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창에 담긴 세상 풍경 – 계간 『문예바다』 2015년 여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5년 여름호
『문예바다』 2015년 여름호

1
시의 미덕 중 하나는 시가 세상을 그 안에 담아내고 보여주는 창의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시를 창에 비유하면 이에 대한 이해는 시보다 그림에서 구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수월하다.
화가가 그린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화가가 그리던 대상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화폭에 담긴 그림을 통하여 그 대상과 마주한다. 그러나 그림 속의 대상은 모사된, 즉 똑같이 베껴놓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심지어 극사실주의를 표방한 그림에서도 그림 가까이 시선을 가져가면 우리는 그것이 그림이란 사실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림은 세상을 담고 있어도, 동시에 세상이 아니다.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제외하고 나면 시선을 가까이 들이밀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로서의 세상과는 크게 어긋날 때가 많다. 때에 따라 그림 앞에서 우리는 그림의 창으로 보이는 대상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를 접하기도 한다. 그림이 추상화 쪽으로 기울면 더더욱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림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거나 그림에 담긴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워 그림이 세상을 왜곡하거나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아니, 사람들은 오히려 그림에 담긴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그림에 대해 관대한 것일까.
우리의 시선은 세상을 투명하게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습관과 편견에 오염되어 크게 왜곡된 상태로 세상을 볼 때가 많다. 우리의 시선에서 일상적 습관과 편견을 제거하고 깊이를 더하면 세상은 그림의 창에 담긴 세상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림은 화가의 눈에 의해 해석된 세상이라기보다 습관과 편견의 오염이 제거된 시선으로 바라본 보다 투명한 세상일 수 있다. 우리는 암암리에 그 점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유를 시로 가져오면 시는 텍스트를 매개체로 세상을 담아내는 또다른 창이 된다. 그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의 텍스트 또한 세상을 모사하는, 즉 똑같이 베끼는 법이 없다. 때문에 그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의 텍스트가 우리의 머릿속에 선명하고 분명한 이미지로 잡히지 않는 경우가 흔하게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의 창에 담긴 대상이나 세상을 좀더 투명하게 보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2015년의 봄호에 실린 계간지들의 시를 세상을 보여주는 창으로써 읽으며 그 창이 어떻게 세상의 풍경을 좀더 투명하게 열어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2
시가 텍스트라는 형식으로 세상을 창에 담을 때, 그 방법 중 하나는 대상을 달리 부르는 것이다. 부르는 언어가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가령 우리의 일반적 세상에선 소년이 나이를 먹으면서 청년으로 성장을 하고, 그렇게 성장을 하면서 청년은 소년을 잃는다. 그러나 이제니의 세상에선 양상이 다르다. 그의 시 속에선 청년이 소년을 잃지 않는다. 그 방식은 그가 청년을 부르는 방식의 변화에서 온다.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었던 소년의 오래된 미래가 된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이제니,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문학과사회』, 2015년 봄호) 부분

