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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숙여져 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말함이다. 열차를 타고 난 뒤에도 사람들의 자세는 바뀌지 않는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 거의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서 있는 사람들의 자세도 예외가 아니다. 스마트폰이 바꾸어 놓은 세상의 풍경이다.
하지만 정말 스마트폰이 세상을 바꾸어 놓은 것일까. 나는 스마트폰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견해에 반만 동의가 되고 반은 동의가 되질 않는다. 동의가 되는 반은 스마트폰이 바꾸어놓은 관계의 양상이다. 관계의 양상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SNS이다. 컴퓨터에서도 SNS가 가능하긴 하지만 SNS는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크게 확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아무리 얘기를 나눌 사람이 그립다고 해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나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냐고 말을 건넬 수는 없다. 그러나 SNS는 친구 맺기라는 양식을 통하여 그러한 관계를 스스럼없이 구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는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로 보인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그런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스마트폰의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는 그것으로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일 때가 있다. 스마트폰이 메모지의 구실을 하는 경우이다. 이제는 메모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메모지와 펜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스마트폰이 얼마든지 그것을 대신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 내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으로 글쓰기를 한다고 하여 글쓰기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에 쓴다고 노트에 연필로 적어가던 시절의 쓰기와는 쓰기의 양상이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편리해 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쓰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점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변화의 근본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어떤 편리한 세상이 와도 기계 문명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사실 변화라고 할 수가 없다. 즉 근본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스마트폰은 글쓰기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세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하지만 어떤 측면에선 사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와 다른 예가 있다. 이번에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근본적으로 바뀐 경우이다. 조선시대를 말할 때의 유머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조선시대에 서양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고 있는 것을 본 양반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저렇게 힘든 일이면 하인들을 시킬 것이지.” 지금은 테니스 치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테니스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은 똑같다. 그러나 하인에게 시킬 힘든 일과 운동을 구별하게 된 시대는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아무 것도 바뀐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스마트폰과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유를 구하자면 시는 후자에 가깝다. 세상을 그대로 두고 세상을 바꾼다. 2017년 여름호의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어가며 시가 바꿔놓은 세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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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느린 속도가 달리기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전환될 수 있을까. 가령 꽃이 자라는 속도는 눈에 감지가 안될 정도로 느리다. 그런데 그 느린 속도가 달리기 정도의 속도로 전환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시의 세상에선 그런 일이 벌어진다. 정한아가 “꽃들은 태양을 향해 달린다”고 말할 때의 세상이 그런 세상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눈에 띄지 않을 때에만” 그렇고 “아주 조금씩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면서/개망초 꽃이 피었습니다, 하면서 애기똥풀 꽃이 피었습니다,/하면서 잔디 꽃이 피, 피, 피, 피, 피었습니다, 하면서” 그렇다고 한다. 잔디 꽃의 경우엔 “피, 피, 피, 피, 피었습니다, 하면서” 달린다고 한 것을 보면 잔디 꽃은 아무래도 하나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 여럿이 함께 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잔디꽃은 잔디에서 피는 꽃이 아니라 꽃잔디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꽃들이 태양을 향해 달리는 시의 세상은 사실은 우리들이 현실에서의 실질적 경험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에겐 몽우리 잡힌 것을 본 것이 지난 주 같은데 꽃핀 것을 보고 놀라 벌써, 꽃이 피었다는 말로 반응할 때가 있다. 그 순간 꽃은 갑자기 다가선 빠른 속도로 우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눈에 감지되지도 않는 느린 속도가 만들어낸 빠름에 놀랄 때가 있다. 느림의 빠름이다. 시인이 말한 세상을 사실은 우리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세상이 우리의 체험을 통해 공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속도를 부추기는 세상이다. 느린 속도는 미덕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미덕이 되는 것은 빠른 속도이다. 그러나 시의 세상은 현실의 미덕을 그 세상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속도의 경쟁 속에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세상에선 전혀 다른 차원의 속도가 펼쳐진다. 꽃이 피는 속도가 달리기의 속도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는 빨라야 속도가 감지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너무 빠르면 속도는 감지 되질 않는다. 감지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속도가 달리기의 속도가 되는 그 느린 속도의 세상에선 “눈을 감으면 시간이/살갗에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꽃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려준다. 코스모스가 가을을 알려주는 식이다. 때문에 꽃의 느린 속도에 눈뜨면 “시간이/살갗에 스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세상에선 속도에 쳐지면 패배자가 되어 쓰러지지만 꽃의 느린 세상에선 그런 일은 없다. 그 세상의 달리기는 지치거나 쓰러짐이 없는 달리기의 세상이다.
