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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숨김없는 세상이 정말 있는 그대로 세상을 드러내는 것일까.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다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표면의 표정으로 그 세상의 어떤 이면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로 보자면 사진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사진이 현실의 기록을 넘어 예술을 꿈꾸는 순간, 사진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 오히려 대상을 가리려 할 때가 있다.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여자의 사진이었다. 여자는 옷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뒤로 돌아서 있었으나 얼굴을 반쯤 뒤로 돌려 자신의 등쪽으로 시선을 보내려 하고 있었다. 여자의 등이 사진을 보는 내겐 앞쪽이었으며, 여자의 앞은 내게 여자의 뒤쪽이었다.
빛이 여자를 비추었다면 여자의 뒤태와 절반쯤 드러난 여자의 얼굴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피부색도 완연하게 눈에 들어왔을 것이며, 우리의 시선은 등의 한가운데를 따라 여자의 몸을 굴곡처럼 타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은 여자의 몸에서 윤곽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질 않고 있었다. 빛이 여자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뒤쪽으로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자의 몸은 빛을 가리고 서 있었다. 피사체가 빛을 가리면 사진은 피사체의 윤곽만을 보여주면서 아무 것도 드러내질 않는다. 여자의 몸은 진한 어둠으로 가득채워져 있었으며, 빛은 가장자리만 간섭할 뿐 여자의 몸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상태 그대로 밝혀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았던 여자의 사진은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보여주질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보았던 사진은 윤곽으로만 몸을 남기고 그림자가 되어버린 한 여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로 세상에는 남자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여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 때의 여자는 남자를 지워버리면 여자도 지워진다. 그런 측면에서 속을 까많게 채우고 윤곽만 남은 여자의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여자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자가 드러내지 못하는 다른 여자를 드러낸다.
시의 언어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 그 이면으로 넘어가기 일쑤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세상의 전면이거나 겉면이다. 시의 언어들이 그 이면으로 자리하면 우리의 눈에는 그 언어들이 그다지 투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치 그림자로 채워진 여자의 사진처럼. 그러나 그 어둠을 잘 응시하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또다른 세상이 열린다. 시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모호해 보이는 듯한 시의 언어들이 더 명확하고 깊이있는 세상을 열어줄 때가 많다. 나는 우리 눈앞의 세상이 어떻게 드러나 있고, 시의 언어들이 어떻게 그 세상을 넘어가 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지에 주목하며 2015년 여름호의 계간지에 발표된 시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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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의 시로 시작해본다. 그의 시 「책상 혹은 그녀」는 “그것은 언제나 한결같아 보이지만 사실/어제보다 조금 더 늙었다/그 위에 꽃힌 책들처럼”이란 구절로 시작된다. 제목으로 미루어보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책상이다. 그것도 낡고 오래된 책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책상을 낡았다고 하질 않고 ‘늙었다’고 표현한다. 책상과 우리가 겪는 세월은 똑같지만 그 세월을 말하는 언어는 둘을 구별한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책상에 대해 늙어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낡아간다.
하지만 시인은 언어의 구별을 지우고 낡았다는 형용사 대신 늙었다는 우리의 형용사를 책상과 똑같이 나눈다. 때로 물건도 오래 함께 하면 물건과의 사이에 사람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유대감이 생긴다. 책상과 같은 물건은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아마도 책상에 대해 낡았다는 말 대신 늙었다는 말을 쓰게 된 것은 함께 한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그런 유대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때문에 시인이 책상에게 건넨 늙었다는 말에는 의인화의 시적 기법이 아니라 책상에 대한 시인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렇게 시의 언어는 기법이 아니라 사실은 시인의 마음을 드러낸다. 같은 시에서 언어 이면의 또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구석은 또 있다.
