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둘러싸고 걷기에 좋은 길들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산이다.
제주에 가면 한라산을 올라야 하고
지리산에 가면 그 밑의 둘레길이 아니라 천왕봉을 올라야 한다.
조금 주저스러울 때는 있다.
산행 시간이 10시간을 넘는다고 하면 이제는 조금 주저스럽다.
울릉도의 산행 시간은 어느 코스로 가든
길어야 여섯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울릉도를 찾은 내 걸음은 주저없이 그곳의 산으로 향했다.
미리 등산로를 뒤져 가장 짧고 수월한 코스를 골랐지만
오르는 길이 그렇게 수월하진 않았다.
내려오는 사람들 중엔
올라가다 그만 두고 내려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날은 우리의 시선을 싣고 멀리까지 데려다주는 맑은 날이 아니었다.
올라가다 보니 시야가 트이는 곳이 나왔지만
산의 정상쪽으로 온통 안개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오르막에서 숨을 몰아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평탄한 길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걷다가
드디어 울릉도의 성인봉에 올랐다.
성인봉은 안개에 휩쌓여 있었다.
올라오면서 숲 사이를 가득 메운 안개를 보며 미리 짐작했던 일이었다.
안개에 쌓인 성인봉에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르면 산이 내게 내주는 것은 높이였으나
안개에 쌓인 성인봉은 높이 대신 내게
짐작할 수 없는 깊이를 내주었다.
깊이는 높이보다 더 두렵다.
그러나 안개가 내준 깊이는 두렵지 않다.
나는 산의 높이를 오른 것이 아니라
산의 깊이를 오르고 산의 깊이를 내려왔다.
내려오니 안개의 바다, 그 심연 속에 울릉도의 동네들이 있었다.
깊이의 울릉도를 본 것은 순전히 안개 덕이었다.
안개는 시야를 막는 것이 아니라
높이로 보던 세상을 깊이로 내려가게 만든다.
평소 984m의 높이를 알려주던 성인봉의 정상석은
그날만큼은 내게 이곳에서 울릉도 바닷가 물결까지의 깊이가
984m이라고 알려주었다.
2 thoughts on “안개에 쌓인 울릉도 성인봉”
안개로 휩싸인 천 미터 가까운 산 정상에서 처음엔 두려움을, 그리곤 막막함에
이어 일순 멍해졌다가 다시 평온해지는 느낌을 저도 두어 번 느껴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이런 곳에선 높이보다는 깊이가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이름 때문인지 정상석의 필체가 힘차게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제일 힘들었던 산은 한국 최고봉인 한라산이었던 것 같아요. 성인봉은 중간쯤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미리 알아두었어요. 그래서 차로 그곳까지 올라간 뒤에 올라가서 좀 수월했습니다. 아예 바닷가에서 출발한 분들도 많더라구요. 내려올 때 보니 반대편에서 출발했으면 큰고생했겠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