…(전략)너무 느려서
지칠 수 없는 달리기 너무 은근해서
쓰러질 리 없는 달리기
—정한아, 「꽃들의 달리기, 또는 사랑의 음식은 사랑이니까」(『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부분
꽃들은 죽고 사라지는 것 같아도 내년에는 또 꽃을 피울 것이다. “죽음을 뚫고 사라짐을 뚫고 이 차원과 저 차원을/통과하여” 달리는 세상이 꽃의 세상이다. 느리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도 않는 세상, 그것이 시의 세상에서 마주한 꽃의 세상이다. 시인이 바꿔놓은 세상이기도 하다.
백복현은 “여름 숲은 그늘로 촘촘하다”고 말한다. 사실 촘촘한 것은 그늘이 아니라 그늘을 만들어내는 나무의 잎이다. 여름숲의 잎은 잎과 잎이 겹칠 정도로 잎들이 촘촘하다. “그늘로 촘촘하다”는 것은 잎과 잎이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여름숲의 진한 그늘을 일컬은 것이리라. “내 그늘이 네 그늘과 포개져서/한층 짙어진 잎새”라는 말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친절한 설명 같이 들린다. 잎이 무성해지면서 잎의 그림자가 다른 잎에 포개지는 상황이 그려진다. 그늘은 그늘에 그늘을 보태도 그 그늘이 겹치면서 그늘이 늘어나는 일은 없다. 여름숲에선 “그늘 하나에 다른 하나를 더해도/여전한 길이의 팔과 다리”가 되고, “자라지 않는 그늘의 팔다리는 길을 잃은 채/출구를 찾지 못하고 제자리”를 지킨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모두 공감이 되는 얘기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여름 숲의 그늘에 대하여 뜻밖의 얘기를 한다.
빛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빛이
한 겹 그늘로 변했다
—백복현, 「그늘의 숲」(『문예바다』, 2017년 여름호) 부분
그늘은 빛이 없는 자리이다. 그런 그늘에서 빛을 보았다면 시인이 우리가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실마리는 인용된 구절의 바로 앞쪽에 있다. 백복현은 “언덕도 습지도 같은 높낮이로 평등해지는 곳”이 그늘이며, “그곳에선 과거도, 미래도 같은 두께로 채색된 채,/움직임 없는 홑겹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그늘에서 높이의 차이나 시간의 차이가 가져오는 불평등이 제거되는 평등의 지대를 본 것이다. 일반적인 비유에선 불평등이 그늘이지만 시인은 그 그늘에서 평등의 지대를 보았다. 그늘에서 너무 많은 빛을 볼 수 있었던 연유일 것이다.
도시는 익명의 세상이다.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데 아는 얼굴을 찾기는 어렵다. 온통 모르는 얼굴들 뿐이다. 다른 집의 숟가락 숫자까지 꿰차고 살아간다는 농촌 마을은 도시와는 정반대의 공동체이다. 온통 아는 얼굴들이고, 혹 모르는 얼굴이 나타났다면 외지인일 가능성이 크다. 도시와 농촌의 이 이분법 속에서 도시는 군중 속의 고립 지대가 되고 농촌은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는 따뜻한 곳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도 도시는 살만한 곳이 못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곳은 농촌이 된다. 오랫 동안 이 도식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김나영은 그가 나에게 “뒤통수를 내어”주고 “나도 내 뒤통수를 깃털처럼” 뒷사람에게 내어준다는 말로 우리 모두가 익명의 존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삶을 시사한다. 세상에는 뒤통수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뒤통수를 얼굴로 사용하는 사이”라는 시인의 말은 얼굴을 봐도 뒤통수와 마찬가지로 서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이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도시란 말로 들린다. 도시란 그런 곳이다. 하지만 시는 도시가 군중 속의 고립으로 이어지는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는 익명의 지역이어서 좋은 곳이 된다.
