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의 키스에서 창안과 창밖으로 전해진 바람의 이야기까지 —김중일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

1 두 가지의 키스
김중일의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은 두 가지의 키스 이야기로 시작된다. 보통 키스라는 말은 두 남녀를 떠올리게 하며, 그 경우 키스는 그들의 사랑을 입술로 확인하는 달콤하고도 뜨거운 행위이다. 하지만 김중일의 시 속에선 그렇질 못하다.
시집의 첫머리에 실린 「키스의 시작」에서 시 속에 등장하는 ‘두사람’의 키스는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들고 온몸 부풀어 떠오르도록 입 맞대고 서로를 숨처럼 서로에 불어넣”는 행위이며, “온몸을 서로에게 구겨넣”는 행위이고, “서로의 몸속에 각자 온몸을 다 쏟아붓”는 행위이다. 시인이 전해주는 키스는 말하자면 입술과 혀로 나누는 일종의 호흡 행위이며, 그것도 거의 인공호흡에 가까운 행위이다. 인공호흡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강제로 숨을 불어넣는 일방적 행위인데 반하여 키스는 상호적 인공호흡에 가깝다는 차이를 가질 뿐이다. 아울러 시인이 전하는 키스는 자연스런 행위라기보다 서로를 서로에게 구겨넣고 있다는 측면에서 거의 반강제적인 주입 행위에 가깝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그렇게 되기 쉽다. 하지만 키스를 나누는 둘은 그 반강제적인 행위를 서로에게 용인하기 쉬우며, 시 속에서도 둘은 그것을 용인하고 있다. 또 서로를 서로의 몸 속에 쏟아붓는다고 했으니 키스를 하면서 둘은 나는 너가, 너는 내가 되었음직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 헤어짐이란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시인의 눈엔 두 남녀가 “이제 멀리 떠나버리려는 듯 마지막으로 키스”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놀라운 점은 키스의 당사자인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키스의 목격자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음직한 이 키스가 아무 것도 남기질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몸속에 각자 온몸을 다 쏟아붓자 사라진 두사람
눈앞에 남은 건 한주먹의 투명한 적막뿐
—「키스의 시작」 부분

그 격렬함으로 보았을 때, 키스를 나누던 자리에 음각되어 영원히 남을 것만 같았던 입맞춤이 단 한주먹의 적막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실제로 뜨겁게 입술을 나누며 서로를 서로의 몸속에 음각으로 새겨졌을, 그리하여 지울 수 없는 한몸이 되었음직한 많은 남녀들이 종종 갈라서곤 한다. 왜 그런 것일까. 「키스의 시작」만 봐선 알 수가 없다.
시집의 두 번째 시, 「내 시집 속의 키스」가 전하는 키스는 첫시가 전하는 키스와는 다르다. “내가 낳은 아이가 자라,/나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큰 남자가 되어 긴 팔 커다란 두 손으로 키스를 한다”는 첫대목으로 보아 이는 실질적 키스라기 보다 키스에 대한 기대이다. 아울러 「내 시집 속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보아 그것은 시가 꿈꾸는 키스이다. 이 꿈의 키스에선 우리들이 첫키스에서 보았던 격렬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볍게 입술을 맞대는 키스는 아니다.

촛불처럼 켜진 혀가 환히 밝혀놓은 입안으로 들어간다.
촛불처럼 켜진 혀보다 밝은 입김으로 키스를 하며 내 아버지가 된다.
—「내 시집 속의 키스」 부분

혀를 주고 받은 것을 보면 깊은 키스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둘의 혀가 촛불이 되어 서로를 밝혀주고 있으며, 이 촛불의 키스는 입김의 키스가 되고 결국은 서로의 입김이 서로를 밝히게 된다. 입김은 체온으로 덥혀진 따뜻한 숨이다. 키스란 그 입김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밝히는 행위이다.
키스는 두 가지 양상으로 번질 수 있다. 하나는 몸의 탐닉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몸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몸으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눈뜰 수도 있다. 아마 전자가 「키스의 시작」에서 우리가 접한 익명의 키스였을 것이며, “내가 낳은 아이”가 자라서 여자와 나누게될 키스는 서로를 밝히는 키스되었으면 하는 것이 시인의 기대일 것이다.
키스는 분명 어떤 획기전 전환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심지어 그 전환의 진폭이 커지면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서는 놀라운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 말하자면 키스를 전후로 내가 잉태한 존재에서 나를 잉태하는 존재로 바뀔 정도의 획기적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낳은 아이가” 키스를 하면서 “나를 낳고, 나를 두고, 태어난 그날로 되돌아간다”고 말한 것은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세계를 넘어 그만의 세계를 다시 잉태하는 순간이 키스와 함께 올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어떤 획기적 성숙의 순간인 동시에 잉태의 순간이다. 그것은 시인이 그의 시에서 꿈꾸는 키스이기도 할 것이다.

