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시를 쓴다는 것 —계간 『문예바다』 2016년 겨울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6년 겨울호
『문예바다』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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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쓰고 나는 읽는다. 그러나 쓰거나 읽는 자들이 언제나 쓰고 읽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쓰고 읽는 자들은 쓰고 읽는 한편으로 그들의 행위 자체를 돌아볼 때가 있다. 가령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그것은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를 묻는 질문으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그 답을 찾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읽는 자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질문은 읽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를 묻는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쓰고 읽기를 멈추고 가끔 그 행위 자체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읽는 자로서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을 해보자면 읽는다는 행위는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진행되기 일쑤이다. 가령 시를 읽을 때면 나는 자꾸 시를 해석하려 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읽기의 양식 같아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혹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읽기의 방식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구해야 할 것이나 문예지의 가을호에 발표된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시인에게서 그에 대한 매우 의미있는 답을 들었다. 시인은 정재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 「실내악(窸內樂) – 책, 파도, 백경 3중주」에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내 두 눈에 파도가 들이쳤다”고 말한다. 부제 속의 ‘백경’이란 말로 미루어 그는 지금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을 읽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시인에게 소설 『백경』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의 줄거리나 주제를 파악하는 일이 아니다. 시인에게 그것은 두 눈에 들이치는 파도를 경험하는 일이다. 시인은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눈동자가 조금씩 탈색되었다”고 말한다. 그 파도가 실제의 파도는 아니다. 실제의 파도였다면 시인의 얼굴에선 짠 바닷물이 묻어났을 것이다. 시인이 읽고 있는 것은 분명 소설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니/검은 잉크가 묻어있었다”는 시인의 말은 그 사실에 대한 확인 차원의 구절이 된다. 파도가 들이쳐 탈색된 시인의 눈동자는 “하얀 거울이 되고/흰자위는 바다가 되”며 드디어는 그 속을 “흰 고래/한 마리”가 헤엄을 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경험 끝에 시인은 자신의 소설 읽기를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책장이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난 눈동자가 남지 않은
늙은 바다가 되어있었다
고래도 책도 사라졌지만
파도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정재학, 「실내악(窸內樂) —책, 파도, 백경 3중주」(『시산맥』, 2016년 가을호) 부분

정재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경우에 따라 우리가 ‘바다’가 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책읽기와는 양상을 완전히 달리한다. 혹 시를 읽을 때도 때로 이러한 방식의 읽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해석이란 일반적 양태를 떠나 우리는 읽기를 통하여 바다가 되고, 또 어떤 아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16년 계간지의 가을호에 실린 시들을 읽는 일은 그렇게 읽기 방식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2
정재학에 이어 이제니의 시를 들여다 본다. 그의 시 「언젠가 가게 될 해변」은 제목만으로 보면 미래의 해변이다. 제목에서 엿보이는 이러한 미래 시제는 시 속에서도 세 차례나 반복이 되며, 그 반복 속에서 “언젠가 가게 될 해변”은 “언젠가 언제고 가게 될 해변”이나 “언제고 다시 가게 될 우리들의 해변”으로 변형된다. 변형 속에서도 시제가 미래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이 미래 시제는 동시에 현재의 혐의를 짙게 풍긴다.
가령 “나는 너를 잃어가면서 비밀을 걷고 있다. 노을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슬픔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는 대목을 예로 들자면 그 대목의 끝부분들은 미래의 해변과 시제를 맞추려면 “걷고 있다”가 아니라 “걷고 있을 것이다”나 “옅어지고 있다”가 아니라 “옅어질 것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대목은 미래에서 바라본 현재형의 과거이거나, 아니면 그냥 현재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실질적인 현재로 본다면 시인이 지금 바닷가의 현재를 미래 시제로 걷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후자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현재를 미래 시제로 걸어간 것일까. 그것은 현재를 현재로 걸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 현재를 미래 시제로 걸으면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 가령 바닷가를 현재 시제로 걸으면 그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그냥 대화에 불과해진다. 모래도 모래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현재가 과거가 되는 미래에선 그 바닷가의 모래가 시간의 다른 이름이 된다. 말하자면 모래가 언젠가 와봤던 그때의 시간과 동의어가 되면서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가리키게 된다. 그곳에서 나누었던 대화 또한 둘의 대화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 속의 대화 또한 모래처럼 해변에 흩어져 있게 된다. 이해가 어렵다면 다시 찾은 해변에서 그때 우리 여기서 이런 저런 얘기 나누었는데 라며 그 순간의 대화를 잊지 않고 떠올리는 경우를 상상해 보시라. 현재일 때는 해변에 흩어지고 있는 대화나 시간의 다른 이름인 모래알이 보이질 않는다. 현재를 미래 시제로 걸을 때만 대화와 모래가 보여주는 다른 양상이 보인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알과 모래알 속에는 시간이 가득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든다.
—이제니, 「언젠가 가게 될 해변」(『시로 여는 세상』, 2016년 가을호) 부분