어떤 좌석에 앉아서 굵고 짧은 잠에 빠져들 때
입을 벌리고 자도 보자마자 잊혀지니까
평화롭지 정면이나 측면이나 측백나무처럼
한결같이 동일하지 지루해도 숨통이 트이지
내 뒤통수와 모르는 사람의 뒤통수가 격하게 맞댄 적이 있다
내 등뼈와 모르는 사람의 등뼈가 최단거리에서 밀착된 적 있다
내 엉덩이와 모르는 사람의 엉덩이가 물컹하게 겹친 적 있다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나도 뒤끝이 없지 포스트잇처럼
—김나영, 「모르는 사람」(『포지션』, 2017년 여름호) 부분
김나영에게선 아는 사이가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모르는 사이는 그 불편을 지워준다. “서정과 서사가 끼어들지 않아서 깔끔하”고 “서로 표정을 갈아 끼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하”는데 무리가 없다. 서정은 상대에 대한 마음일 것이며, 서사는 상대와 나의 이야기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어야할 순간은 없을 것이며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순간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도시는 군중 속에 고립되어 있어 외로운 곳이 아니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또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뒤끝’없이 살만한 곳이다. 도시에 대한 도식은 김나영의 시 속에선 바뀌어 있다. 삶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기도 하다.
김명철의 「여기」에서 여기는 식당 안이다. 그는 여기에서 지금 우동을 먹고 있다. 혼자 먹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식당에는 야구 중계가 한창인 ‘텔레비젼’이 있고 그 아래에서 “혼자 우동을 먹고 있”는 “키 작은 노인”이 함께 있다. 그런데 우동을 먹고 있는 노인의 움직임이 원활하질 못하다. 먹다가 자꾸 우동 가락을 다시 그릇 속으로 흘리고 있다. “노인의 젓가락에 걸린 면발”이 “그릇 속으로 다시/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구절에서 그런 노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늙으면 음식을 먹다 말고 자꾸 흘리게 된다. 대부분은 더럽다고 느낀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질 않다. 김명철은 이렇게 말한다.
노인의 식사는 아름답다
—김명철, 「여기」(『문예바다』, 2017년 여름호) 부분
늙어서 음식을 흘리는 노인의 식사가 아름다울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늙으면 그런 이유로 사람이 추해진다고 말한다. 흘리는 사람은 누가 볼까 주눅이 든다. 그래서 시인은 가급적 노인을 보지 않으려 한다. 노인이 주눅드는 일이 없도록 해주려는 시인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내 눈이 나를 기웃거리기 시작한다”는 구절은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피하기 위하여 노인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순간의 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은 노인의 그러한 사정과 상황을 알면서도 노인의 식사를 아름답다고 했다. 어떻게 노인의 식사는 아름다워질 수 있었을까.
