 공간은 위아래가 없는데 왜 찬물에는 위아래가 있냐고 깔깔거리며 물었다 여름에도 네 날숨이 눈에 보이는 건 폐에 가득 찬 안개 때문이라고 나는 답했다 네가 뿌린 매운 기침이 내 핏속에 녹아든 날을 기억 못하지만 몸속을 흐르는 그것 때문에 화들짝 자지가 놀라고 뒤꿈치가 싸늘해지는 시절 눈물은 매웠다 몰랐다 살얼음이었다 내가 발 딛고 선 땅, 떨어진 버들잎인줄 알고 밟았던 것이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의 등그림자였으니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닥 위에 꼼짝 않고 서서 언제 꺼질지 모를 숨 참고 있었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매운 기침」 전문

김병호의 이 시 속에선 내 속에 네가 뒤섞여 있다. 일일이 열거해보면 나의 “왼 호흡”에 “네 야유소리”가 섞여있고, “내 왼쪽 볼에 난 상처”는 내 것이 아니라 “네 것”이다. “네가 뿌린 매운 기침”은 “내 핏속에 녹아”들어 내 “몸속을 흐”른다.
하지만 이 나와 너의 관계는 좀 이상한 측면이 있다. 원래 내 속에 네가 있다면 그 관계는 일반적으로 사랑으로 묶여진 매우 친밀도 높은 관계가 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내 속의 너는 야유소리이자 상처이며, 또 매운 기침이다. 둘은 사랑으로 묶인 하나로 보이질 않는다. 둘 사이의 관계는 오고가는 질문과 답 속에서도 어긋나고 있다. 시 속의 너는 “진공의 공간은 위아래가 없는데 왜 찬물에는 위아래가 있냐고 깔깔거리며” 묻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여름에도 네 날숨이 눈에 보이는 건 폐에 가득 찬 안개 때문이라고” 전혀 엉뚱한 답을 한다. 시인은 둘의 ‘시절’을 “눈물은 매웠다 몰랐다 살얼음이었다”고 회상한다. 설움과 서로에 대한 무지, 불안의 시절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하나로 뒤섞여 있으면 사랑하는 사이를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엇으로 뒤섞여 있느냐에 따라 사랑이 결정되는 것이지 뒤섞여 있다는 형식이 사랑을 결정하진 못할 것이다. 형식적 관계에 집착하면 사랑의 형식 속에 눈물과 무지, 불안이 가득찰 수 있다. 시인은 형식의 내용으로 형식을 뒤흔든다. 우리들의 일상적 언어도 그런 상태가 아닐까. 형식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항상 이름에 일정한 것밖에 담을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무료하기 이를데 없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불안과의 불화」는 ‘불안’을 아예 “삶의 양식(糧食)”이자 “실존의 양식(樣式)”이라 규정하고 있으며, 시인은 “내가 바로 불안의 자식”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내 식탐으로 온도를 조절하고 거친 호흡으로 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으니
살아있는 일 끓는 물로서 허공에 떠있는 일이다
삶의 온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까스로 온도를 유지해야
삶이 살아남는 일
음식을 끊고 숨이 새는 엄마를 보는 일
눈앞에 형태를 뒤집어쓰고 살아오는 불안을 보면서
빌미가 조짐이 되고 조짐이 징후로 몸을 바꾸는 비가역의 과정 옆에서
열을 덜어낸 만큼 조금씩 흐려지는 초점을 보면서
모두 들끓으면서 서로의 온도를 못 견뎌 안달하는 일일지언정
끓어야 여기 있을 수 있다는 태생을 수긍해야 하는
불안이 삶의 양식(糧食)이고 실존의 양식(樣式)이라는 사실에 무릎꿇어야하는
출생의 비밀은 내가 바로 불안의 자식이라는 사실이다
—「불안과의 불화」 전문

그에게 삶은 불안이며, 그 불안은 “삶의 온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까스로 온도를 유지해야” ‘살아남는’ 삶으로 나타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음식을 끊고 숨이 새는 엄마를 보는 일”과 같은 형태가 된다. “가까스로 온도를 유지”함으로써 지탱이 되는 삶은 사실은 삶의 형식만 남은 삶이다. 아마 몸이 안좋아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삶이 형식적으로만 삶을 취하고 있는 상태로 보인 것이 아닌가 싶다. 삶의 형식만 남고 나면 더 이상 그 삶은 끓어오를 수가 없다. 시인에겐 형식만 남은 삶이 불안하다. 일상적 언어에 담기는 세상은 언제나 그렇다. 들끓기보다는 반복적 형태를 취하면서 안정화된다. 오직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보자면 형식상으로는 그 삶도 여전히 안정적이다. 때문에 시인에게 불안은 형식만 생명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삶이다. 시인은 형식이 삶으로 불리는 그 상황이 불안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 살아계시다고 말하며 안심하라고 할 때 시인은 오히려 더 불안해질 수 있다. 시인에겐 “서로의 온도를 못 견뎌 안달하는 일”이 벌어질지 언정, 어머니가 깨어나야 안심이 된다. 언어도 그렇다. 형식화된 안정을 버리고 새로운 은유를 얻을 때 그저 호흡만 유지하고 있던 언어가 깨어나는 것이며, 바로 그때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태생을 수긍할 수 있다.

3
우리들이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들은 현실을 그 언어 속에 담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그 언어 아래 고착화시킨다. 김병호에 의하면 그렇듯 일상적 언어에 의해 굳어진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반하여 그 세계를 벗어나 또다른 가능성의 세상을 사는 것이 시적 은유의 세상이다. 그 시적 은유를 얻어낸다는 것은 쉽지가 않으며 아울러 그 은유가 사람들과 소통이 되려면 맥락의 폭을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이러한 시론을 시로 가져가면 그의 시 속에선 시가 형식화된 관계나 삶과 밀고 당기며 현실을 뒤흔든다. 흔들리고 불안할 때 우리는 그가 펼쳐놓은 세상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며, 그 세상에선 경화증을 앓고 누워있던 현실 대신 불안하지만 또다른 세상이 새롭게 열린다. 김병호에겐 그것이 시의 세상이다.
(『현대시』, 2013년 5월호)

**김병호 시인의 시집
─김병호,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 랜덤하우스, 2006
─김병호, 『포이톨로기(poetologie)』,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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