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으며 또 다른 세상을 듣고 살다 —계간 『문예바다』 2017년 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7년 봄호
『문예바다』 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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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선 과학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그 얘기는 우리들이 그간 들어오던 얘기와는 많이 다를 수 있다. 가령 우리들도 밤이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별을 볼 수 있지만 그때 우리들의 별과 과학자의 별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한 천문학자는 별을 가리켜 ‘밤하늘의 유령’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별과 유령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질 않는다. 별이 유령이 된 연유는 천문학자의 과학적 지식이 투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기반 지식을 공유하지 않을 경우, 그 말은 과학자의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난해시의 한 구절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별이 밤하늘의 유령이 된 연유는 별과 우리 지구와의 거리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이 자리한 또다른 태양인 알파 센타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인데도 무려 4.37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우리가 보는 태양빛이 8분전의 빛이듯이 지금보고 있는 알파 센타우리의 빛은 4년전의 별빛이다. 만약 지금 그 별빛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별은 사실 4년도 더 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이미 사라진 별의 빛을 보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의 빛이라면 그것은 유령의 빛이다. 천문학자가 별을 올려다 볼 때 밤하늘에 유령이 가득한 연유가 그것이다.
내가 과학 얘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어떤 과학적 정보라기보다 그 정보로 인하여 확장되는 또 다른 세계의 경험 때문이다. 나는 자주 과학 얘기를 통하여 또다른 세계를 만난다.
나에겐 이러한 경우의 또다른 개인적 경험이 있다. 내가 아는 한 과학자는 실험할 때 쓰는 항체인 GFP(녹색 형광 단백질) 이차항체를 꺼낼 때마다 “야, 4885 너지?”라고 말하곤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는 영화 <추격자>에 나오는 대사이다.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면 이 대사의 출처 정도는 쉽게 확인이 된다. 하지만 그가 실험실의 이 항체 앞에서 이런 대사를 꺼내들 때 그 연유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이 항체는 형광현미경으로 볼 때 이 항체가 붙은 단백질을 초록색으로 보이게 해주며 이때 이 항체가 흡수하는 빛의 파장이 488나노미터이다. 과학자는 항체가 흡수하는 파장의 수치인 488이 영화 대사 속의 4885와 세 자리나 겹친다는 이유로 이 항체 앞에서 영화 속 장면을 끌어들여 대사를 입에 올리고 혼자 놀기의 순간을 즐긴다. 나는 그 순간 또한 과학이 확장해주는 또다른 재미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시인에게선 시를 듣게 된다. 시에선 언어를 통한 세상의 확장이 더욱 자유롭다. 다시 말하여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를 읽을 때면 우리들이 접하던 일상적 세상이 또다른 세상으로 열리며 확장되곤 한다. 과학자가 별에서 밤하늘의 유령을 읽어낼 때와 마찬가지로, 또 어떤 항체가 흡수하는 빛의 파장과 그 수치로부터 영화 대사를 떠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시인들은 우리의 세상에서 일반적 감각과는 다른 세상을 열곤 한다. 때문에 시를 읽을 때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듣고 살 수 있다. 2016년 겨울호의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나는 시가 열어주는 또다른 세상을 듣기 시작했다.