시는 노인의 식사가 시인의 눈에 아름다운 장면으로 전환된 계기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 계기는 노인의 머리맡에 놓인 텔레비전 속의 야구 중계이다. 그 중계 속에서 시인은 계속되고 있는 “1번 타자의 파울 타구”를 보았다. 시인에겐 노인이 흘린 우동의 면발이 야구의 파울 타구이다. 파울 타구는 비록 안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럽거나 추하진 않다. 심지어 텔레비전에선 “해설가가 파울을 날린 스윙을 아름답다고 평”하기까지 한다. 제대로 입에 넣지 못하고 흘린 우동 가락은 그래서 아름다운 파울 타구가 된다. 시는 “저 너머로 파울볼 하나가 날아간다”는 구절로 마무리되고 있다. 나는 이번에는 노인이 좀 긴 우동 가락을 흘렸나 보다고 생각했다. 시의 세상에선 파울이 안타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 파울에는 통상 안타까움도 따라붙게 마련인데 노인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껴진다. 시가 바꿔놓은 세상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양함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수는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공존해야 한다. 이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면 우리는 다수가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를 비판하게 되고, 그때면 다수의 논리가 숫자상의 많고 적음에 불과하지 그것 자체가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예를 들어 손가락 다섯 개가 정상이란 것은 그런 예가 많다는 뜻이지 손가락 다섯 개가 근본적으로 정상이라는 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육손이 더 많다면 그때는 육손이 정상이 되고 다섯 손가락은 비정상이 될 것이란 가정을 답으로 내놓곤 한다.
고은강의 답은 좀 다르다. 그는 다수가 소수와 공존하지 않는 사회는 서로에게 불행이라고 말한다. 시로 쓰여진 그의 답은 우화의 형태를 빌고 있다. 그 우화 속에선 “원숭이 한 마리”가 “풍랑을 만”나 “낯선 섬에 표류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은 원숭이들의 섬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섬의 원숭이들은 모두가 눈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병신,
표류한 원숭이는 섬의 원숭이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병신,
외눈 원숭이들은 섬으로 흘러들어온
낯선 두 눈 원숭이를 보며 그렇게 조롱했다
—고은강, 「원숭이 한 마리 있었다」(『시로 여는 세상』, 2017년 여름호) 부분
시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존하지 않으면 둘 다 병신된다는 것이다. 다수도 병신이 되고 소수도 병신이 된다. 고은강은 이것이 원숭이의 우화를 빌리고 있지만 사실은 “어리석고 참담한 우리들의 이야기/무섭고 슬픈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란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우리는 공존해야 한다. 서로 병신으로 살지 않고 함께 정상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다수의 이름으로 “생의 어디쯤에 표류해있는/병신”으로 살고 있다. 소수를 정상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가난하면 비루해지기 쉽다. 생활의 가난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집이다. 거주 공간은 그 크기로 비교가 되면서 빈부의 차이를 눈에 띄게 서열화한다. 아파트는 더더욱 그렇다. 집을 말할 때는 평수라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비교 단위가 있고, 평수는 집의 크기를 지칭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집을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으로 나누며, 그러한 분류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해내는 주거 유형이 아파트이다. 때문에 우리는 집에 살면서 동시에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으로 분류되기 일쑤이다.
문성해의 시에서도 그렇게 분류될 수 있는 방의 크기가 보인다. 시인은 ‘다섯 평’이라고 했다. 현실에 많이 어두운 나는 다섯 평이란 수치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를 정확하게 짐작하질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넓지 않은 크기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시의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가난으로 분류될 그 집에서 시인이 ‘거룩’함을 길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집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집이 그 집의 생활을 비루함 속으로 몰아넣지 못하는 것은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덕택이다. 우선 작은 방에서 시인의 아이들로 짐작되는 “갈비뼈를 긁어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며 시인은 “지붕을 이루고 사는” 자신의 생활로부터 ‘대견’을 길어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들은 자고 있는 것만 보아도 대견할 때가 많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이란 말로 미루어 집은 부실하기까지 한 듯하다. 그러나 부실함이 빚어낼 가난 또한 시인의 생활을 비루함으로 몰아넣지 못한다. 시인은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고 흩어졌다가/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자신의 생활에서 어떤 ‘거룩’함을 길어올린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은 통장 잔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통장 잔고가 자주 “바닥 날 듯 바닥 날 듯”하고 있다는 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바닥 날 듯 바닥 날 듯”하면서도 다시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를 두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의 힘겨움을 말하기보다 ‘신기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생활의 신기함에는 자신보다 몸짓이 커가는 아이들의 성장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을 생활이 주는 신기함의 목록에서 빠뜨리지 않는다. 신기함은 집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몇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두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오렌지마트”도 시인의 생활이 그에게 건넨 신기함의 목록에 들어있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이제 생활은 거룩이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문성해, 「나의 거룩」(『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부분
집의 누추함은 우리의 생활까지 번지기 쉽다. 그러나 집은 누추해도 생활은 누추할 수 없다. 이는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누추한 곳에 핀 꽃과 부유한 아파트에 핀 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간의 누추함과 부유는 꽃의 삶을 전혀 누추함이나 부유로 갈라놓지 못한다. 그것을 알면 집의 누추함은 생활의 거룩을 넘보지 못한다. 시인이 그것을 본 것이 분명하다.