알고 보면 시인이 해변에 가득 찬 “자음과 모음”, 또 모래알 속에 가득찬 시간, 그 시간들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알’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현재를 미래 시제로 걸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근한 제안일 수도 있다. 현재를 현재로 걷지 말고 미래 시제로 걸어보라는. 그러면 현재 시제 속에서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송승언의 「사후적 관점」은 제목만으로 보면 죽은 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다. 하지만 죽음의 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상상은 실제로서의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보다는 그냥 상상에 불과해질 위험이 높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동원한 방법은 비유를 통해 죽음의 뒤로 가보는 것이다. 그 비유 속에서 죽음의 상징이 되는 것은 한 건물이다. 아마도 시인이 알고 있었으나 어느 날 불에 타 무너진 건물이 아닐까 싶다.

최후의 건물의 최후에는 건물의 영혼인 이용자들이 빠져나갔고
건물의 영혼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도
여전히 건물 그 자체로서
불타는 모습으로, 미동도 않고
신자처럼 잠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자살하듯 쏟아져내렸다
—송승언, 「사후적 관점」(『문학동네』, 2016년 가을호) 부분

무너진 건물이 건물의 죽음이 되자 시인은 죽음의 뒤에 설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그 건물의 ‘이용자들’이 “건물의 영혼”이 되었다. 이로서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죽고 난 다음의 체험자가 된다. 우리는 이제 그 건물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불에 의해 소실되었고, 시인이 “조상들은 늘 당신들이 계시지 않을 미래를 설계”했다면서 그 건물이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물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건물이 숭례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지금은 다시 복원되었으나 한때 숭례문은 화재로 소실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시인의 사후적 관점에 서면 비록 숭례문은 불탔으나 그 건물의 영혼은 살아남았다. 건물의 영혼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후적 관점에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비탄스러운 일은 영혼을 잃는 일이다. 건물의 소실로 우리는 한때 큰 상실을 앓았으나 가장 비탄스러운 일은 겪지 않았다.
김민율은 그의 시 「종소리의 둥근 서체」를 이렇게 시작한다.

모서리가 둥근 울음소리를
종소리라고 명명하고 허공에 쓴다
—김민율, 「종소리의 둥근 서체」(『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부분

제목으로 보면 종소리는 둥근 모양의 서체이다. 소리 중에서 텍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그 이외에는 텍스트가 되기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김민율이 그려낸 시의 세상에선 종소리가 텍스트가 될 뿐만 아니라 마치 손글씨처럼 그 소리만의 서체를 갖는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종소리의 서체라는 양상이 전혀 다른 어떤 발견의 내역이 아니라 그 발견이 있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시인은 처음에는 종소리라는 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시인이 종소리가 아니라 “모서리가 둥근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그 때문이다. 즉 시인은 종소리를 듣고 그것을 “모서리가 둥근 울음소리” 같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종소리라는 말을 모른채, 보다 정확히는 그 말을 버린 상태로 종소리를 들었다. 시인이 자신이 들은 소리를 ‘종소리’라고 ‘명명’하는 과정이 그 뒤를 따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말을 버리면 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양상의 말을 새로이 얻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정반대의 양상도 있다.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구체화하는 경우이다. 이우성의 시 「오후」에서 그러한 경우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은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선생이” 한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시를 시작한다. 선생은 “잘 때 자고/먹을 때 먹고/쌀 때 싸면/잘 사는 거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바람만큼이나 빤한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이 다시 말씀하”신다.

