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의 세상, 그리고 시의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7년 여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7년 여름호
『문예바다』 2017년 여름호

1
안다고 체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행기는 빠르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속도의 체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비행기 속도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고도를 구름 위로 확보하고 난 뒤, 가장 빠른 속도로 날고 있을 때, 그 속도는 잘 체감이 되지 않는다. 가장 빠른 순간에 비행기는 마치 기어가고 있는 듯한 가장 느린 속도로 체감된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구름은 아주 천천히 뒤로 밀린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게 체감 되는 것은 착륙하기 위하여 속도를 늦추고 공항의 건물들을 빠르게 뒤로 밀어내며 심한 마찰음과 함께 활주로를 미끌어질 때이다. 가장 느린 순간이나 그 순간에 우리의 몸에 체감되는 속도는 가장 빠르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사는 지구에선 아침과 저녁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하루의 시간을 구성한다. 과학은 그 하루의 반복을 지구가 일정한 자전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구가 돌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태양을 마주할 때 낮이 되고, 태양을 등지면 밤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은 전혀 체감 되지 않는다. 대신 해가 뜨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저녁이 된다. 우리의 체감 영역에선 지구가 돌지 않고 그렇게 해가 뜨고 해가 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감각의 한계 속에 속박되어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체감하고 지구의 자전을 체감하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비행기 속도는 앞좌석의 등받이에 있는 안내 스크린을 통하여 감지된다. 그 스크린에 현재의 비행기 속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행선지에 도착하는 시간으로 제주까지 빨리도 왔다는 것을 체감한다. 지구의 자전은 물론 과학 교육을 통해서 감지한다. 체감의 한계를 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또다른 차원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도 비슷한 특성이 있다. 눈으로 보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을 지각을 지각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한계이지만, 시는 그 한계에 속박되지 않고 시의 이름으로 또다른 지평을 확장한다. 시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는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체감의 한계 내에 속박되어 있던 세상을 벗어나 같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또다른 세상으로 이동한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체감의 한계 내에서 현실에 묶여 있으면서 시가 만들어내는 또다른 세상에 동시에 공존한다. 2017년 봄의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어가며 나는 시가 확장하는 그 또다른 세상을 체감할 것이다.

2
오은의 시로 시작해 본다. 시는 “얼굴이 여섯 개/영영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된다. 제목을 보지 않았다면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의 제목은 「벽돌」이다. 제목은 시의 첫구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벽돌은 대개 여섯 개의 면을 가진 직육면체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것이 현실에서 사람들이 접하는 벽돌의 형태이다. 시인은 그 각각의 면이 벽돌의 얼굴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벽돌을 이루고 있는 직사각형의 평면이 얼굴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에게서 직각으로 맞물린 사각의 평면이 얼굴로 전환이 된 것일까.
내가 상상한 것은 면이란 글자였다. 면(面)이란 한자는 평면과 얼굴이란 뜻을 동시에 갖는다. 평면의 면과 면상의 면은 한자로는 글자가 같다. 때문에 글자로만 보면 그것은 평면임과 동시에 얼굴이다. 아마도 시인은 면이란 글자가 갖는 중의적 의미 가운데서 얼굴을 취하여 여섯 개의 면을 가진 벽돌을 “얼굴이 여섯 개”인 물체로 전환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이유는 면은 코도 눈도 입도 없는 달걀 귀신과 같아서 면에게선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는 반면, 벽돌의 면이 벽돌의 얼굴이 되면 그 얼굴에선 어떤 얘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는 입이 있으니까.
그리하여 시인 덕택에 우리는 “얼굴 하나가 말”을 하는 세상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그 “얼굴 하나”는 “나는 너 때문에 각도가 생겼어 모서리가 됐어 너 때문에 부피가 생겼어”라고 말하고 있다. 얼굴의 얘기는 직사각형의 평면이 직각으로 맞물리고 서로 접한 모서리를 공유하면서 일정한 체적의 벽돌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너 때문에”라는 얘기는 벽돌이 된 것이 탐탁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왜 일까? 나는 그것을 벽돌이 되면서 얼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면일 때는 얼굴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 얼굴 여섯 개가 맞물려 벽돌이 되고 나면 벽돌만 남고 얼굴은 사라진다. 누가 벽돌의 면에서 얼굴을 상상하겠는가.
얼굴의 벽돌이 면의 벽돌이 되고 나면, 그리하여 얼굴을 잃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부터 벽돌에선 얼굴은 보이지 않고 그것의 용도만 보이게 된다. 벽돌의 용도는 누군가를 향해 “그것을 던지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여러 개의 벽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드는 것이 주된 용도이다. 시인은 “얼굴이 여섯 개/얼굴 위로 다른 얼굴이/얼굴 옆으로 다른 얼굴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벽이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집단의 일원이 된다. 혹시 우리도 집단의 일원이 될 때, 그리고 그 집단이 이익 추구를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집단일 때는 더더욱 우리 또한 우리의 얼굴을 잃고 그 집단의 구조 속에서 오직 우리의 용도로만 평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그림자는 깔려 죽으면서 태어났다
—오은, 「벽돌」 (『포지션』, 2017년 봄호) 부분