의자의 형상은 언제나 ㄴ
14세기 어느 왕이 만든 글자처럼
그 위에 앉은 그녀는 반딧불처럼 고요하다
—이경림, 「책상 혹은 그녀」(『문예바다』, 2015년 여름호) 부분
이경림은 “의자의 형상은 언제나 ㄴ”이라고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평범한 말이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시인의 내면에 있는 어떤 의식이 의자를 ㄴ자로 보이게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의자가 아니라 글자에 앉고 싶은 시인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그 추측을 밀고 나가면 의자의 형상을 ㄴ으로 본 시인의 시선에는 글자에 안기고 싶은 시인의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아울러 시인은 그 글자를 만든 창제자를 “14세기 어느 왕”이라고 말한다. 굳이 집어서 말하자면 그 왕은 세종이다. 하지만 시인은 세종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물보다 14세기라는 시대를 더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세종을 뒤로 숨겨놓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의자에 앉아 책상을 마주하고 싶은 삶의 기원이 그처럼 오래되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 시의 이면에는 책상이 잃어버린 관계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책상은 원래 책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위에 책을 올려놓고 독서를 했다. 그러나 이제 그 관계는 퇴색이 되었다. 시에 등장한 ‘노트북’으로 대변된 컴퓨터가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를 책상에 올려놓고 글을 쓰지 않으며, 심지어 책도 책상 위에 펼쳐놓질 않는다. 우리는 대신 그 위에 컴퓨터를 올려놓거나 펼쳐놓는다. 컴퓨터의 초기 화면은 데스크톱이란 말로 불리곤 한다. 데스크톱은 책상이란 말이다. 우리는 책상 위에 또다른 책상을 펼치게 되었고, 데스크톱은 기존의 책상이 가진 책과의 관계를 앗아가 버렸다.
때문에 이 시는 책상과 시인의 돈독한 유대감에 대한 노래라기 보다 책상이 잃어버린 책과의 관계에 대한 슬픈 회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관계를 잃어버린 책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여전히 책상을 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책상은 책을 얹어놓고 읽는 기능에 관계없이 곁에 두는 것만으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시인은 그 곁에서 “하루에 두어 번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온다는 검은 물을” 마신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또 그 곁에서 음악을 듣기도 한다. “등 뒤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라는 이방의 여자가/저음으로 노래하며 지나”갈 때가 그렇게 음악을 듣는 순간이다. 나는 시인이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들을 때, 이제는 책상도 함께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유용함으로 책상을 재단하지 않는다. 컴퓨터가 그 기능을 앗아간 시대가 되었지만 오랜 세월의 유대감으로 책상은 이제 커피나 음악도 함께 나누는 시인의 친구가 되었다. 이 시에선 관계가 끊어진 세상에서 여전히 시인이 놓지 않고 있는 오랜 유대 관계가 보인다.
두 번째로 만날 시인은 이현호이다. 일단 먼저 그의 시 「국지성 호우」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비 내렸고, 그것은 내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눈동자였네
—이현호, 「국지성 호우」(『작가세계』, 2015년 여름호) 부분
이현호가 눈동자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눈동자는 ‘창문’이다. 이 시에서 눈동자가 창문이란 것은 시를 읽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인용한 구절의 바로 앞에 “창문 앞이니 창문을 바라보았지”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앞의 대목을 함께 인용하지 않았다. 아직 해당 시의 전문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눈동자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창문을 대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만으로는 누구도 눈동자에서 창문을 짐작하기 어렵다. 매우 효과적으로 대치되었다는 뜻이다.
창문은 눈동자가 아니다. 하지만 창문이 눈동자가 될 때가 있다. 우리들이 사랑할 때이다. 그때 창은 그 창의 방에 사는 사람의 눈동자가 된다. 창문을 바라보는 것은 그 때문에 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이 창문을 바라보며 그것을 ‘눈맞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창문에 대한 눈의 비유는 계속된다. 그 창문에 대해 “눈꺼풀 닫지 않은 창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창문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시인이 창문 앞에 선 시각은 밤이다. 이현호는 또 “창문을 보다보면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어야만 할 것 같고/창문을 보면서도 창문은 없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사랑할 때의 창문은 창문이 아니라 눈동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닫혀 있어도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세계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 자신이 그 세계를 “서로 너무 다른 말을 하는” 또다른 나의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시인이란 너무도 다른 말을 하는 또다른 나를 가진 종족일 수도 있다. 시인은 한몸에 두 종족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이번에는 배영옥의 안내를 받아본다. 배영옥이 우리들을 데려가는 곳은 “작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 ‘요양원’이다. 시는 그 요양원의 풍경과 느낌을 전하고 있다. 그곳엔 “백발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인은 그 할머니들에게서 “마지막 씨앗까지 날려 보낸 빈 대궁들”의 느낌을 감지한다. 또 “표정조차 닮아 가는 의좋은 자매들”의 모습을 엿보기도 한다. 요양원의 느낌과 풍경은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다. 그것이 요양원의 현재이다. 그러나 요양원은 그런 현재와는 다른 무엇이 그곳을 지배하는 곳이다. 그것은 요양원에 머무를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작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다음에 하고 돌아서는데
너무 많은 다음에 치인 다음이
손사래를 친다
다음이 다음을 기다리는 줄 모르고
기다리는 마음이
영영 세상을 등지는 줄도 모르고
다음에, 다음에 올게요
—배영옥, 「다음에」(『문예바다』, 2015년 여름호) 부분
‘다음’은 액면 그대로의 말로만 보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이지만 그러나 그 다음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요양원의 현실이다. 어떻게 보면 만날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아 다음이 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곳이 요양원이다. 하지만 다음을 말하는 그 의례적인 기약 앞에서 요양원의 할머니들은 오히려 어서 가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을 빨리 보내려 한다. 아마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다음이 다음이 되지 못한, 말하자면 마지막이 되어 버린 수많은 다음에 대한 경험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미리 거두어두는 것이 편하다는 깨달음 속에서 그 손사래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요양원은 그렇게 보면 ‘다음에’라는 말 속에서 다음에 대한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붙잡아 두기에는 다음이 마지막이 되어 버린 경험이 너무 많아 오히려 그 절실함을 털어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정반대의 현실이 교차되는 곳이다. 배영옥이 전하는 ‘다음에’라는 말 속에선 그런 뜻에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털어내야 한다는 상반되는 두 마음이 교차되고 있다.