2 시인과 시인의 애인, 혹은 나와 너
키스는 행위이고 행위는 순간이다. 우리는 순간을 살 수는 없다. 순간은 곧 탐닉의 다른 이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탐닉은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리 격렬했던 순간도 곧바로 지워지고 만다. 탐닉은 우리들을 순간순간 속에 가둔다. 그래서 시인은 끊임없이 우리를 가두는 순간이 아니라 열리는 순간을 꿈꿨을 것이다. 순간이 열리면 순간은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관계로 이어진다. 관계는 우리들로 하여금 길고 오래도록 한 존재를 살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키스의 순간은 존재와의 영속적 관계로 이어질 수 있을까. 불행히도 김중일의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시인과 「시인의 애인」과의 관계에서 그 양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애인을 가리켜 “아주 오래전에 고드름처럼 자라는 열매가 있었다”고 말한다. 고드름은 자라지만 결국은 녹아 없어진다. 관계도 종종 그렇다. 자라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녹아서 없어진다. 관계는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녹는 것일까.
시인의 애인은 시인에게 묻는다. “있잖아 내내 묻고 싶었는데, 시는 왜 쓰지”라고. 시인은 답한다. “너처럼 무작정 읽어주는 애인 때문에”라고. 이 물음과 대답 속에선 둘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둘 사이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시인의 애인’이 “시인의 시를 모두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데도 계속 읽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시인의 애인은 그렇게 한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시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시가 아니라 시를 쓴 존재가 중요하다. 그래서 시인의 애인은 시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인을 먼저 살다 간 사람”이 된다. 시인의 애인은 시를 사는 것이 시인이란 존재를 산다. 그런 사랑 앞에선 이해없이도 시가 가능해진다. 시인은 그런 시를 “불가피한 시”라고 말한다. 그건 사랑받고 싶은 시인의 욕망이다. “코앞에 펼쳐놓은 공기 위에 한자 한자 새겨져 불가피하게 읽히는. 이해할 필요 없는 시들이 세상을 무작정 가득 채웠으면,/좋겠어”(「시인의 애인」) 라는 시인의 희망은 이해되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이해될 필요없이 사랑받는 세상이다. 문제는 이 관계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둘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하지만 이해되어야 지탱이 된다. 이해되지 않으면 답답해지고, 답답해지다 보면 서로에게 맺힌다. 사랑할 때 서로는 서로에게 별이지만 시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별의 모양이 모서리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 때문에 시인에게서 별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끌어안고 있으면 환한 빛이 되기도 하지만 내 몸을 찌르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태어나자마자 끌어안고 있던 별을 버렸”다고 했다. 그러다 다시 “내게서 버려진 별을 끌어안은 마음으로 너를 안”는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내 어깨와 팔꿈치와 무릎과 손과 발과 이마와 턱과 코가 별의 모서리처럼 점점 뾰족”해진다. 너를 끌어안으면서 나는 별이 되고 모서리는 뾰족해지는 것이다. 뾰족해지면 서로를 찌르게 된다. “내 몸의 모든 모서리는. 곧 네가 끌어안고 떨어질 별이 되어가는 증거”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포옹한 우리는 이제 한몸”임을 느끼면서도 “오늘밤 나를 안고 있던 별을 버”(「별을 끌어안은 마음으로」)릴 수밖에 없게 된다.
시인은 말한다. “너는 나를 떠밀고 간다, 나는 너를 비껴간다, 너는 나를 스쳐간다, 나는 너를 통과한다, 너는 나를 등지고 간다, 나는 너를 쫓아간다”고. 말하자면 둘은 번번히 어긋나고 있다. 시인의 눈에 이러한 관계는 ‘스윙바이’(「영구 항진」)의 관계이다. 스윙바이는 우주 탐사선의 비행 방법 중 하나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우주 탐사선은 행성의 중력을 이용하여 속도를 낼 수 있다. 말하자면 행성을 향하여 빨려들어가며 속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속도는 행성에 착륙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스윙바이에선 결국 우주선이 행성을 비켜가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관계도 이와 비슷할 때가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끌려들어가지만 결국은 서로 비켜가는 관계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서로에게 착륙을 해야 하는데 비켜가는 비행법으로 서로를 향해 나르고 있다.
사랑할 때의 우리는 끌어안으면서 찌르고, 가까이 가면서 튕겨져 나가는 모순의 관계를 산다. 김중일의 시에서 비유를 구하자면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하늘 높이 멀어지는” 도르래의 관계이다. 때문에 이 관계에선 가까이 가면 오히려 멀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김중일은 그 모순의 관계를 “내 발걸음은 네게로 향하여 힘껏 네게서 멀어진다”(「도르래의 날들」)고 말한다.
행위는 관계를 열어주지만 관계를 지탱해주진 못한다. 행위로 관계를 열 수는 있어도 관계를 끊임없이 열어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아직 이 모순의 관계를 풀어줄 열쇠는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이 그 열쇠를 찾는 첫걸음이 될 것임엔 분명하다. 그것만으로 시인과 애인과의 관계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3 시인과 아버지
이별로 정리된 애인과의 얘기를 듣고 난 뒤에 시인의 아버지 얘기를 간간히 들었다. 시인의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 같다. 그의 시 「물고기 그림자」에 붙여진 「아버지에 대해」라는 부제로 미루어 나는 시인이 “푸른 새벽처럼 일렁이는 물고기 그림자를/좇는 육십대 망명가”라고 했을 때 그를 시인의 아버지로 이해했다. 그리고 ‘저녁’이 “전생에 물고기였던 그의 목숨을/귀신처럼 알아채고 걷어가”버렸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김중일에게 있어 이제 아버지의 자리는 비워져 있다. 아버지는 그냥 하루이틀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다. 그러나 그 부재가 곧바로 존재를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재가 존재를 더욱 환기시킬 때가 있다. 그의 시에선 종종 그 환기를 접하게 된다.