얼굴은 우리의 신체 부위에서 서로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정체성의 부위이다. 시인은 처음에는 “얼굴을 하나 가질 때마다 그림자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굴이 벽돌을 이루고, 그 벽돌이 쌓여 벽을 이루었을 때, 벽만 남고 모든 얼굴은 얼굴을 잃는다. 벽밑의 그림자는 집단의 이름 아래 잃어버린 우리들 얼굴이 남긴 흔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단에 짓눌려 죽으면서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오은이 벽돌을 통하여 집단의 일원이 되면서 얼굴을 잃게 되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고 있다면 이원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얼굴의 상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얼굴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 버렸을지 모른다”는 말로 시작된다. 시인은 얼굴을 잃어버린 시점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둠 속 어둠이 얼굴들을 먹어 치우는 새벽 직전에 어쩌면 어느 순간 구겨서 너의 얼굴에 넣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는 새벽 직전이었고, 어둠 속 어둠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두워도 상당히 어두웠던 순간이다. 그때 시인은 자신의 얼굴을 구겨 너의 얼굴에 집어넣으면서 얼굴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 ‘너’는 시인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다. 이제는“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다. 살다보면 돌아오지 않을 죽은 사람에게 내 얼굴을 넣어서 보내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더더욱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얼굴이란 우리 자신의 얼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 우리의 얼굴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관계가 사랑으로 맺어진 개인적 관계일 때는 더더욱 그렇게 된다. 그런 경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내 얼굴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삶은 “얼굴이 없는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하는 기시감”의 삶이 되어 버린다.

무례는 내가 내 얼굴에게 벌인 일 나는 나도 모르는 인물 나는 내가 모르는 인물 갑자기 울음이 터질 때 세상이 밝았다 어쩌면 이때 버렸다
—이원, 「어쩌면 버렸다」(『작가세계』, 2017년 봄호) 부분

그것은 내 얼굴에 대한 무례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상실이 크면 그렇게 된다.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내 얼굴마저 잃는다. 아마도 반쪽의 상실감이 너무 커서 남아있는 내 얼굴의 반쪽마저 버리고 나를 텅비워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임경섭의 시 「서막」이 서 있는 시의 무대는 남미이다. 시의 어디에도 남미의 구체적 지명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를 짐작하게 되는 것은 ‘세미까마’란 말 때문이다. 남미에서 일반좌석버스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시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한 명은 ‘곤’이고, 다른 둘은 ‘쇼코’와 ‘무츠키’이다. 쇼코는 무츠키의 ‘아내’이다. 곤은 무츠키에게 묻는다. “왜 쇼코의 배낭을 들어주는 거야?”라고. “들어준 게 아니라 받아준 것이었지만 무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시는 전한다. 곤은 또 묻는다. “너는 네 여행을 온 거야, 쇼코의 여행을 온 거야?” 시는 이번 상황 또한 “아내가 만족하면 자신도 흡족할 공동의 여행자라 생각했지만 무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곤은 다음에는 묻지 않고 무츠키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배려가 존재하는 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라고. 이 주장에 대해 시는 “자신은 마음 가는 대로 아내를 도울 것이며 늙고 지치더라도 언제까지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할 것이라 다짐했지만 무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둘의 대화를 듣는 쇼코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 시는 마무리된다.