이제니의 세상에 청년은 없다. 그의 세상엔 소년만 있다. 다만 구별은 있다. 그간의 세상에서 청년을 가리켰던 지칭어는 그의 세상에선 “소년이었던 소년”이 채우고 있다. 청년은 말하자면 소년이 과거형이 되어버린 소년이다. 청년을 청년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른 지칭어로 부른 것은 시가 시작되는 자리에 그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그것은 바로 청년을 “소년이라고 부르면 소년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물론 청년을 소년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청년이 소년이 되진 않는다. 다만 그렇게 부르면 소년이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소년’은 자기 정체성을 가진 구체적 존재이지만 ‘한 소년’은 세상의 수많은 똑같은 소년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가진 존재였으나 성장을 하면서 수많은 똑같은 존재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다. 성장을 하면서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몰개성화되어 버린다.
몰개성화의 원인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이다. 그것은 좋은 대학을 가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획일화된 교육일 수도 있고, 또 옷 하나 입는 것에서도 자기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 관습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게 되는 것이 내 자신, 즉 스스로를 스스로답게 해주는 자기 정체성이라면 그것은 이제 되찾을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을 때 그것을 되찾을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다.
이제니의 시는 바로 소년을 청년이 아니라 “소년이었던 소년”으로 부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시인이 재편한 이러한 구도 속에선 “내가 살았던 곳에 내가 없”고 “내가 사랑했던 것에는 네가 없”는 상실이 우리의 분명한 현실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정체성이란 사실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청년기 이후의 삶이 오히려 ‘중심’이 더 깊어가는 삶이 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들이 “기어이 미래로 돌아갈” 여지가 더 커질 수 있으며, 그때면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갔던 그 한 소년이 다시 어떤 소년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인은 그것을 확정적으로 보장하진 않고 있다. 그의 시는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 오늘의 시점에서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한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반적 사회적 현상이나 그 가운데서 어떤 소년을 찾는 것은 개인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시점에서 마무리된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당연해 보인다.
대상을 달리 불러 텍스트에 담는 방법은 때로 한 편의 시 속에서 이중 삼중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정란의 시 「목소리」가 좋은 예이다. 시는 “하늘이 컹컹 짖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하늘이 짖을 수는 없다. 실제로는 개가 짖었을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하늘로 채운 것이다. 아마도 멀리 하늘에서 들려오듯 아득하게 개짖는 소리가 들리는 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개의 자리에 하늘을 밀어 넣은 것일까. 시는 텍스트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그림이 되려 한다. 개의 자리를 하늘로 채운 연유이다. 말하자면 첫 구절은 시를 텍스트에 그치지 않고 그림으로 그려내겠다는 시인의 욕망이 만들어낸 텍스트적 회화이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던 그 밤, 아버지와 가졌던 사랑을 전해주는 어머니의 얘기로 이정란의 시는 계속된다. 어머니는 “네 아비”가 술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긴 하지만 그 술은 곧 어머니의 몸으로 대치된다. 어머니가 “알면 안 되는 그 맛을 숨기고 오랫동안/숲 속 발원지에 내 자궁을 묻어 두었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를 ‘반미치광이’로 만든 ‘술향’은 어머니의 몸이다.
어떻게 술이 몸으로 대치될 수 있었을까. 취한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말은 술과 묶이기도 하지만 저항할 수 없이 빠져드는 어떤 대상과 묶이기도 한다. 시의 세상에선 하나의 말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이용하여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말을 갈아탈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현실에선 술취한 아버지가 술기운에 어머니와 몸을 섞지만 시의 세상에선 술에 취한 아버지가 취한다는 말의 의미 가운데서 다른 의미로 말을 갈아 타고 술에서 몸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건너가면 술기운에 한 성행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되는 두 몸이 된다. 그 두 몸의 사랑이 잉태한 생명이 세상으로 오는 순간은 다음과 같다.

온몸이 목소리가 되어

블랙홀처럼 통해 버린 몸과 몸 그 터널 너머
지평선으로

붉은 사과가 툭 떨어졌다
—이정란, 「목소리」(『문예바다』, 2015년 봄호) 부분

탄생이란 그런 것이다. 두 몸이 “블랙홀처럼 통해 버린 몸과 몸”으로 하나가 되고, 그 날 잉태된 아이가 어머니의 산도를 ‘터널’처럼 거쳐 “붉은 사과가 툭 떨어”지듯 세상에 태어난다. 그 세상의 아이는 울면서 태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온몸이 목소리가 되어” 태어난다.
이정란의 시 「목소리」에선 많은 것이 다른 것으로 대치되어 있다. 개의 자리는 하늘이 채우고, 술의 자리는 어머니의 몸이 채운다. 또 울음소리는 목소리로 대치되고, 태어난 아이의 자리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붉은 사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인지는 내게 묻지 마시라. 시인이 사실로서의 텍스트를 버리면 얼마든지 그런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더욱 볼만하다.
이정란의 시가 개인적 차원에 서 있다면 이병철은 시를 사회적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홍등가의 여인에 대한 시선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그 둘은 멸시나 연민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 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을 그냥 성 노동자로 보자는 것이다. 이병철의 시도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 이 시각에 서면 홍등가의 여인은 몸의 요리자가 된다.