2
장상관의 시 「틈」을 가장 먼저 들여다 보기로 한다. 제목대로라면 이 시는 틈에 관한 시이다. 틈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은 미세한 균열이다. 틈은 균열의 결과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눈동자는 뒤에 빈 뜰을 감추고 있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는 눈의 구조를 염두에 둔 구절로 보이며, 시인이 ‘빈 뜰’이라고 한 부분은 유리체로 짐작된다. 눈은 수정체를 통과한 빛이 망막에 맺히는 구조로 되어 있고 수정체와 망막 사이의 공간이 바로 유리체이다. 유리체는 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이는 정확히는 틈이 아니라 빈 공간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그런 점에서 이를 빈틈이라고 하지 않고 ‘빈 뜰’이라고 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제목의 자장이 이 구절에 미치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 ‘빈 뜰’은 시인에게 틈의 다른 양상이 된다. 이러한 예는 반복된다. 시인에 의하면 ‘북’도 “제 몸을 비우고 있”으며 “울림은 비어 있는 곳에서 부푼다.” 북을 울리게 하는 것은 북 속의 “비어 있는 곳”이란 얘기이다. 이 빈 공간 또한 제목의 자장에서 예외가 아니라면 틈의 다른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틈을 균열의 결과로 보는 입장에선 빈공간을 틈의 양상으로 보는 견해는 수용되기 어렵다. 그럼 우리가 보는 틈은 무엇이란 말인가. 미리 그런 의문을 예상한 듯 장상관은 우리가 그동안 틈이라는 이름 아래 불러왔던 것을 ‘금’이라는 말로 구별한다. 시인에게 있어 ‘틈’은 “둘 사이 울림이 살아 있게 만드는 집이”지만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금”은 이 틈이 만들어내는 둘 사이의 “울림을 찢어 버린다.” “서로가 간절하지 않으면/떨어져 있는 거리보다 더 사이가 멀어진다/방과 방 사이에 만리장성이 쌓이고/발 디디는 곳마다 천길 벼랑이 나타난다”는 시인의 말은 이 금의 위험성에 대한 보충 설명이 된다.
이제 정리하자면 이렇다. 틈은 일반적으로 보자면 균열의 결과이다. 그러나 시인은 균열을 전제하게 되는 틈을 금이라는 말로 나누어 구별하고, 틈에선 균열이 아니라 균열의 결과로 생겨나는 빈 공간에 주목한다. 이렇게 했을 때의 덕목은 틈이 빈 공간이 갖는 가능성을 공유하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며 우리는 틈을 통하여 지금까지 막혀 있어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거나 아니면 틈을 울림의 공간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눈과 북은 그러한 가능성이 실제로 구현된 경우의 좋은 예이다. 그것은 곧 균열의 빈틈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세상이기도 하다. 시인이란 그런 사람이다. 빈 공간으로서의 틈에 주목하여 균열에 묶여 있던 세상을 새롭게 여는 사람이다.
균열의 일반적 인식을 넘어 틈의 가능성을 열어준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빈틈없는 자세는 싸울 때나 필요하다
—장상관, 「틈」(『문예바다』, 2016년 겨울호) 부분

시를 잘 읽어냈다고 생각한 나는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서 멈칫했다. 이거 혹시 내가 마치 시와 싸움이라도 하듯 시를 너무 빈틈없이 읽어낸 것은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때로 시인의 얘기는 좋기는 한데 내게선 실천까지 이어지지 못할 때가 있다.
장상관은 균열로서의 틈을 빈 공간으로서의 틈으로 뒤집는다. 틈이 가진 양상 가운데 다른 한 가지에 주목하여 그것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앞뒤를 뒤바꾸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몸에서 등은 뒤이고 가슴은 앞이다. 그러나 시의 세상에선 등이 오히려 앞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영주에게서 그런 세상을 본다.

우리가 등밖에 없는 존재라면 온 존재를 쓸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왜 등을 쓸어내리면서 영혼의 앞 같은 것을 상상할까
—이영주, 「교회에서」(『포지션』, 2016년 겨울호) 부분