그들 바로 앞 좌석의 쇼코는 눈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 않았다 대답 없는 무츠키 때문에 쇼코는 잠들지 않았다
—임경섭, 「서막」(『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부분

“눈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 않았다”고 했으니 쇼코가 사실은 다 듣고 있었다는 얘기이며, 그것이 “대답 없는 무츠키 때문”이었다고 했으니 쇼코는 무츠키의 대답 없는 태도가 불만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시의 제목은 「서막」이다. 시작이란 뜻이므로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둘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곤의 이의 제기가 없었다면 당연했던 습관이었을 것이다. 이의 제기가 있었어도 무츠키가 대답만 했다면 쇼코의 잠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대답이 둘의 사랑을 감싸는데 아무 무리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시는 사랑이 둘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사랑은 때로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이의를 제기하고 그 이의 앞에서 대답을 찾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고 시가 이의를 제기한다.
사려니숲길은 제주에 있다. 제주의 유명한 걷기 코스 중 하나이다. 당연히 풍광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오광석의 「사려니숲길」에서 만나는 풍광은 이런 기대를 빗나간다.

칼날들이 떨어진다
불타는 칼날들이 대지를 태운다
타오르는 대지를 가로질러
숲으로 가는 길
붉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광석, 「사려니숲길」(『문예바다』, 2017년 봄호) 부분

떨어지는 것은 낙엽이니 아마도 시인이 ‘칼날’이라고 한 것은 낙엽일 것이다. “불타는 칼날”이라고 했으니 붉게 물든 단풍잎일 것이다. 그러니 시인의 눈에 단풍잎이 칼날로 보인 것이다. 금방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때로 어떤 시는 이해를 위하여 오늘을 버리고 과거로 가야할 때가 있다. 오광석의 「사려니숲길」에서도 그렇다. 이 숲길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이해는 과거로 가는데 도움이 된다. 이 숲길에서 가까운 곳에 4.3평화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4.3사건으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4.3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무장 폭동에 나선 남로당원들을 토벌한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제주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범죄 행위를 일컫는다. 시인이 걸어가는 「사려니숲길」은 바로 그 시절, 진압군의 총탄을 피해 이 길을 걸어 숲으로 숨었던 제주 사람들이 걸어간 길이다. 시인은 이 길에선 “떨어진 칼날들 위로 웃음소리가/토벌군마냥 덮친다”고 한다. 오늘 사람들이 떨어진 단풍잎을 밟고 그 길을 걸으며 웃을 때, 그 웃음소리가 토벌꾼마냥 그 길을 덮친다는 얘기이다. 시인이 그 길을 걷는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곤소곤 귀엣소리가/나무 사이로 들”리면서 길이 숨을 죽이는 것도 이 시의 시간대가 멀리 4.3의 과거로 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 모두가 오늘을 걸을 때 시인은 과거를 걸으며, 그때면 우리도 과거로 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시가 체감이 된다.
때로 과거로 가야 시인이 걷던 길이 보이듯이 어떤 해안은 단순히 바닷가라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다. 이하석이 전하는 해안 풍경이 그렇다. 그 해안은 맘대로 바닷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물과 바다로 맞구멍이 뚫린 시선들을/촘촘히 거르는 초소”들이 바다로 가려는 시선을 막기 때문이다. 아마도 휴전선과 가까운 곳의 바다일 것이다. 시인은 그곳을 가리켜 “책임감이 강한 철책이 나 있어서/굳은 바다와 무른 땅을 구획 짓는”는 곳이라고 말한다. 책임감이 강하니 철책은 사람들을 바다로 잘 내보내지 않으려 들 것이다. 원래 “굳은 바다”란 없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현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투영되면 바다가 굳게 보일 수 있다. 그곳에선 차라리 땅이 더 무르다. 땅에 그 분단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 멘 어깨 너머로
어떤 분단으로도 찢어질 수 없는
밤바다 파도의 달력이 꽤 구겨져 있다
—이하석, 「해안」(『문예바다』, 2017년 봄호) 부분

시인의 전언을 받아들이면 “밤바다 파도”는 시간을 실어나르는 달력이 된다. 시인의 눈에 파도는 구겨져 있다. 그러나 찢어져 있지는 않다. 분단도 찢어낼 수 없는 세월을 싣고 파도가 친다. 바닷가에서 바다가 아니라 여전한 분단의 현실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인이지만 동시에 “어떤 분단으로도 찢어질 수 없는/밤바다 파도”에 실어 그 분단의 현실이 하나되는 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도 시인이다.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만 포구”에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찾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황동규가 전하는 그런 포구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정작 삶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풍경은 그곳에 있다.

