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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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언어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문화권의 의식이 배어 있다. 똑같은 언어에선 이 의식의 차이를 확연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언어를 달리하면 의식의 차이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 우리에게 있어 강아지풀이란 말은 어떤 한해살이풀을 가리킨다. 그 이름은 강아지풀을 바라볼 때 우리들로 하여금 강아지 꼬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같은 풀을 바라볼 때 다른 문화권에선 여우 꼬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 풀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가 폭스테일(foxtail)이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액면으로 보면 어디에서도 강아지를 떠올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처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강아지풀을 보며 여우를 상상하기 어렵다. 언어는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옷의 주름을 펼 때 사용하는 도구를 우리는 다리미라고 부른다. 무엇인가를 다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결과이다. 우리의 의식은 용도를 이름으로 삼았다. 하지만 영어는 같은 대상은 아이언(iron)이라고 부른다. 그때의 의식은 다리미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같은 의식으로 불렀다면 다리미의 우리 말 명칭은 철이나 쇠가 되었을 것이다.
물푸레나무를 마지막 예로 들어본다. 물푸레나무는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물이 파랗게 물든다는 데서 그 이름을 얻었다.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러나 같은 나무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는 애쉬 트리(ash tree)이다. 이름만으로 보면 재투성이나무이다. 그 이름의 어디에서도 물을 푸르게 물들이는 속성은 엿볼 수가 없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님포매니악>을 보면 영화 속 대사를 통하여 물푸레나무의 이름에 깃든 의식의 차이를 접할 수 있다. 영화 속 대사는 물푸레나무가 생겼을 때는 숲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였으며 그래서 다른 모든 나무들이 질투를 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재투성이나무로서의 물푸레나무이다. 대사는 겨울이 오자 물푸레나무에서 잎이 모두 떨어지고 검은 봉오리만 남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검은 봉오리란 물푸레나무의 겨울눈을 말하는 것이다. 물푸레나무는 잿빛의 싹으로 겨울눈을 삼고 그 눈으로 겨울을 넘긴 뒤 꽃을 피운다. 영화의 대사는 그것을 본 다른 나무들이 ‘하하! 너는 나뭇가지를 재 속에 묻었나봐!’라고 놀리면서 웃었다고 전한다. 물푸레나무의 이름이 재투성이나무인 의식 속에선 이러한 대사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재투성이나무라는 이름이 잿빛을 부르고 겨울눈의 빛깔이 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푸레나무라는 이름의 의식 속에선 이 나무의 겨울눈이 잿빛이라는 사실은 거의 관심을 받질 못한다. 어쩌다 겨울눈을 본다고 해도 그냥 그것은 겨울을 이기기 위해 짙은 빛깔의 껍질로 봉오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 이상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외국어를 배울 때 우리는 다른 언어 하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로 이루어진 또다른 의식의 세계를 경험한다. 시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시는 모국어로 쓰여진 외국어로 볼 수 있다. 시가 쓰여질 때마다 모국어의 일상적 틀 속에 갇혀 있던 의식이 확대되고 전환되면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나는 그렇게 2018년 계간지의 봄호에서 시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또다른 세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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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민의 시를 첫순서로 읽어본다. 그의 시 「못」은 아버지 얘기이다. 시는 “살과 뼈를 태웠다”는 말로 시작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며 화장을 한 것이다. 화장을 하면서 시인은 아버지 발바닥에 못이 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못은 죽음도 빼내질 못한다. “발바닥에 박힌 못이 태워지질 않았다”는 대목은 그 못이 아버지의 발바닥에 얼마나 깊이, 또 단단히 박혀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시인은 “열여덟 아버지는 목수였다”고 회상한다. 나는 그 얘기를 아버지가 열여덟의 한때 목수였다고 읽지 않고 열여덟 때부터 내내 목수일을 하며 살았다로 읽었다. 아버지는 평생 “톱과 대패와 망치로 지은 집”을 지으며 살았으며, 나무로 짓는 집의 시대는 기울어져 갔다. 그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발바닥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일해야 했던 삶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아버지의 삶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발바닥에 못이 언제 박혔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방에 “연백에 두고 온 가족의/흑백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는 얘기는 아버지가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이었음을 알려준다. 타지에서 살면서 고향을 가보지도 못하는 삶이었으니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때로 고향은 태어난 곳에 그치지 않고 가끔 찾아가면 우리 삶의 위로가 되는 곳이다. 아버지에게는 그러한 위로의 공간이 없었다.
대개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 속에서 죽음은 삶의 종언이다. 죽음은 삶을 끝내고 지워버린다. 하지만 서상민의 시에선 정반대이다. 죽음이 비로소 삶을 드러낸다. “발의 통증”으로 발을 절며 다녀도 삶은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잘보여주질 않는다. 그런 경우 삶은 대개 다리의 불편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죽음은 다르다. 불도 태우지 못한 “발바닥에 박힌 못”은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리의 불편은 이제 아버지가 살아온 힘겨웠던 삶이 된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시인이 “임진강 물결에 아버지를 보내고 왔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를 보내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 회한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에겐 다행이 그 회한이 남지 않는다. 아버지 발바닥의 못이 뽑히는 순간이 시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걷는다는 건 발을 저는 일
발바닥에서 오후 다섯 시의 못이 빠져나와
긴 등뼈로 눕는다
—서상민, 「못」(『문예바다』, 2018년 봄호) 부분