여자의 혀가 신경계를 파고든다 중추와 말초 사이를 오가며 뼈대에 붙은 감각 한 점까지 저미는 솜씨가 기술보단 도에 가깝다 거침없이 나아가다가 가만가만 숨을 죽이고, 생각과 숨결이 한데 엉켜 있는 살갗에선 날을 바꾼다 일 그램의 성감대마저 남김없이 발라낸 혀가 차갑게 빛날 때

우시장 바닥을 흐르는 핏물이 강으로 스며들고, 뼛조각이 너저분한 강기슭, 사내들은 물러 터진 칼을 붉은 불빛에 벼리고 있다.
—이병철, 「포정의 칼은 영등포에 있다」(『문예바다』, 2015년 봄호) 부분

이병철은 이 시의 제목 속에 보이는 포정의 칼이 『장자』의 <양생주편>에서 왔음을 주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포정은 백정이다. 그러나 그가 소를 잡을 때의 기술은 도에 가깝다. 때문에 칼질의 실수가 나와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었다. 포정은 평범한 소잡이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포정은 살이 뼈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지도록 칼의 움직임을 아주 섬세하게 쓴다.
우리의 세상 속에서 멸시 아니면 연민의 대상이던 홍등가의 여인은 이병철이 그려낸 시의 세상에선 남자를 요리하는데 있어 포정에 버금가는 경지를 보여준다. 그 여인의 경지를 생각하면 실제로 소잡는 사내들의 칼은 물러터질 정도이다. 시에서 접한 이 여인들의 세상이 실제의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할 수 없는 세상임은 분명하다.
시의 세상이 또다른 시각을 제시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기존의 시각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 박장호의 시에서 그것이 엿보인다. 시는 그가 길렀던 “호야와 홍콩야자”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인은 각각의 식물 이름과 관련된 자신의 인연도 소개를 한다. 재미나다. 시의 양념 같은 부분이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듬뿍 주고, 틈틈이 공중 수분도 했지만 전혀 자라지 않아 조화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시인이 의심을 하자 식물들은 죽음으로 조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생장 환경이 좋지 않아 자라지 않는 식물이
생화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은
시드는 것밖에 없다는 듯이

홍콩야자의 줄기 하나가 갈변했다. 호야는 두툼해야 할 잎사귀가 탄력이라고는 전혀 없이 메말랐다. 죽어가는 걸 보고서야 조화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고 분갈이를 했다…(하략)
—박장호, 「조화로운 생화 —구강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공동체 12」(『세계의문학』, 2015년 봄호) 부분

죽음이 생물학적 삶의 끝이 아니라 생명을 증거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박장호의 시는 개인적 차원의 경험에 서 있지만 이러한 시각은 사회를 보는 우리의 시선으로 고스란히 옮겨질 수 있다. 이 경우 시인이 마련한 시의 창으로 사회를 내다보면 자신들의 삶을 내려놓는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이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닿질 못한다. 그들에겐 목소리를 전달할 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부당하게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그때서야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들에게 닿을 수 있는 통로를 겨우 얻어낸다. 박장호가 보여준 것은 개인적 차원의 경험이지만 그 경험은 사회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시는 그런 측면에서 종종 세상에 대한 이의 제기가 된다. 대개 사람들은 즐겁고 재미난 시간을 갖기 위해 아쿠아리움에 놀러간다. 놀러간 사람들의 눈은 신기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사람들은 거대한 수족관 안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모두가 즐거워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지 못하다. 그 앞의 시인은 불편하기 짝이 없으며, 결국 아쿠아리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고 만다.

이상하지 않나요, 이런 고요는
몰려오던 해일이 눈앞에서 멈춘 듯한

누군가 세계의 안과 밖에
커다란 간유리를 끼워뒀으므로

나의 폐는 부레가 될 수 없고
물고기는 눈을 깜빡일 수 없어요
—신미나, 「아쿠아리움」(『시산맥』, 2015년 봄호) 부분

박장호는 죽음이 살아있다는 외침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신미나는 움직이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수조 앞에서 시인은 묻는다. “움직이는 것은 생물입니까”라고. 그리고 답한다. “나의 감탄이 부끄럽게/마취제를 물에 푼 듯이/굳지 않으려고 조금만 움직여요”라고.
서울에 있는 한 대형 아쿠아리움에선 몸길이가 3m를 넘어가는 대형 흰고래가 사람들의 경탄을 이끌어내지만 고래가 사는 수조의 높이는 겨우 7m에 불과하다. 고래는 바다에선 자유롭게 유영했지만 수조 속에선 시인의 말대로 그저 “굳지 않으려고 조금”씩만 움직이며 생명을 부지한다. 그것은 움직인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미나는 아쿠아리움 앞에서 삶이 삶이 아닌 세상을 보며, 그것이 세상을 보는 더욱 투명한 시선일 수 있다.
신미나의 이의 제기가 세상 자체를 향하고 있다면 이현호의 이의 제기는 사람들의 언어 습관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다.