제목이 말해주듯이 시인은 교회에 앉아 있다. 어느 곳에서나 그렇겠지만 교회에서도 맨앞에 앉지 않는 이상 앞 사람의 등이 보이게 되어 있다. 등은 등을 돌리다는 말과 결합될 수 있는 신체 부위이다. 그렇게 결합되면 등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회피한다는 느낌을 동반한다. 그런 경우 등은 상대를 품어주기보다 밀어낸다.
하지만 시의 세상에선 그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그 시작은 이영주의 등에 대한 전혀 다른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시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앞사람의 ‘구부린’ 자세이다. 시인은 그것을 “도형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자세라고 말한다. 그 도형은 시를 계속 읽어가면 ‘동그라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렇게 계속 등을 구부리고 있다가는 나중에 동그라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시인의 걱정이 투영된 결과이다. 등이 자꾸 구부러지는 것은 “형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 때문”이다. 나는 그 일을 수용할 수 없는 형식의 일들이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되면 이해에 마음을 내줄 수가 없다.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생긴다. 그리고 굽어진 등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힘겨운 삶을 읽어내자 “무너지는 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고, 들어가선 우리들이 “흩어지는 영혼 앞부분으로 번져 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말하자면 등이 앞으로 전환되거나 앞으로 가는 창구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등은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신체 부위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힘겨운 삶을 위로할 때 등을 도닥여주기 때문이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엎드린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등을 보면 쓸어 주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도 등이 갖는 그런 의미를 향하여 손을 뻗은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추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모르지만 뒤를 보고 있다”고. 사실은 시의 현장에선 모두가 등을 보고 앉아 있다. 하지만 시의 세상은 등을 통하여 뒤를 앞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병률에게는 아마도 어떤 질문이 던져졌는가 보다. 시의 구절로 짐작을 하자면 질문은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후”에 “제일로 가장 무엇 하나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시인에게 직접 던져진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방송 같은 곳에서 곧잘 그런 질문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는 그네의 다정함이라 하고/누구는 목소리일 것이라” 답한다.
질문은 대답을 요구한다. 가령 1 더하기 1은? 하고 물었다면 그 질문은 답으로 2를 요구한다. 물론 답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질문이 수학적 질문이 아니었다면 1 더하기 1을 묻는 질문의 1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1이 아니라 노동이나 사무로서의 일로 변환되기도 한다. 그럼 일 더하기 일의 대답은 일이 될 수 있고, 그때의 답에는 죽도록 일만해도 휴식은 없고 또 다시 일만해야 되는 망할 세상이란 설명이 따라 붙을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잠시 웃고 넘어가려 할 때는 그런 질문과 대답이 유효해진다. 어떤 경우이든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고, 아울러 질문은 대답을 일정한 경계 내로 규제하려 든다. 또 질문이 던져지면 우리는 암암리에 질문에 말려들어 어떻게든 답을 준비하려 든다.
그러나 이병률의 태도는 이와는 좀 다르다. 시인은 “나는 그것이 꼭 하나여야만 하느냐고 미련스러이 묻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에게도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을 그것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나에게 그것은 당신의 손바닥일 수 있으며
손바닥으로 나를 가려 만들어주던 그늘일 수도 있으며
언젠가 헤어질 줄을 몰라서 시간을 아끼지 않았던
그 그늘 아래 옹색한 졸음의 공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병률, 「무엇을 제일로」(『시와사상』, 2016년 겨울호) 부분