김승일도 요양원 얘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배영옥의 경우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배영옥이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요양원 풍경을 전하면서 그곳에서 다음이란 말이 갖는 의미가 일반적인 경우와 크게 차이가 남을 보여주고 있다면 똑같이 요양원을 말하고 있는 김승일의 시는 경제적 풍요를 위해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우리의 뜻과 전혀 다르게 도달한 곳이 어떤 곳인가를 요양원을 통해 시사하고 있다. 시는 매우 짧다.
여기는 물론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했던 요양원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가 요양원이다. 이걸 짓기 위해 돈을 벌었다.
흥미롭냐?
—김승일, 「여기가 요양원이다」(『시와사상』, 2015년 여름호) 전문
“약속했던 요양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표면적으로 보자면 아무래도 필요한 기준에는 많이 못미치는 요양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때의 짐작은 요양원 시설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상상하게 되는 것은 설비가 기대에 못미치는 요양원이다. 하지만 요양원을 지은 사람은 “여기가 요양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요양원이 아닌 것을 요양원이라고 우기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이걸 짓기 위해 돈을 벌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말은 우리가 벌은 돈을 이걸 짓는데 다 쏟아부었다는 말로 들린다. 도대체 시인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 짧은 구절 앞에서 나는 요양원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그것은 요양원에 대한 일종의 근본적 질문이었다.
말의 의미를 그대로 따라가면 요양원은 요양을 하는 곳이 된다. 그리고 쉬면서 병을 치료하는 것을 요양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 시대의 요양원은 그런 곳이 아니다. 그곳은 일생 말엽에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다. 예전에는 요양원이란 것이 없었다. 늙고 병들면 자식들 곁에 머물다 세상을 뜰 수 있었다. 늙은 사람들의 노후는 가족들의 몫이었다. 보살펴 줄 수 있는 손이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자식들 가운데 늙고 병든 부모를 곁에서 돌봐줄 수 있는 남아도는 손이 없다. 모두가 직장을 다니며 바쁘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열심히 돈을 벌었더니 그 돈으로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 생의 정리를 그곳에 맡겨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알고 보면 요양원을 짓기 위해, 혹은 요양원에 부모를 맡기기 위해 돈을 번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양원을 이해하면 “이걸 짓기 위해 돈을 벌었다”는 시인의 말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 삶의 답이 있는 양 돈버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냉소로 들린다. 누가 이렇게 자식 곁에서 버려져 낯모르는 사람들 곁에서 생을 정리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누가 설마 그런 생의 종말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은 그렇게 되었다. 아무도 생의 종말을 요양원에서 마치고 싶어하지 않지만 우리는 원치 않는 그런 시설을 짓고 그곳에 삶의 마지막을 맡기기 위해 돈을 번 것처럼 되었다.
김승일은 “흥미롭냐?”는, 빈정이 반쯤 섞인 듯한 물음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열심히 아득바득 돈을 버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전혀 원치 않는 것을 위해 그 돈을 쓰게 된다. 아울러 시인의 그 물음은 이런데도 계속 돈에만 흥미를 가질 거냐는 반문으로 들린다.