김중일의 시에서 종종 ‘그’로 호칭이 되는 아버지를 보내고 난 시인은 “오늘의 장의차가 어제의 정거장을 출발했다”(「정거장에 서 있다」)고 말한다. 시인의 얘기에선 오늘도 어제 떠나던 장의차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또 시인은 “입관식이 있던 일요일 오후./나는 그의 이마에 입 맞췄다. 오래도록”(「노래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아버지의 부재를 시사한다. 그러나 그 부재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그치질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시인의 현재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아버지에 대한 많은 기억들은 시인에게 하나의 ‘연주’가 된다. 그러자 시인이 살아갈 삶은 이제 그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연주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노래를 받쳐주는 “기억의 연주”로 아들의 삶 속에 함께 한다. 부재의 아버지가 아들의 삶 속으로 돌아온다.
그것만이 아니다. 시인이 ‘흙투성이 눈사람’이라 명명한 아버지는 가까이 있을 때는 환기되지 못한 존재였지만 부재의 존재가 되는 순간 오히려 존재가 환기된다. 때문에 시인은 깨닫게 된다.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한 어깨가 뚝뚝/녹아내리던 그는/내 안에 여기저기 많이 서 있었구나 매 순간(「흙투성이 눈사람」)”이라고. 그의 시는 부재의 아버지를 내 속으로 불러 상실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4 시인과 세월호 참사의 비극
시인이 아버지를 잃은 상실은 슬픔이다. 그것은 슬픈 일이지만 잔혹하거나 끔찍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선 잔혹하고 끔찍한 비극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2014년의 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300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그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개인적으로 겪어야 하는 슬픔이라면 이러한 참사는 사회의 성원이 모두 함께 겪게 되는 상실이다. 김중일도 그 상실에서 예외가 아니다. 시인은 그의 여러 시에서 그 상실의 아픔을 함께 나눈다.
먼저 그는 세월호 참사의 그 날을 일러 “날 매달고 바닷속에 산 채로 던져진 마음/온몸이 통째로 마음이 되던 날”(「꽃처럼 무거운 마음 —2014년 봄」)이라고 말한다. 그는 마음과 몸을 수장된 아이들 곁에 내주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장미가 다 지도록 장미나무 앞에서 난/봄을 업고 단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에 더하여 그는 “일곱시에서 열시까지만 나는 그것을 장미라고 부르겠”(「장미라는 시간 —2014년 봄 너머의 모든 봄」)다며 시간을 세월호 참사의 순간에서 정지시킨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지난 봄밤 그물 같은 비가 내게 던져졌다/아직 나는 그 빗속의 오늘밤에 갇혀 있다”(「불면이라는 농담」)고 고백한다. 이 구절은 그가 한해가 지난 뒤에도 그때의 기억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세월호의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자식 잃고 그는 꽃 한송이 들어 옮길 힘도 함께 잃었다”는 구절 속의 아버지는 세월호로 그대로 옮겨올 수 있다. 시 속의 그는 시간을 훔쳐 하루를 만든다. 그가 그렇게 만든 하루의 시간을 어디에 썼을까. “당초 저는 그 시간을 악착같이 그러모아 죽은 아이를 되살려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죠. 아시다시피 고작 하루를 얻었을 뿐이니까요. 저는 이 하루를 제가 죽는 데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하루를 죽는데 쓴다. 그래야만 “그리운 아들을 만”(「다큐멘터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아이들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 자식 잃은 부모들의 심정이란 것을 그는 안다. 그래서 그 심정을 헤아린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이 상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 있다. 이 상실의 슬픔이 지겹다며 이제 잊자고 하는 사람들을 말함이다. 왜 한켠에선 이 상실의 아픔에 함께 하는데 한켠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일까.
김중일은 “방금도 일어난 잔혹하고 끔찍하며 슬픈 일이 우리 모두에게/단 한번만 공평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떨까/그러면 그 누구에 의해서든/두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농담」)라고 말한다. 모두가 당사자가 되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시인의 농담 같은 얘기이다.
그러나 참사의 비극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참사의 당사자들은 언제나 소수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비극의 당사자들 곁에 함께 한다. 사람들은 암암리에 알고 있다. 우리들이 전복되어 침몰한 배에 타지 않았고, 그 덕에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비극을 위로하기 위해선 비극의 당사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란 것을. 그래서 살아남은 우리에겐 우리의 행운을 기뻐하며 남들의 비극을 외면하고 이 행운을 마음껏 누리며 잘 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을 겪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비극을 위로하고 함께 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위로의 의무를 위하여 남겨진 사람들이란 것을.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무에 눈뜨지 못하는 것일까. 또 그 기억을 잊자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팔십 킬로짜리 속도제한 표지판이 백육십 킬로로 멀어져간다”(「고스트」)는 구절에서 짐작이 간다. 팔십 킬로미터는 사고의 위험을 최소로 줄이면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속도이다. 그 속도로 달리면 참사의 비극은 잊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간의 속도를 두고도 그것을 넘어서는 속도를 만들어냈다. 물에 물귀신이 있다면 길에는 속도의 귀신이 있다. 간혹 속도의 귀신에 홀리는 사람들이 있다.

