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발자국

갑자기 엄청나게 눈이 쏟아졌다.
제법 쌓일 것 같다는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로 끝나고 말았다.
30분도 안되어 눈발이 가늘어지더니 곧바로 그치고 말았다.
일하는 와중에 그래도 눈이 왔으니
잠깐 사진이나 찍자고 내려갔더니
눈은 벌써 완연하게 걸음을 물리고 있었다.
물러가는 눈의 걸음을 쫓아다니며 눈밭의 발자국만 찍었다.
30분도 안되어 내린 눈은 다 녹아 버렸다.
그러나 발자국을 쫓아다닌 시간은 남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걸음은 격자 무늬를 딛으며 걷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 걸으며 당신의 걸음을 모두 모으면
그 걸음으로 격자 무늬가 예쁜 옷을 하나
해입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걸음은 발끝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파도가 뒤엉켜 발끝은 물결을 잃었다.
당신은 걸으면서 엉킨 그 파도 소리를 들었을까.
때로 소리는 눈으로만 온다.
보아야 그때 비로소 들린다.
그러니 당신은 못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발밑에서 파도를 일으키면서도
그 소리를 못들을 때가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나는 처음에는 발자국이란 생각을 못했다.
당신이 땅콩을 껍질째 흘리고 갔다고 생각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을 때마다
당신의 발밑에서 꽃이 피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발밑에선 좌우가 깍지를 끼었다.
당신의 걸음이 어느 손에
억세게 붙잡힌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걸음은 꼬리를 가졌다.
나는 당신이 꼬리가 긴 여우과가 아닐까 상상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걸음은
동심원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
두 개의 동심원이 발뒤꿈치와
앞쪽에서 동시에 퍼졌다.
걸음을 따라가는 나는 물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발밑에서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물결은 당신의 발을 간지르며 앞으로 번지려 했다.
하지만 결국 잔물결은 당신의 발을 모두 간지르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당신은 발의 앞쪽에 제방을 겹겹으로 쌓아놓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의 걸음은 블랙홀에 걸려들었다.
당신의 걸음은 블랙홀 속으로 서서히 빨려들고있었다.
알고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블랙홀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3년 12월 26일 서울 천호동에서

당신은 상당히 감성이 풍부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눈을 만나고 난 뒤 걸어간 당신의 걸음이
마른 콘크리트 길을 걸어가면서도
여전히 촉촉히 젖어 있었다.

2 thoughts on “눈과 발자국

  1. 눈길에 찍힌 발자욱들마다 여운을 남겼네요.
    눈이 쌓였다면 이런 그림 얻기 어려웠을 텐데, 타이밍을 잘 포착하신 듯 싶습니다.
    저는 점심 때 모락산 사인암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눈폭탄을 맞았습니다.

    1. 점심의 폭설 장면.. 아주 괜찮았을 것 같은데요.
      베란다에서 내다보다 잠깐 나가서 30분 정도 찍었는데 찍고 들어올 때 이미 거의 다 녹아 버렸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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