문성해의 시가 갖는 또다른 미덕은 시인이 생활의 거룩함을 가짐으로써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거룩함을 나누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안겨준 것은 딸이었다. 어느 날 강남역의 한 화장실에서 여성 혐오로 인한 살인 사건이 났을 때, 나는 남녀공용 화장실 때문에 저런 일이 생기니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을 더 많이 갖추어야 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딸은 의견을 달리했다. 이런 문제는 화장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다른 트랜스젠더 중에는 겉은 남자이지만 속은 여자인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런 경우 무의식적으로 여자 화장실을 들어가는 경우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여자들이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때 트랜스젠더들은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남여공용의 화장실은 그런 트랜스젠더도 상처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내가 위험하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던 공간이 누구에게는 상처받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딸은 남녀공용의 화장실 자체는 아무 죄가 없으며 문제는 여성 혐오적 시각으로 성장을 한 살인자에 있다고 했다. 딸은 다 크고도 체구가 작아 체구는 나를 넘어서질 못했다. 그러나 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딸이 나보다 인식의 지평이 더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뿌듯하고 신기한 순간이었다. 아마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풀어 시인의 체구를 넘어서는 아이들을 보며 신기해 했던 시인의 순간도 그러했지 않았을까 싶었다. 시인이 시를 써 자신의 생활을 거룩하게 바꿀 때 생활 속의 거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삶 또한 거룩하게 바뀐다. 시인은 시로 자신의 삶을 바꾸면서 시를 읽는 다른 이들의 삶도 함께 바꿔준다.
마지막으로 읽어볼 시는 박상순의 시를 골랐다. 그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의미를 해명하는 기존 방식으로 시를 읽으려고 하면 첫 연부터 막힐 때가 많다. 지금까지 언급한 시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경을 통하여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었지만 박상순의 시는 그 방식으로는 잘 읽히질 않는다. 그렇다면 박상순의 경우에는 시를 읽는 방식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박상순의 시 「어젯밤 네가 사온 토마토」는 “푸른 의자 두 개/붉은 의자 두 개”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계속 반복되어 시 속에서 네 번이나 등장한다. 이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는 읽어봐도 짐작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고 용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보고 싶다. 의자의 용도는 앉는데 있다. 시인이 의자를 내밀면 그 의자에 앉으면 된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부터 어떤 시 얘기를 할텐데 한번 앉아서 들어보겠어요라는 제안으로 이 구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자가 네 개나 되니 여유있게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어젯밤 네가 사온 토마토」라는 구절도 시 속에선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이 구절도 용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읽으면 제목은 혹시 어젯밤에 사온 토마토라도 있다면 그거라도 드시면서 이번 시 얘기를 들어도 돼요라는 제안이 된다. 해명되지 않는 제목과 네 번에 걸쳐 반복되는 똑같은 구절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나머지 구절은 어느 정도 읽어갈 수 있다. 첫 구절은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 계단을 오른다. 길을 건넌다./책을 든. 물병을 든. 꽃잎을 닮은 사람/길을 건넌다./햇빛 속에서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친다”고 되어 있다. 이제 어려운 구석은 없다. 지하철에서 내린 한 사람이 있고, 그가 계단을 올라 길을 건너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는 한 손에는 책을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물병을 들었으며, 생긴 모습은 꽃잎을 닮았다. 나는 그가 곱상한 용모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햇빛 속에서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친다”는 구절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지만 쉽게 가보기로 하자. 만약 정말 그런 장면이 펼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찬란하지 않을까. 그러니 그 날이 햇볕이 눈부시도록 찬란한 날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마지막에 다시 반복되지만 그 반복이 갖는 의미를 말하기에 앞서 이 구절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터널을 가진 책이 따라 나왔다.