“오후 다섯 시의 못”은 사실은 아버지의 빈방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볕이다. 시인은 그 햇볕을 “오후 다섯 시의 태양이 풍화하는 빈방에는/오후 다섯 시의 기울기가 산다”는 말로 아주 구체화해놓고 있다. 비스듬한 각도로 들어와 방을 채우고 있는 햇볕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비스듬한 각도의 햇볕이 들어와 있는 방에 대해 “빛 속으로 모여드는 먼지들은/빈방의 기울기를 이해한다”는 설명을 덧붙여 놓고 있다. 방안으로 빛이 비치면 그 빛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들이 완연하게 눈에 띄는 순간들이 있다. 빛의 기울기라고 하지 않고 빈방의 기울기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빛 속의 먼지들은 기울어져 가면서 자신의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를 이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경우가 있다. 동네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그 동네에서 자랐던 나의 유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와 유사한 경우이다. 아버지 방의 먼지들은 그래서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을 들어온 빛은 곧 시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남긴 사진 한 장이나 물건이 곧 그 사람이 되곤 한다. 시인의 경우에는 다만 비스듬한 각도로 들어온 오후 다섯 시의 햇볕이 빈방에 유품처럼 남겨진 아버지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햇볕이 아버지가 되자 발바닥의 통증을 견디며 살아가야 했던 아버지의 아팠던 삶이 그래도 자식들을 보살피며 살아갈 수 있어 빛날 수 있었던 삶으로 바뀐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 발바닥의 못이 아버지를 빠져나와 “긴 등뼈로” 아버지의 방에 빛이 되어 눕는다. 아픔없는 편안한 휴식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현실은 발에 못이 박히도록 일하며 힘들게 살아야 했던 삶이었지만 그 삶의 방으로 햇볕이 비칠 때 햇볕에 중첩되어 드디어 따뜻하고 환하게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는 영면의 세상이다.
서상민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하면서 발에 못이 박히도록 살아야 했던 삶을 환하고 따뜻한 햇볕으로 방에 눕히지만 김수우에게선 살아계신 어머니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시인은 “오늘도 엄마는 바다를 말린다/오징어도 가재미도 편편한 후박나무 잎새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바닷가에서 생선 말리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계시다. 그런데 우리는 시인으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뜻밖의 전설을 전해 듣는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원래는 인어였다는 것이다. 생선을 말리는 것이 “용왕을 섬기던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이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는 그 전설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엄마의 능력은 바다 허파로 숨 쉬는 일”이란 대목에선 그 전설이 더욱 구체화되며, “벵골만에서 부친 심해의 안부를 읽는 일”이란 또다른 능력에서도 그 전설은 다시 확인이 된다.
물론 나는 시인의 어머니가 인어였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인이 암시한 인어의 전설은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이 땅의 여자들이 결혼하고 어머니가 되면서 겪는 변화는 사실 인어가 바다를 나와 육지의 삶을 시작한 것만큼이나 변화의 폭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변화의 폭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삶을 인어의 전설에 빗대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어머니의 현실은 인어의 시절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인어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시인은 바다의 목소리를 빌어 “너를 기다리는 무수한 푸른 계단을 잊었니”라고 묻지만 어머니는 현재의 삶을 “숙명이 아니다 선택이었다”며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어머지는 인어의 삶을 버린 것일까. 시인에겐 그렇질 않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생선을 말릴 때 사실을 육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닷속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글썽이는 그물코 사이로
꾸덕꾸덕 말라가는, 길고 깊은 바다의 계단들
—김수우, 「소금 엽서」(『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부분