답은 해보지만 시인의 답은 손바닥은 손바닥으로 만들어준 그늘로, 그늘은 그늘 아래의 공기로 퍼져 나간다. 즉 질문은 질문이 요구하는 답의 세상으로 답을 축소하고 경계를 제한하기 마련인데 그와 정반대로 답이 그 경계를 확대하는 일이 벌어진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질문이 주어졌을 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보다 그 대답이 “꼭 하나여야만 하느냐고 미련스러이” 물으며 질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시인의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굳이 손가락에 꼽은 하나의 대답이 경계를 지우며 확대하게 된 계기가 되고 결국에는 존재 자체 전체를 대답으로 삼게 된다. 시를 마무리하며 시인이 “도저히 뺄 것 하나 없는 상대의 무엇 하나만을/어떻게 바란단 말인가”를 묻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문득 시인이란 질문이 상대의 하나를 요구할 때 그 질문에 의문을 품고 질문 자체가 요구하는 답의 경계를 넘어서 결국은 대상 전체에 이르는 것이 시인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승희의 시 속에선 학생과 선생이 마주 앉아 있다. 질문을 듣고 답을 하는 자리는 아니고 선생이 학생의 고민을 들어주는 자리이다. 학생은 어리고 선생은 그보다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더 먹은 나이는 폐단이 되기 쉽다. 젊은 세대나 어린 세대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 때가 많다는 것이 그러한 나이의 폐단 중 하나이다. 가령 이승희의 시에서처럼 젊은 세대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이는 경험을 앞세운 훈계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이승희의 시는 이러한 자리를 다른 양상으로 구성하고 있다.
상담실을 찾아온 학생은 “죽고 싶”다고 말하며 “최소한 자퇴라도 해야겠”다고 말한다. 보통 이런 경우 나이든 세대는 예전에는 학교 다니는 것도 어려워 가고 싶어도 못가는 것이 학교였는데 무슨 행복에 겨워 그런 소리를 하냐를 힐난을 상담의 답으로 내주기 쉽다. 그러나 학생의 선생은 “넌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게 있으니/정말 아름답구나”라며 학생의 고민을 긍정한다.
학생의 고민이 철없어 보일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다. 사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는 순간, 학생에 대한 상담은 미리 세상을 살아본 경험을 앞세운 훈계가 되기 쉽다. 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학생과 얘기를 하는 동안 “급식 지도 선생님이 운동장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것이 먹고 살아가는 일의 엄정함으로 보였다. 삶의 그 길은 다시 한번 반복된다.

운동장에 급식 지도 선생님이 지나간 길이 선명하다
—이승희, 「학교 생활 —상담실」(『문예바다』, 2016년 겨울호) 부분

그러나 시인은 끝까지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지 않는다. “날마다 벼랑이고 끝 같”다는 학생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삼키고 “그 끝을 그렇게 발랄하게 넘어갈 수 있”는 학생의 젊은 날을 아름답게 본다. “그런 슬픔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삶으로 젊은 삶을 재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앎으로 새로운 삶을 재단하지 않고 긍정하는 것이 나이의 가장 큰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이승희의 시에서 만난 세상이 바로 그 세상이다.
안숭범의 「비정규적 슬픔」에서 내가 제목을 보며 떠올린 것은 비정규직이었다. 하지만 시가 비정규직의 슬픔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시인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거실로 출근하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날들 동안”이란 구절이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시험을 치루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한때는 고시원에서 공부도 했었는가 보다. “고시원 끝 방에 두고 온 휴대폰”이란 구절이 그런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첫 직장의 약도”란 구절로 미루어 회사 경험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책은 ‘데리다’의 책 같다. 삶의 곤궁함 같은 것은 만져지지만 어디에서도 비정규직에 대한 실마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제목 때문인지 비정규직의 슬픔을 생각하며 시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비정규직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했다. 가령 시인이 “어머니는 유학도 보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말은 제목 때문인지 슬픔의 말로 읽혔다. 만약 그것이 슬픔의 말이었다면 어머니의 그 말이 주는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보자면 그 슬픔은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한데서 온 아쉬움이 연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슬픔이다. 하지만 그럴까. 한국에선 학교 보낸 것만으로도 아들에게 대단한 것을 해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왜 유학이 문제가 된 것이었을까. 혹시 아들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현실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경우에는 슬픔이 사회의 구조탓이 된다. 사회가 유학을 갔다 오지 않으면 사람을 교수로 쓰지 않는 완강한 구조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고, 그런 구조는 차별의 슬픔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슬픔은 개인적 차원을 떠나 구조적 슬픔이 된다.
비정규직의 슬픔도 비슷하다. 비정규직은 차별의 구조를 만든다. 동일한 일을 하고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차별의 구조는 억울함을 부르고 그 억울함은 적극적 양태로 나타나면 싸움을 가져오지만 일단 소극적 양태로 억압이 되면 슬픔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이미 지적했듯이 개인적 차원에 서 있질 않고 구조적 차원에 선다. 때로 슬픔 마저도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성격이 짙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개인탓을 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그 슬픔을 개인이 짊어진다. 비정규적 슬픔이란 무엇일까. 혹시 그것이 개인 차원의 슬픔이 아니라 원래는 구조적 차원의 슬픔인데 그것을 개인에게 떠넘긴 슬픔은 아닐까. 시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안방이 너무 멀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까, 바람의 정권이 겨울에서 실각하는 내일이 오면
—안숭범, 「비정규적 슬픔」(『시로 여는 세상』, 2016년 겨울호) 부분