잘 때 딴생각 안 하고 잠만 잘 수 있어야 하고
먹을 때 딴생각 안 하고 먹을 수만 있어야 하고
쌀 때 딴생각 안 하고 쌀 수만 있어야 한다
고개를 세 번 끄덕였는데 그때마다 짝사랑하는 여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런 삶이라면 도전해볼 만하겠어요
—이우성, 「오후」(『문학과사회』, 2016년 가을호) 부분

흔히 삶의 잠언이라 불리는 진리의 말씀들은 삶의 구체적 양상을 무시할 때가 많다. 사람들의 삶은 무수한 변수들을 갖고 있어 삶이라는 하나의 명명아래 뭉뚱그릴 수가 없는데도 그 말씀들은 사람들 모두의 삶을 하나의 말씀 아래 묶어두려 한다. 시인은 그런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말씀을 어떤 한계 내에서만 수용한다. 말씀을 한 인간의 삶 속에서 매우 구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과학과 유사한 측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고 알고 있지만 과학에서 그 사실은 대기압이 1기압일 때로 제한된다. 기압이 크게 낮은 에베레스트 정상에선 물이 섭씨 71도에서 끓는다. 삶의 잠언이란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 물을 100도에 끓이려는 짓일 수 있다.
말을 버리고 말을 새롭게 얻고, 뭉뚱그려진 말을 구체화하면서 “빤한 말씀”의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때로 개인의 문제도 문제의 당사자로부터 눈을 돌릴 때 답이 얻어질 수 있다. 천수호가 그러한 경우를 보여준다. 시인은 지금 시인의 남자와 함께 자작나무가 가득한 골짜기를 걷고 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그렇게 원만하질 않다. “다투고 있던 당신과 나도 그 골짜기에 멈춰 섰다”는 대목이 그 사실을 알려주며 “한 실랑이가 다른 실랑이에 기대어 사르락거”리고 있다는 대목은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그러나 시인은 냉랭하게 얼어붙은 둘의 사이로 시선을 묶어두지 않는다. 때는 봄이고, 봄의 땅은 ‘냉증’을 이겨내고 새싹을 내고 있다. 시인이 눈길을 준 곳은 그곳이다.

냉증의 땅이 꽈리를 불어서
누워 있는 장작과 장작 사이
서 있는 자작과 자작 사이에
눕듯이 서듯이 푸른 한 잎 또 터져 올라온다
—천수호, 「눕듯이 서듯이 자작자작」(『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부분

관계가 악화되면 우리는 악화된 관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러면 관계는 더 악화된다. 악화된 관계는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답을 주지 못할 때가 흔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시인은 관계의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으로 눈을 돌린다. 주변으로 눈을 돌리자 자작나무 숲이 있고 계절은 자작나무가 새순을 내는 봄이다. 시인에게서 그 풍경은 “봄 자작나무가 하늘로 하늘로/어린 청개구리들을 토해” 내는 시절로 그려진다. 그리고 “먼 발아래 꽈리처럼 부푼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그 비닐하우스는 “밭뙈기의 냉증”을 이해한 땅의 대답이 된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은 “당신의 냉증”을 “내 몸속의 꽈리”로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러고 나자 “냉증의 땅”, 말하자면 얼어붙었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이기고 솟아오르는 봄의 새싹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관계의 계절도 그렇게 흐르는 것인지 모른다. 냉증의 땅을 이겨내고 싹을 틔우면서 봄처럼. 시인이 그 답을 들은 것은 문제가 된 둘이 아니라 아직도 겨울의 기운이 남아있는 냉증의 땅과 그 땅에 온 작은 봄의 신호들이었다. 때로 문제의 답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 주변이 알고 있을 수 있다.
말의 쓰임새가 시 속에서 새롭게 구획될 때가 있다. 가령 ‘빤쓰’는 ‘팬티’의 다른 호칭이다. 두 호칭이 가리키는 대상은 같다. 그러나 또 두 호칭은 갈라져서 각각 사용된다. 두 호칭을 갈라놓는 것은 세대의 차이이다. 나이든 세대는 빤쓰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흔하고, 좀더 젊은 세대는 팬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시 속에선 그 두 호칭을 갈라놓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일 때가 있다. 차주일이 그런 경우를 보여준다. 차주일에게 있어 빤쓰와 팬티를 갈라놓는 것은 구멍이다.