“글썽이는 그물코”라고 했으니 그물로 가린채 눈물을 흘리며 사는 삶이다. 바다를 나온 자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어머니가 말린 생선들에서 “길고 깊은 바다의 계단들”을 보았다. 그러니 어머니는 생선을 말릴 때마다 그 물고기들을 계단삼아 바다를 다녀왔을 것이다.
나는 인어에게 인어를 잃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어에겐 인어가 삶의 중요한 일부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김수우에게선 인어의 전설과 생선을 말리는 일상으로 푸른 계단으로 만들어낸 시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이 전설을 만들면 그 전설을 통해 어머니가 말린 물고기를 푸른 계단으로 삼아 잠시 원래 살았던 바다를 다녀올 수 있다. 전설의 놀라운 힘이다. 이병일에게서도 그 힘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전설 속에선 동백과 고라니가 하나가 된다. 즉 동백이 곧 고라니가 되고 고라니는 곧 동백이 된다.

첫 발자국을 떼는 동백, 발굽에 창(窓)이 달려 있어
이역(異域)까지 숨 녹아 물 빠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항문 괄약근을 밀어내면서
절개지 하나 무너트리면서
산과 강과 절벽이 신성하도록 외진 길로만 흥(興)을 낸다
그러나 산맥을 끼고도는 검은 속도를 피하지 못했으니
빳빳한 짐승으로 돌아와 꽃잎으로 눕는다
산산이 찢어진 비명, 절뚝거리다가 적막에 닿았을 것이다
—이병일, 「동백과 고라니」(『문예바다』, 2018년 봄호) 부분

동백이 곧 고라니이고, 고라니가 곧 동백이 되는 세상은 그 말만 들으면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세상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이 시의 실질적 현장은 상당히 비극적이다. 고라니가 차에 치어 죽은 로드킬의 현장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산맥을 끼고도는 검은 속도를 피하지 못했”다는 대목과 “빳빳한 짐승으로 돌아와 꽃잎으로 눕는다”는 대목은 산을 끼고 도는 한적한 길에서 차에 치이고만 고라니의 운명을 짐작하게 해준다.
대개 이런 비극적 죽음 앞에선 슬픔을 보태 그 죽음을 위로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대응 방식이다. 그러나 이병일은 그 죽음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것은 바로 고라니와 동백이 하나되는 전설을 마련하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둘에게선 어떤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이 주목한 것은 바로 차에 치이면서 흘린 고라니의 붉은 피이다. 이는 떨어진 동백의 빛깔과 유사하다. 색의 유사성으로 둘이 묶이면 “귀가 먼저 걷고 울음을 보고 걷는 고라니 가계(家系)엔/발굽이 거느리는 동백꽃이 온기로 비어 있다”는 전설이 가능해지고, 그 전설을 기반으로 고라니의 발굽에 동백의 자리가 마련된다. 그렇게 동백의 자리가 마련되면 “붉음으로 절기를 잠재우는 나무”이던 ‘동백’의 꽃이 “북방으로 가기 위해 고라니와 몸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꽃이 질 때 동백은 “고라니 등에 슬쩍 올라”탈 수 있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위로가 갖는 가치는 비극으로만 설명되던 고라니의 죽음이 붉은 동백의 꽃잎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라니는 차에 치어 죽은 것이 아니라 동백으로 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왜곡으로 오해받을 구석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는 그보다는 차에 치어 피흘리며 죽은 고라니 앞에 동백꽃 한송이라도 놓아주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다른 방식으로 그 슬픔을 위로한 결과로 보였다.
이번에는 어떤 전설도 섞여들지 않은 현실로 돌아오기로 한다. 그 현실 속에서 하상만은 우리 사회의 공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시인은 높이뛰기에 대한 경험을 예로 들어 공정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한다. 높이뛰기는 오직 선수가 뛰어넘는 높이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 규칙은 우리에게 공정해 보인다. 갑질이라 일컬어지는 경제적 불공정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이 된 시대이지만 높이뛰기는 부자가 뛴 높이와 가난한 자가 뛴 높이를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높이뛰기의 경쟁이 공정한 것일까.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전국체전에 참가했다. 148센티미터에 불과했던 나는 무려 153센티미터나 넘었다. 3등이었다. 만족스러웠다. 1등은 160센티미터를 넘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키는 170센티미터였다. 자기 키를 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규칙이 그랬다. 자기 키의 얼마보다는 그냥 얼마를 넘느냐가 중요했다. 네 키를 넘으면 돼. 내게 기준을 세워 주었던 선생님을 바라봤다.
—하상만, 「크로스바」(『문예바다』, 2018년 봄호) 부분