김승일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요양원은 길을 잘못든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된다. 불행히도 그 단면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의 요양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잘못 걷고 있는 길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 한 직장인에게서도 엿보인다. 그 단면은 이현승이 “권고사직을 제안받”은 ‘김부장’을 통해 보여준다. “일이 줄어들면서 퇴직을 예감했”던 김부장은 “예측보다 현실이 빠르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바로 이런 때가 “떠날 때”라며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김부장은 “회사를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간결하게 걱정을” 남겨놓고 회사를 떠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김부장의 퇴직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지한 것도 아니고 미리 사직을 권고하면서 양해를 구했으며, 이를 김부장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김부장은 “구차한 말을 삼가”고 떠나는 것이 “떠나는 사람의 고매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직하지 않고 버티면 자존심을 짓밟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너무도 많이 들어왔다. 사직 권고에 맞서 버티면 회사측에서 책상을 빼버리고 아예 일거리를 주지 않거나 지금까지 일해왔던 분야와는 전혀 다른 분야로 발령을 내며 이래도 버티는지 보자는 식으로 나온다는 얘기를. 권고 사직이란 사직에 대한 정중한 양해가 아니라 사실은 권고할 때 나가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게 될 것이라는 폭력적인 경고이다. 이 시대의 직장인은 권고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쫓겨나거나 버티다가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자존심을 짓밟힌 끝에 쫓겨날 뿐이다. 시는 그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이 없지만 “순순히 자리를 물리고 빠져나와 회사를 건너다”보는 김부장의 시선에서 권고 사직의 이면에 자리한 회사의 폭력적 실체를 짐작해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남의 사람이 된 애인의 고친 화장”을 지켜보는 듯한 “짠하고 착잡하기만” 한 김부장의 심정을 시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세상은 봄날이고 꽃은 시절을 다투고
날리는 바람의 끝을 짐작할 수는 없으나
거래는 끝났는데 자꾸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삶이란 원래부터 누군가에게 증강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현승, 「평균적인 삶 —증강 현실」(『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부분
우리는 가상 현실이란 말을 알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과 같은 것을 통하여 구현되는 말 그대로의 가상 세계를 일컫는다. 증강 현실은 그와 달리 실제의 현실을 기반으로 가상의 인물을 덧붙여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가상 현실에선 가상의 세상에 진짜인 내가 있지만 증강 현실의 세상에선 내가 마치 현실에 덧붙여진 듯한 가공의 인물이 된다. 회사는 더이상 일하는 자와 자본을 가진 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인간적 공동체가 아니다. 회사는 수익이 줄면 일하는 사람을 가차없이 쫓아내며, 쫓겨난 순간 마치 내가 가공의 인물인 듯한 소외감을 주는 가공할 권력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이 시대의 모든 직장인들이 감내해야하는 “평균적인 삶”이다.
이현승이 김부장의 삶을 통하여 한 인간을 가공의 차원으로 추방해 버리는 회사라는 이름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김현은 다수라는 이름의 주류가 소수자들에게 가하는 부당한 폭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세상에는 “가슴은 참으로/불편하다”고 느끼는 ‘여자’가 있다. 내가 그것의 실체로 상상한 것은 유방암을 앓는 여자였다. 얼마나 불편하고 아플 것인가. 그러나 유방암에 걸려 가슴에 이상이 생겼다고 여자가 지워지진 않는다. 다시 말하여 “여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때로 유방암은 가슴을 자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유방암으로 인하여 가슴을 잘라냈다고 해도 여자가 사라지진 않는다. 다시 말하여 여자가 “생생하던 가슴을” 잘라내도 얼마든지 “가슴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날 수 있으며, “스스로 가슴이 없는 여자는/유일하게 행복”할 수 있다. 그렇게 수술을 통하여 여자는 삶을 다시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삶을 얻었다는 측면에선 행복하다. 그것을 유일한 행복이라고 한 시인의 말은 그런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이것의 반대도 성립될까. 김현은 “유일한 행복이라면 남자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남자의 경우에도 여자의 경우와 똑같은 논리로 역방향의 이해를 구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반대의 경우란 “자지로부터 멀리 가려 한” 남자이며, 그 “남자는 가슴을 유입한다.” 그리하여 남자의 “가슴 속에는 인공이 들어서”게 되고, “남자는 천연하게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다니게 된다. 여자는 가슴을 잃었고, 남자는 반대로 가슴을 얻었다. 시인은 이제 이 둘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어떤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 둘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드러내도록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남녀를 보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가슴이 없는 보지와 자지가 달린 가슴을 전시한다
—김현, 「가슴에 손을 얹고」(『문학과사회』, 2015년 여름호) 부분(이 시의 제목은 잡지 속에선 ‘손을 얹고’라는 뒷부분이 ‘가슴에’라는 앞부분보다 위쪽으로 자리하게끔 올라가 있다. 정말 가슴에 얹혀진 것처럼)
이 사회의 어느 누구도 유방암으로 가슴을 잘라낸 여자를 “가슴이 없는 보지”로 보지 않는다. 그때의 여자는 여전히 그냥 여자이다. 그러나 “가슴을 유입한” 남자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의 남자는 “자지가 달린 가슴”이 된다. 여자의 경우에는 가슴을 잘라내도 여자가 지워지지 않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유입된 인공의 가슴이 여자를 몰고 온다. 그리고 그 가슴은 단순한 신체의 한 부위에 그치지 않고 여자의 다른 이름이 되어 남자의 다른 이름과 공존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이상하다고 느낀다. 가슴을 잘라낸 여자를 성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는 없지만 가슴을 유입한 남자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성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당연히 느낌이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느낌이 물리적인 배타적 행위로 연결되면 가슴을 유입한 남자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에 대한 이해는 그 이해의 방식으로 보자면 다른 쪽도 이해가 되어야 하지만 종종 사회에선 동일한 논리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 전혀 이해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받지 못하는 것들은 다만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아직 “이름 없는 것들이 이름 지어진 것들과/만연한 이름을 소환”하여 이름을 가지려는 자리에 그들 소수가 서 있으며, 그 자리의 삶은 힘겹다.