구멍 난 팬티는 정독해도 빤쓰로 읽힌다.
—차주일, 「팬티 빤쓰 구멍론」(『문예바다』, 2016년 가을호) 부분

언듯 보면 가벼운 유머 같지만 사실 구멍을 기준으로 빤쓰와 팬티를 나누는 시인의 인식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것들에게 섬세하게 시선을 내주는 시인의 미덕 덕택에 얻어질 수 있었다. 평범하고 흔한 것들은 아무래도 평범하고 흔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의 시선이 그냥 스쳐갈 때가 많다. 문제는 그 대상에 사실은 귀한 것이 들어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소중한 많은 것들을 놓칠 수 있다.
종종 일반인들과 달리 시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관찰력을 갖춘다. 차주일도 그렇다. 그는 섬세한 시선의 힘으로 구멍에 대한 깊은 천착을 보여준다. 그 천착을 통하여 그는 “구멍은 보이는 모습대로 보이지 않게” 하며 “마음자리에 들인 심안처럼/실체를 무형으로 굴절시킨다”는 인식에 이른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랜 기간의 천착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시인에게 구멍은 구멍이 아니라 보이는 모습의 이면으로 건너갈 수 있는 창구가 된다. 구멍의 그런 차원에 눈을 떴을 때의 경험을 시인은 “가운데에 구멍을 들인 돌아올 회(回)자가 원형으로 읽힌다”고 말하고 있으며, “굽을 곡(曲)자”에선 “여러 차례 돌아온 흔적”을 읽어낸다.
그러나 역시 구멍으로 인하여 대상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된 경우 가운데 가장 크게 우리의 관심을 가져가는 경우는 “빨래로 널어놓은 팬티”를 보았을 때이다. 물론 그 팬티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시인에게 그것은 더 이상 팬티라고 부를 수 없는 다른 무엇인가 였다. 그것을 지칭하는 적당한 호칭을 붙여주고 싶었던 시인은 ‘빤쓰’를 그에 대한 가장 적절한 호칭으로 가져다 사용한다. 그 순간 ‘빤쓰’는 일반적인 쓰임새에서 벗어나 새로운 쓰임새를 갖는다. 그 쓰임새 속에서의 ‘빤쓰’에선 “팬티 속 처녀는 어디로 사라”지고 “아무리 외설스런 생각을 하려고 해도/좀체 젊은 나신이 돌아오지 않는” 아주 구체적인 빤쓰만의 세상이 있다. 할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구멍난 평범한 팬티에서 “심안에 사랑이 들어 출가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 그 세상이다.