큰 키는 높이뛰기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키가 작으면 불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큰 키는 유리하고 작은 키는 불리하다는 도식이 상황을 너무 단순화하는 구석은 있다. 키가 크면 몸의 동작 둔해지고 키가 작으면 몸동작이 날렵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자며 큰 키가 훨씬 유리한 것이 현실이다.
높이뛰기에선 신체적 조건이 결과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좀더 높은 수준의 공정은 불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 규칙을 좀더 공정하게 바꾸면 된다. 즉 높이뛰기의 규칙을 절대적 높이뛰기에서 자신의 키를 얼마나 더 뛰어넘느냐는 상대적 높이뛰기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170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선수나 148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선수 모두 타고난 키에서 어떤 유리나 불리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러한 공정을 추구하지 않는다.
시인은 “대회가 끝나고 선생님은 내게 그만두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체육인이 아니라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하상만의 시를 “성실함으로 물려받은 것을 뛰어넘기 힘들”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을 위하여 규칙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보다는 경쟁의 불공정을 인식의 전환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를 제안으로 받아들였다. 가령 작은 키로 자신을 넘어서면 그 높이를 더욱 크게 수긍해 주는 것이다. 가진 것 없이 성공한 삶에 대해선 더더욱 그 성공을 값지게 평가해주는 것도 그러한 전환의 태도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선 키의 한계로 시인에게 높이뛰기를 그만두게 한 선생은 두고두고 아쉽다. 선생이 가르쳐야 할 것은 사회의 불공정한 규칙에 대한 감내가 아니라 그 불공정 속에서 거두는 학생의 성과에 대해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현미의 시에서도 우리는 현실 속의 우리들을 만날 수 있다. 시속의 시인은 ‘여기’의 나와 ‘거기’의 나로 분리되어 있다. 거기는 직장을 뜻한다. 거기는 그곳이기도 하지만 그때, 즉 직장을 다닐 때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는 구체적 장소를 특정하기가 어렵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 자신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시의 대부분은 여기의 나를 말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여기의 나에 대한 시인의 얘기는 “희망이 없는 희망만 하다가 이생을 끝낼 것 같은 여자가 여기, 있어요 시를 쓰죠”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희망은 희망만큼은 있어야 희망일텐데 “희망이 없는 희망만” 했다고 하니 희망보다 절망이 더 잦았던 것이 시인의 삶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책을 버리지 못하는 병”을 갖고 있고, “오늘의 운세를 믿”는 것도 시인이 전하고 있는 여기의 나이다. 여기의 나에 비하면 거기의 나, 즉 직장의 나는 시의 끝부분에서 짧게 등장한다.

죽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다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오늘의 사표를 낸 구질구질하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서 퇴직하고 싶다고 반복하고 번복하던 여자는 이제 거기, 있어요
—안현미, 「사표는 어느 날 수리된다」(『포지션』, 2018년 봄호) 부분

시인은 결국 사표를 냈다. 사표를 냈으니 직장을 그만 둔 것이다. 이 시의 구성 속에선 직장 시절의 나는 거기의 나로 표현되면서 여기의 나와 구별되어 있다. 둘의 구별은 마치 직장을 그만두면서 여기의 나를 찾은 듯한 느낌마저 준다. 도대체 직장은 어떤 곳이기에 그곳을 그만두는 것만으로 나를 찾은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시 속에선 직접적인 답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죽고 싶었다가 살고 싶었다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여기의 나가 나만의 나라면 직장에선 그런 나가 용납이 안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은 가능해진다. 직장은 사실 이율배반적인 곳이다. 모두가 직장을 구하고 싶어하지만 구하고 나면 또 모두가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그만 두고 싶어하면서도 끊임없이 직장을 구한다. 어렵게 구한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하는데는 다들 각각의 이유가 있겠지만 안현미에게 있어서 직장은 여기의 나를 잃게 되는 곳이다. 직장은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주면서 우리 자신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편차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직장을 잃는 일이 생계 수단을 잃는 치명적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는 직장을 잃으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직장을 잃는 일이 나를 찾는 일일 때도 있다. “시를 쓰”고 “술 마시고 사랑이 없는 사랑 앞에서 웃기도” 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손금 얘기가 담긴 시를 읽어보려 한다. 사람들은 손금에 한 사람의 운명이 담겨 있다고 믿을 때가 있다. 그때 손금은 우리가 살아온 삶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살아갈 삶이기도 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모두 지배한다. 대체로 그러한 손금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타고 난 재복이나 수명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손금 얘기는 그 정도이다.
하지만 윤진화가 펼친 손에서 ‘손금쟁이’가 읽어내는 운명은 결이 다르다. 그가 손을 맡기자 손금쟁이는 손금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이생에서 지금껏 연주한 가락”을 듣는다. 다시 말해 시인의 손금쟁이에게 손금에 닮긴 삶은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이 된다. 손금쟁이는 “손금도 악기 같아서/대금, 중금, 소금처럼 가로 불지요”라고 말하며 시인의 삶을 “끝이 없”는 “비가(悲歌)”, 그러니까 슬픈 노래라고 읽어준다. 나는 그런 손금쟁이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어떤 손금쟁이가 시인 앞에서 풀어준 손금의 운명이 시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손금쟁이 자신도 모르게 얻은 행운이었을 것이다. 손금의 경험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손금쟁이가 내 손에서 흐르는 곡조를 짚다가
다시 곱게 접어 내게 주었어요
난 받아 든 가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주먹을 쥐었어요
백팔 번 맞춰 내 가슴을 때렸어요, 굵게 생긴 손금 사이로
눈물이 스며 들어요, 주먹을 풀었어요. 허공으로 풀어진 길
손안에 숨어 있는 이 길을 따라가면 거기
사랑이 있다고 내 손을 맞잡고 연주해 주세요
당신의 손금을 내게 들려주세요
두 손을 악보처럼 펼치고,
—윤진화, 「손금을 풀다」(『문예바다』, 2018년 봄호) 부분