깊은 연못을 가진 물병이 따라 나왔다.
구멍난 꽃잎이 따라 나왔다.
—박상순, 「어젯밤 네가 사온 토마토」(『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 부분
우리는 “터널을 가진 책”이, “깊은 연못을 가진 물병”이, 또 “구멍난 꽃잎”이 이전 구절에서 보았던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이 들고 있던 책과 물병이며, 그의 모습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터널’은 그가 들고 있었던 ‘책’의 사연이 될 것이며, ‘깊은 연못’ 또한 그가 들고 있었던 ‘물병’의 사연이 될 것이다. “구멍난 꽃잎”이라고 했으니 꽃잎처럼 곱상하게 보여 상처하나 없이 살았을 듯 보이는 그에게도 어떤 상처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오직 그만이 알 수가 있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처음에 우리가 목도했던 그는 겉모습으로 판단한 그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한 그에게는 우리의 시선이 그에게 겹쳐있다. 그가 들고 있는 책 하나에도 사연이 있고, 물병 하나에도 그만의 사연이 있는 그이지만 그는 우리에게선 우리의 시선에 갇혀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데 시는 우리가 바라보던 그에게서 자신을 빼내고 있는 그를 보여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자주 타인의 시선에 갇히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내가 규정될 때이다. 그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빼낼 수 있을까. 박상순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 시의 세상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이제 타인의 시선에서 빼낸 그의 얘기가 된다. 그 얘기에 따르면 아마도 그는 지난 봄에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듯한 힘든 시절을 보냈나 보다. 그가 “긴 터널에서/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는 지난봄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겨운 시절을 어떤 책을 읽으면서 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가 내준 의자에 앉아 그렇게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타인인 나는 그가 자신의 얘기를 해 주기 전에는 그를 내 시선 속에 비친 모습으로 가두어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첫구절의 반복은 그렇게 읽혔다. 결국 타인의 지옥은 피할 수가 없다. 그렇긴 해도 현실 속에선 타인의 시선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이 시의 세상에선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을 빼내는 것이 가능하다. 타인의 지옥을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시의 세상에 있다.
3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시가 세상의 현실로부터 너무 거리가 멀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시가 갖는 서정의 농도가 진해지면 더더욱 그런 얘기들이 많아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시의 세상에서 꽃들이 태양을 향해 달리는 세상을 만났다. 그 세상에선 느린 속도가 경쟁에서 지고 뒤쳐진 패배의 속도가 아니라 꽃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속도였다. 나는 또 여름숲의 그늘을 만났다. 그곳은 빛이 들지 않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이 높이를 버리고 평등해지는 환한 세상이었다. 익명의 공간이어서 고립과 외로움을 앓아야 했던 도시는 바로 그 이유로 살만한 곳이었다. 우동 가락을 흘리며 식사를 하고 있는 노인은 다만 자주 파울 타구를 내고 있을 뿐이었으며, 때로 파울 타구도 아름다울 때가 있었다. 다수와 소수가 공존하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활에서 거룩을 길어올린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거룩하게 해주었다. 타인의 지옥을 숙명처럼 살아가는 우리들도 시의 세상에선 우리들을 그 지옥에서 빼낼 수 있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런 측면에서 정말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가장 근본적 관점에선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2017년 여름호의 계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으면 그렇게 시가 바꾸어 놓은 세상을 다양한 형태로 살았다. 시는 조용하고 소리없이 세상을 바꾸어가고 있다.
(『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시 계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