5 창밖과 창안으로 전해진 바람의 이야기
두 가지의 키스로 시작된 김중일의 시집은 우리가 흔하게 겪으면서도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아버지를 보내고 난 뒤, 다시 아버지를 우리 곁으로 불러 부재의 자리를 채우는 시의 길을 보여주었다. 참사를 겪은 세상 사람들의 아픔이 있을 때 시인이 그 곁에 있었고, 그러자 우리들도 시를 읽을 때 함께 마음을 내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시집은 창밖과 창안에서 전해듣는 바람의 얘기로 마감된다. 시인은 창안과 창밖에 모두 선다. 창안에서 보았을 때의 “석양은 하늘 멀리 던져진 붉은 구유”였다. 창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창밖에선 그 붉은 구유가 어떻게 그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또 그 석양을 본 장소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창밖에선 “망루 위에서 보면 석양은 바람이 하늘 멀리 내던져버린 붉은 구유”라는 얘기를 전하게 된다.
아울러 창안에선 “바람은 잠든 나의 종아리를 길게 찢어/검은 목도리 같은 그림자를 한장 한장 뽑고 엮어/난장이의 목에 감아주던 늙은 마술사”이나 창밖에선 “바람은 잠든 나의 종아리를 길게 찢어/검게 빛나는 목도리 같은/그림자를 하루에 한장 한장 뽑고 엮어/난장이의 목에 감아주던/눈먼 마술사”(「창 밖의 너에게 전하는 바람의 이야기」와 「창 안의 너에게 전하는 바람의 이야기」)로 바뀐다. 창안에선 쌀쌀한 바람을 염려하여 목도리를 둘러주는 마술사의 나이가 보이지만 창밖에선 앞이 보이지 않는 마술사의 눈이 보인다. 아마도 바깥에선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바람 때문에 그리된 것이리라.
바람은 창을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는 바람을 창에 새겨 결국 창을 통해 바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아마도 바람이 통하지 못해도 창에 새겨 바람을 전하는 바로 그것이 시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통해 창의 안과 밖으로 바람이 전해질 수 있고,그 방식을 사람들이 체화한다면, 시의 세상에선 사람들이 어디에 있건 서로를 넘나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위해 김중일이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현대시』, 2015년 7월호)

**대상 시집
─김중일, 『내가 살아갈 사람』, 창작과비평,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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