아침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조그만 고깃배들이 아침을 데리고 온다.
어떤 날은 버스가 안 들어오고
파도가 파도를 무동 타고 방파제를 넘기도 한다.
공중에 뛰어올라 빛나는 물고기도 있다.
속으로 소리친다.
떨어지기 전 방파제 끝에 세워논
액막이 제웅 같은 인간을 내려다보게.
그리곤 공중 맛을 본 몸뚱어리를
타악! 삶의 현장 한가운데를 향해 내려꽂게.
—황동규, 「조그만 포구」(『문학동네』, 2017년 봄호) 부분

시인은 사는 사람이 점점 줄어 조그만 포구가 된 어촌 마을을 “삶의 폭 점점 졸아들다/조그만 포구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접하는 것은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지만 시는 그곳에서 “삶의 폭”이 “점점 졸아”든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그 마을에선 가을에 뒷산에 단풍이 드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면 단풍이 뒷산을 듬성듬성 색칠”한다. 아침은 “조그만 고깃배들이” 데려다 준다. 또 “파도가 파도를 무동 타고 방파제를 넘기도 한다”고 했으니 그곳은 파도가 치는 곳이 아니라 파도가 방파제를 따라 아이들처럼 노는 곳이다. 정작 우리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조그만 포구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제니의 시 「가장 나중의 목소리」를 살펴본다. 아마도 시인은 점자를 읽고 있는 나이든 노파를 보았나 보다. 시인의 눈에 점자를 읽는다는 것은 손끝으로 목소리를 부르는 행위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점자를 읽는 사람의 손끝은 조용했지만 그 손끝이 점자를 더듬을 때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시의 내용이 아니다.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소녀의 손가락. 소녀는 늙어가고 점자는 흐려진다. 손가락. 닳아가는 손가락. 손가락은 듣는다. 얼룩과 눈물. 숨결과 속삭임. 선과 선을 그리는 원과 원을 따라가는. 간격과 간격 사이에서. 흔적과 흔적 너머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희미한 몸짓. 들려온다. 목소리. 닳아가는 것.
—이제니, 「가장 나중의 목소리」(『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부분

정상적이라면 목소리를 부른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목소리”와 “부른다”를 나누고 순서도 뒤바꾼다. 또 둘의 사이에 마침표를 찍어 둘의 사이를 분절해둔다. 이러한 시인의 표현 방식은 시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나는 이러한 표현 방식이 점자를 읽는 노파의 손가락 끝을 그대로 옮겨온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때문에 우리는 눈으로 읽어도 이 시에선 노파와 마찬가지로 글자를 더듬게 된다. 말하자면 눈끝에서 손끝을 체험하게 된다. 점자를 읽는 노파의 손끝을 체험하기는 쉽지가 않다. 대다수의 우리는 점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점자를 더듬어 본다고 해도 도돌도돌한 감촉만 있을 뿐, 그 점자를 문자로 읽어간 손끝의 느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니의 시는 눈끝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시의 세상에선 때로 눈끝에서 손끝마저 체험할 수 있다.

3
읽은 시들을 다시 정리해 본다. 굳고 단단한 벽돌에 시를 들이밀 구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면이란 말이 갖는 이중의 의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벽돌에게 말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슬픔을 생각하지만 때로 그 슬픔으로 인하여 얼굴까지 잃을 수 있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란 것을 보여주는 것도 시인이다. 사랑은 둘의 문제인 것으로 알았는데, 때로 그 사랑이 전세계인이 함께 이의를 제기하고 고민해볼 문제일 수 있다고 슬쩍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시인이다. 시인은 오늘의 숲길을 과거의 시간대로 걸으며 슬픈 영혼을 위로하고, 바닷가의 초소에서 여전히 분단된 현실을 보다가도 파도에 실어 찢어진 그 현실이 이어질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작은 포구가 사람들이 흔히 찾는 관광지보다 더 볼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도 시인이며, 눈끝을 손끝 삼아 점자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독특한 체험의 텍스트를 내미는 것도 시인이다. 2017년 봄호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다시 깨닫게 된다. 시를 읽으면 그 자리에 우리들이 현실에서 체감하지 못하는 또다른 세상이 있다. 언제나 예외가 없는 시의 미덕이다.
(『문예바다』, 2017년 여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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