“안방이 너무 멀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전화를 거는 시기는 개인적 차원에 서 있질 않다. “바람의 정권이 겨울에서 실각”할 때가 그때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바람 끝이 따뜻해지는 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정권이란 말이 갖는 사회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사회의 커다란 변화로 해석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방이 너무” 먼 개인적 차원의 슬픔이 사실은 사회의 완강한 차별 구조 탓일 수 있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바람의 정권이 겨울에서 실각하는 내일”은 개인이 지고 있던 슬픔의 짐과 해결을 사회가 지는 날이 될 것이다. 시의 세상에선 때로 개인이 짊어진 짐들이, 더 나아가 슬픔마저 사실은 사회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의가 제기된다.
때로 시에 전혀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는 내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어떤 이름들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서윤후의 시 「공범」도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공범은 사전적으로 보면 범행을 함께 모의하고 범한 자들이다. 시의 첫 구절은 “뜸해져요 우리/갈 길이 먼 사람들처럼 서로를 등한시해요”라고 말한다. 법망에 걸려 체포된 순간의 공범들이 공모 여부를 부정하고 있는 순간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때로 시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실속 아주 구체적인 사건의 범인들과 밀접하게 맞물려 이해될 때가 있다. 가령 이 첫 구절의 경우, 내가 떠올린 이름은 국정 농단의 공범으로 그 이름이 얽힌 박근혜와 최순실이었다. 한 때 검문도 없이 청와대를 드나들며 한몸이나 다름 없었던 최순실과 박근혜가 서로를 모르는 척 했던 순간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지 모른다.
공범들은 문득 깨닫기도 한다. 그들이 한 때 비밀을 공유하던 사이 같았으나 사실은 “비밀의 부연처럼 살고 있진 않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 순간 서로는 이제 비밀이 아니라 비밀에 덧붙여진 설명 같은 존재로 뒤바뀐다. 그 기분을 시인은 “석고상의 흰 눈알을 만지는 기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눈알 같지만 눈알이 아니다. 공범의 사이를 묶는 것은 믿음 같지만 시인은 “멀리 가려는 당신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듯한 공범들의 “투시력 같은” 것이 사실은 “믿음과 의심이 사랑할 때 생기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공법은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의심한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건에서 나온 그 수많은 녹음 파일들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몰래 녹음을 하고, 관계가 파탄났을 때에 대비한다.
알고 보면 공범들은 한 패거리란 사실을 숨기지만 사실은 잘 어울리는 공모자들이다. 시인은 그 점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오늘은 당신이
내게 참 잘 어울리는 날이었어요
—서윤후, 「공범」(『문학과사회』, 2016년 겨울호) 부분

시인이란 이런 면에서 보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사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임승유의 시 「문법」을 마지막 순서로 살펴본다. 시는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눈을 뜨니

풀밭이 펼쳐졌다 펼쳐지는 풀밭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다가 멈춘 것처럼 꽃이 있었다 예쁘다고 말하면 뭐가 더 있을 것처럼 예뻤다
—임승유, 「문법」(『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 부분