손금쟁이는 손금을 보며 운명을 말하지만 시인의 세상에선 손금쟁이의 얘기를 들을 때 그 얘기가 손안에서 음악으로 흐른다. 그리고 세상의 인연이란 서로가 맞잡고 펼치는 연주가 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김언의 시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게 만든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 단어로 말해 그는 창문에서 투신했다.
—김언, 「투신」(『문학과사회』, 2018년 봄호) 부분

나는 “한 단어로 말해”를 한 마디로 말해의 변형으로 보았다. 이 표현에는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간단하고 짧게 요약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러나 때로 세상에는 그렇게 짧게 요약하여 이해해선 안될 일들이 있다. 누군가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투신을 했다면 그런 일도 한마디로 요약하여 이해하려고 해선 안될 일이 될 것이다.
김언의 시는 “한 단어로 말해”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그 투신에 대해 계속 언급한다. 나는 도대체 이 표현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지 궁금하여 세어보기까지 했다. 그 표현은 열 번이나 나온다. 그러니 이미 그 반복만으로 시는 투신에 대해 한 단어로 말하고 있지 않다. 문장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그 표현의 자리에는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와 같은 다른 표현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떤 사건을 짧고 간단하게 요약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질 못한다. “한 단어로 말해”라는 표현을 적절한 자리도 아닌 곳에서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욕망을 형식화하여 반복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라는 암시도 된다.
김언은 동일한 표현의 반복으로 대상을 짧고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욕망을 나타내는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세태를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가령 “한 단어로 말해 창문이 문제다”라는 대목에선 사람이 창문에서 투신했을 때 투신한 이유를 찾지 않고 투신한 장소를 문제삼아 창문을 폐쇄하는 것으로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창문이 아닌 곳에서도 떨어지는 사람은 있다”는 말은 문제의 궁극을 짚어내지 못하고 창문을 철거하는 것으로 대처하며 눈앞의 문제를 덮기에 급급하는 사회에 대한 시인의 비판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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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는 같은 대상을 다른 의식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손쉬운 예가 될 수 있다. 시는 다른 의식으로 구축되는 그러한 세상을 모국어로 보여준다. 그렇게 시의 의식으로 구축되는 세계에선 발에 못이 박히도록 일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이 살던 방에서 저녁 무렵의 따뜻한 햇볕으로 환하게 몸을 눕힐 수 있다. 또 생선을 말리며 살아가는 어머니가 그 생선들을 푸른 계단으로 삼아 잠시 바다 속 시절의 인어로 돌아간다. 차에 치어 죽은 고라니는 그 자리에서 동백꽃으로 그 죽음을 위로 받는다. 타고난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시의 세상에선 자신을 넘어선 삶을 모두가 긍정하고 인정하자는 제안이 있다. 모두가 취업을 꿈꾸지만 그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나를 얻는 순간을 보게 되는 것도 시의 세상이다. 또 시의 의식은 손금에서 운명이 아니라 음악이 흘러나오는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며 짧게 요약할 수 없는 사건을 깊이있고 심도있게 파고드는 것도 시의 세상이다. 내가 2018년 계간지의 봄호에서 돌아본 세상이기도 하다.
(『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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