혼자 있는 방을, 왜 나는 빈방이라고 부릅니까
—이현호, 「배교」(『문학동네』, 2015년 봄호) 부분

물론 우리도 시인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때의 빈방은 아무도 없는 방이라는 뜻의 빈방이 아니라 나밖에 없는 빈방의 축약된 표현이 아니겠는가고. 우리 말의 푸르다는 표현 속에 푸른색과 초록색이 동거를 하고 있듯이 빈방이라는 말 속에서도 두 가지의 뜻이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면 시인의 이의 제기가 궁색해질 듯하지만 문제는 시인의 이의 제기가 빈방이라는 말 하나에서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의 이의 제기를 거두고 시인의 이의 제기를 따라가볼 필요가 있다.
시인의 이의 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빈방’이라는 말은 분명히 내가 방에 있는데도 나를 제거해 버린다. 왜 이런 오류를 방치하며 빈방이란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게 된 것일까. 지금은 1인 가구가 아주 흔해졌지만 오랫 동안 우리 사회에서 1인 가구는 정상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1인 가구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둘이 살아도 그 둘이 오랫 동안 둘로만 유지가 되면 그것 또한 정상이 되지 못했다. 그 둘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성원을 불려 하나나 둘을 보태도 그것마저 정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적었던 시절도 있었다. 방은 단순히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거처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공간이다. 그 강력한 위력으로 방은 방에 사람이 혼자 있으면 그 사람을 제거해 버리고 방을 빈방으로 유지한다. 그런 면에서 빈방이란 말은 잘못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빈방이란 말은 방이 갖는 위력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어떤가. 이제는 오히려 시인의 생각에 제기했던 우리들의 이의가 궁색해지는 느낌이 아닌가. 1인 가구는 많아졌지만 언어 습관은 방이 그 방에 거처하는 사람의 숫자로 정상과 비정상을 재단하던 시절의 습관을 전혀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빈방이란 말에 대한 이의 제기는 그 말을 빚어낸 사회의 잔혹사에 대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시들은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것도 있긴 했지만 대개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 시가 개인적 경험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떤 사회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우성의 시 「시간의 아이들」도 그렇다. 그의 시 어디에도 세월호 참사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읽는 순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아이들은 그저 조금 일찍 걷는 것이다
엄마는 정신을 차리고 기억해낸다 아이들이 하늘에 날개를 편 공작처럼 몰려든다 두껍고 까맣게 대지를 덮는다 아이들은 짧은 다리로 겨우 걷는다 엄마는 아이들을 밟고 나아갈 수밖에
밟힌 아이들은 꺾이고 부러진다 엄마는 그래야만 한다
—이우성, 「시간의 아이들」(『실천문학』, 2015년 봄호) 부분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가 아이의 죽음을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이의 죽음이 해명되지 못하고 여전히 의문에 쌓여 있을 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이 대규모로 일어났을 때이다. 세월호 참사에선 불행히도 그 두 가지가 겹쳐 있다. 수학 여행을 가다 타고 가던 배가 전복되어 아이들이 죽었다는데 왜 제 때 구조가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또 전복될 위험을 가진 배가 어떻게 버젓이 운행이 될 수 있었는지 등등의 여러 가지 의문이 해명이 되질 않고 있다. 의문의 대한 해명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이해한다고 해도 이 나라의 정부와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의문의 적극적 해명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에 싸여 있으며, 이 의문이 해명되리라는 보장도 받질 못하고 있다. 게다가 무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희생이 되었다.
「시간의 아이들」이란 제목은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시간은 아이들의 죽음 이후로는 모두 아이들로 채워짐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 이후의 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걷는 시간의 길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그 시간의 길은 삶의 길이 아니다. 아이들이 죽은 뒤로는 엄마가 걷는 시간의 길도 죽음으로 향한다. 그 길에서 “언젠가 만날 아이를 떠올”리는 엄마는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에 대한 암시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그 시간 이후의 삶은 모두 죽음이란 얘기이다. 엄마에게 있어 “죽은 아이들은”그 길을 “그저 조금 일찍 걷”고 있는 것뿐이다.
시는 ‘아이들’은 복수로 말하고 있는 반면, ‘엄마’는 단수로 지칭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대형 참사에선 엄마들 하나하나가 제 자식 한 명이 아니라 참사로 희생된 300명의 아이들을 모두 감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엄마 하나하나가 모두 각각 300명의 죽음을 감당한다. 엄마가 걷는 시간의 길에서 몰려든 아이들이 “두껍고 까맣게 대지를 덮”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엄마는 이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 백번 양보를 해서 1년이면 한 아이의 죽음을 잊을 수가 있다고 해도, 엄마가 감당하는 아이들의 죽음을 모두 잊으려면 300년이 걸린다. 그러니 어찌 이 죽음을 잊겠는가.
이우성은 아이들을 잃은 엄마는 그 이후로 자신이 걷게 되는 시간의 길 위에서 “아이들을 밟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적고 있지만, 엄마들이 아이들을 밟고 갈리는 없다. 이 자리에 들어갈 원래의 표현은 시간시간마다 눈에 밟히는 아이들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눈에 밟히다를 발로 밟다로 쓴 것일까. 그것은 이 죽음이 그만큼 참혹하기 때문이다. 눈에 밟힐 때마다 발로 밟는 듯한 참혹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이 이 죽음이다. 시인이 자식이 눈에 밟히는 엄마의 자리를 아이들을 발로 밟고 가야하는 삶으로 채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엄마는 엄마들만의 몫은 아니다. 시는 “엄마는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로 시를 맺고 있지만 실제로 이 시의 목소리는 세월호 참사 앞에선 세상의 누구나 모두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모두가 엄마가 되면 아무도 아이들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우성의 시와 함께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한편의 시가 있다. 김혜순의 시 「바람의 장례」이다. 역시 어디에서도 세월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시 속에서 “가만히 있어, 소리치는 침묵은 어떤 나라 같다”라는 구절을 만났을 때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세월호 참사이다. 아이들을 빠르게 대피시키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선실에 묶어둔 것이 그 참사를 키운 원인 중 하나였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빛 아래 드넓은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는 말도 아이들을 모두 잃은 단원고의 학교 풍경을 연상시킨다. “바람 속에 몇백의 아이가 들어 있다. 바람은 그 아이들하고만 얘기한다. 그 아이들 하고만 산다”는 구절에 이르면 이제 바람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의 다른 이름이란 짐작이 거의 굳어진다. 시인이 시의 창에 담아낸 아이들은 바람이다. 시인은 그 바람의 얘기를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바람은 자유연상을 못 견딘다.
연상의 끝에는 꼭 무시무시하게 일어서는 밤바다가 있다.
바람은 일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육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관에 못이 쳐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유골함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견디지 못한다.
—김혜순, 「바람의 장례」(『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부분