“눈을 뜨”면 보이는 세계는 시의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는 일차적으로는 사실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사실의 세계가 시인에게는 동시에 시의 세계로 전환될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자면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니 넓은 풀밭이 있었고, 그 풀밭이 끝나는 곳 즈음에 꽃이 하나 피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의 세계에서 풍경을 바라볼 때의 문법에 가깝다. 시의 문법은 그와는 좀 다르게 전개된다. 시의 문법이라고 현실을 뒤바꿀 수는 없다. 때문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계 자체는 똑같다. 하지만 그 세계의 묘사는 달라진다. 시인은 “풀밭이 펼쳐졌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일반적인 것이긴 하지만 창밖에 넓은 풀밭이 있다는 매우 사실적 표현에 비하면 풀밭에 운동감의 양상을 덧입힌 좀더 감각화된 표현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 정도의 표현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펼쳐진다는 말이 그렇게 창의적 표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개의 경우 이 운동감이 한번의 운동감으로 끝이 나지만 시의 세상이 다른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그 움직임 속으로 끌어들이는 또 한 번의 확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 확장된 시의 세상이 “펼쳐지는 풀밭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다가 멈춘 것처럼 꽃이 있었다”는 세상이다.
시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그 꽃밭을 바라본다. “뒤로 물러나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뒤로 물러나서 많이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때쯤 같이 사는 사람인 듯한 사람이 묻는다. “뭐가 있어?”라고. 눈을 뜨면 보이는 사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뭐가 있어?”가 묻는 질문 또한 사실의 세계에 대한 물음이다. 시인은 그 물음에 대해 “뭐가 있다고 하면 끝이 안 나는 풀밭이었다”고 말한다. 질문은 사실의 세계를 묻는데 사실의 세계에서 보자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다. 매일 보던 사실의 세계가 시의 세계로 전환된 것이 답이지만 질문이 묻고 있는 것은 그 세계가 아니다. 시인의 얘기는 뭐가 있다고 답하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문법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시인의 설명을 빌면 시인의 눈앞에 있는 풀밭은 “눈을 감으면/눈꺼풀 안쪽까지 따라오는 풀밭이었”으며, 그 풀밭에선 “빛이 부족해지면 풍경은 생기다 말았다는 듯 풀이 죽”고 있었다.
아마도 시인은 눈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언어는 그 시인을 두고 “그만해”라고 말한다. 시인은 그 말을 가리켜 “그런 말은 풀을 뜯어내고 남은 말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나는 풀을 뜯어내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풀이 뜯겨져 나간 풀밭이거나 뜯어낸 풀이다. 어느 경우에나 풀밭은 아니다. 시의 세상은 일반 세상과는 다른 문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 세상과 비교하면 일반 언어는 풀밭을 새로운 언어에 실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풀을 뜯어내고 남은 말”에 불과하다. 그 말을 고집하면 시의 세상에서 접하게 되는 풀밭을 영원히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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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이 얼마든지 달리 쓰일 수 있다. 가령 태양의 제국이란 말은 세계를 자국의 힘 아래 복속시키려 했던 패권주의의 야망을 가리킬 때가 있다. 하지만 같은 말을 과학자가 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그것은 태양계 내에서 태양이 차지하는 위치와 태양이 주변을 공전을 하고 있는 행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된다. 과학적 지식이 그러한 말을 뒷받침하게 됨은 물론이다. 이런 경우 나는 태양의 제국이란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전환되어 확장되는 세상을 경험한다.
시는 세계의 확장에서 비교적 크게 자유롭다. 아니 시가 한편 씌어질 때마다 세계가 그만큼 확장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읽는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얘기는 곧 시를 한 편 읽을 때마다 전환되고 확장된 세계를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된다. 아울러 그 세계는 우리 곁에서 피부에 체감되는 세상일 경우가 많다. 천문학자들의 얘기에 따르면 우주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하는데 시 또한 세상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2016년 계간지 겨울호의 시를 읽으며 나는 그 확장된 또다른 세상을 듣고 살 수 있었다.
(『문예바다』, 2017년 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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