3
계간지 가을호의 시를 읽는 이번 여정은 김이듬의 시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시 「옷걸이」에서 “내 치마가 걸려 있다”고 말한다. 이어진 “저녁놀과 가로등 사이에”라는 구절로 미루어 치마는 아마도 저녁놀이 지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는 시간까지 계속 걸려 있었는가 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걸려 있던 치마는 흘러내린 치마가 된다. 시인이 “뺨에 눈물이 마르는 동안 흘러내렸나”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울고 있었고, 울고 있던 시인이 울음을 그친 사이에 옷걸이에 걸려 있던 치마는 흘러내린 치마로 바뀌고 말았다.
이 급작스런 전환을 이해하려면 치마를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인의 시선이 아니라 치마에 강제되는 사회 일각의 또다른 시선이다. 걸어놓은 치마는 시인에겐 그냥 옷의 하나이지만 흘러내린 치마는 여성을 성적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세상의 한 양상에 비친 모습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시인은 개인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으로 서 있을 때 걸어놓은 치마였던 그 치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에 서는 순간 흘러내린 치마로 바뀔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일각이 그런 시각을 가졌다는 얘기도 된다.
걸어놓은 치마가 흘러내린 치마로 뒤바뀌는 이러한 상황은 더욱 급변한다. 시인은 “비가 내렸고 나는 방화에서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마리서사에 들러 읽던 책을 팔았다.” 마리서사는 헌책방으로 보인다. 그곳에 들러 책을 판 시인은 “골목을 돌아 나”온다. 그 순간까지는 시인의 일상적 행로로 보인다. 그러나 그 길에서 시인은 공중화장실로 끌려가고 급기야는 납치되고 만다. 그 납치의 순간을 시인은 “큰 트럭에 나를 던져 넣었다 저기 내 치마가 걸려 있다 막사와 막사 사이 산허리에 제8사단 사령부와 고요한 사원 사이에”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들이었다. 시인은 어린 처녀였던 위안부들이 끌려갔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치마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시의 형식으로만 보면 결국 끌려간 것은 시인 자신이 된다.
왜 시인은 자신의 일상을 갑자기 오래 전 일제 강점기의 비극과 연계시켜 놓은 것이었을까. 끌려가던 위안부에게는 끌려가기 전까지의 삶이 시인과 똑같은 일상이 아니었을까를 묻는 시인의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예고되어 피할 수 있는 만행이 아니라 예고없이 일상에 들이닥쳐 그 시대를 살아간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만행이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지금의 시대가 그에서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그때와 똑같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이 땅 여자의 “남자 친구”들이 “하루에 몇번 했냐 임질이냐 너도 즐겼냐”고 묻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때 세상은 피해자가 피해를 죄로 받아들이며 덮어야 했으며 특히 그 피해가 성적인 것이면 거의 예외가 없었다. 그 시절을 김이듬은 “월요일에는 기병대 화요일에는 공병대 하루도 빠짐없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군인들이 줄을 섰다 동네 한켠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덮자고 했다 촌장이 돈을 받아 왔고 원한을 품지 말라고 했다”는 말로 전한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시인이 “나는 벌거벗은 얼개로 있다 인공관절인지 뼈에 사무치지 않는다 가랑이를 벌리고 가부좌한 후손 같다”고 스스로의 삶을 전하는 얘기를 지금은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는 시대이며 시인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전언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면서도 시인은 어느 날 옷걸이에 걸린 치마가 흘러내린 치마가 바뀌는 변환 앞에서 이 시대가 지옥 같았던 오래 전의 시대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아마도 그 의문이 죽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세상을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적 세상과 뒤섞게 만든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두 세계가 뒤섞이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이 삶의 숨결이 된다. 죽음이 삶의 숨결이 되면 삶마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마저 삶으로 일어선다. 시인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관 속에 누워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 결과 잠들어 있는 관 속의 시인을 일깨우며 할머니의 죽음이 시인의 삶이 된다.

치렁치렁한 밤의 치마 아래 숲에서 내가 잠든 관으로 죽은 할머니가 힘찬 숨결을 불어넣는다
아 뜨거, 누가 우리 가랑이를 찢어 걸어놓았나 벌건 노을의 쇠막대기에
—김이듬, 「옷걸이」(『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부분

나는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읽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를 물으며, 정재학의 시에서 그 답을 들었다고 했다. 시인은 소설 『백경』을 읽는 일이 파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며 나는 이번에는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들은 듯 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억울하고 아픈 죽음을 기록하고 전하면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시란 그 시대의 죽음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죽음이 시 속에서 삶으로 일어났다. 일어난 삶은 이렇게 물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찢어 죽였는가고.
가을호의 시들에서 나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이 어떤 행위인가에 대한 답을 모두 들었다. 우리는 읽고 쓰면서 파도가 되고 또 한 시대의 죽음이 되었다. 그것은 또다른 시의 세상이었다.
(『문예바다』, 2016년 겨울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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