사회는 왜 그런 부당한 방식으로 굴러가는 것일까.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는 구현우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시인이 전하는 사건은 간단하다. “가까운 곳에서 연기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질 못했다. 다만 연기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본 것이 연기밖에 없는 그 사건은 확연하게 세상에 드러나질 않는다. “모르지만 발을 구르는 사람들과 알지만 입을 다무는 사람들 모두 한 무리”가 되면서 “모호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사태를 만든 끝에 결국 일은 이렇게 되어 버린다.
잘못된 일이 나쁜 일이 되어가고 있다.
—구현우, 「회색」(『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부분
잘못된 일은 잘못을 고쳐서 바로 잡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나쁜 일은 그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에 가깝다. 때문에 잘못된 일이라면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순서가 되지만 나쁜 일이 되면 대상에 대한 비난이 그 일을 둘러싼 주된 행위를 이루게 된다. 왜 우리 사회에선 잘못된 일이 이렇듯 나쁜 일로 뒤바뀌는 것일까. 이의 원인은 분명하다. “명확히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회는 “밤과 낮이 선악 없이 섞이”면서 회색의 사회가 되어버렸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이다.
3
시의 언어들은 현실에서 배태되어 현실을 말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시의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의 경계를 벗어나면서 그 경계의 이탈을 통하여 언어 이면의 세계로 우리들을 이끌곤 한다. 여름의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살펴보는 동안 나는 그렇게 하여 한 시인이 책상에게 쥐어준 ‘늙었다’라는 말을 통하여 책상과 시인이 쌓아온 오랜 유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또 어느 비오는 날, 창문이 ‘눈동자’가 될 때, 그 눈동자란 말에서 시인이 한때 창문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을 맞출 수 있는 사랑의 순간을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요양원의 세상에선 ‘다음’이 다음이 아니라 마지막의 동의어란 것을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작별의 순간에 알 수 있었으며, 아울러 ‘요양원’이란 말은 물질적 풍요를 위하여 치달아온 우리 사회가 잘못 걸어온 길의 막다른 골목이기도 했다. 회사를 쫓겨난 한 직장인에게선 회사라는 이름의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가상의 존재로 내몰리는 우리의 오늘을 ‘증강현실’이란 말속에서 엿볼 수 있었고, ‘남자와 여자’라는 말을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며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부당한 차별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우리 사회가 사건의 내막을 투명하게 밝히지 못하여 잘못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비난만이 난무하게 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회색’이란 낱말 속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대개 언어는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면에 모두 드러내려 하지만 시의 언어는 오히려 우리들을 언어의 뒷편으로 이끌고, 그 이면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나는 시를 읽으며 언어의 뒤편으로 돌아가고자 애썼다. 시의 언어는 전면으로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뒷편으로 오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겠다는 이면으로의 은밀한 초대장이었다.
(『문예바다』, 2015년 가을호, 시 계간평)
2 thoughts on “시의 언어, 세상의 이면에 대한 은밀한 초대장 —계간 『문예바다』 2015년 가을호 시 계간평”
요즘의 시들을 계간평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접하게 되네요.
구현우의 창비에 실린 시 한 구절은 혹시 신경숙과 창비에 대한 은밀한 조소가
아닐까 하는 유쾌한 상상을 해 봤습니다.^^
시가 그 사태 훨씬 전에 나왔어요. 계간평 때문에 세 달에 한번씩 챙겨읽으니 확실히 시대의 감각을 따라가게 되네요. 뭐든 강제로라도 좀 해야 되는 듯 싶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