시인이 바람이라 칭했지만 알고보면 시인이 바람의 이름 아래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은 명백하다. 그것은 아이들의 죽음만으로도 견디기가 힘든데 이 나라의 정부가 그 죽은 아이들마저 견디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를 읽고 난 끝에서 이 나라의 정부에 대해 소리치고 싶었다. 제발 바람이 견디지 못할 짓좀 하지 마라.

3
우리의 눈은 그다지 믿을게 못된다. 습관과 편견의 때에 오염되어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라는 이름의 창은 오염된 눈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계절의 시들을 읽으며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그 창으로 본 세상에선 소년과 청년이란 말이 소년과 소년이었던 소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온몸이 목소리가 되어 세상으로 떨어지는 붉은 사과를 볼 수 있었다. 또 멸시와 연민이란 두 가지 시선 밖에 가질 수 없었던 영등포 홍등가의 여인이 도의 경지로 몸을 요리하는 섬세함을 볼 수 있었고,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외침이 된 세상을 보았다. 아쿠아리움에서 즐거운 시간만 탐닉하던 우리들의 앞에 나타난 시인이 우리들에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 제기는 우리들이 쓰는 일상적인 말로 확대가 되었다. 그리고 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는지 그 이유를 시간의 길 위를 걷고 있는 아이들의 엄마에게서 볼 수 있었고, 이 나라의 정부와 권력자들이 어떻게 죽은 아이들에게 견디지 못할 짓을 하고 있는지를 바람이 된 아이들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시들을 읽고, 그 시들 가운데서 몇 편을 고르고, 그리고 그 시들을 말하고 났을 때 문득 머릿 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 하나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시의 창을 통해서만 비로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문예바다』, 2015년 여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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