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언어, 그 언어가 만드는 세상 —송재학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

송재학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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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숭례문이 불탔고 복원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선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탔고 그 또한 복원될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어떨까. 언어는 불타지 않지만 종종 시간의 뒤편으로 사라지면서 우리 곁에서 볼 수 없게 된다. 말이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비록 종언을 고하고 사라지긴 하지만 말의 복원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것을 쓰는 순간, 말은 복원된다. 물론 한 개인에게서 이루어지는 말의 사용을 완전한 복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널리 쓰이게 되어야 비로 완전한 의미에서 말이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사용하면 순간적이지만 말은 복원된다.
송재학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에서 우리는 자주 말의 복원에 접한다. 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비교적 자세하게 말의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는 “지하 생활 몇 개월”째라고 하면서 “난 아직 이곳의 번역본을 갖지 못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전에 “창이 많은 공간을 찾다가 홀리듯 지하실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시인은 지하실이라고 말하며 공간을 상하로 나누고 아래쪽으로 자리했지만 나는 그 공간을 시간대로 나누어 시인의 지하실을 과거의 시간대로 이해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오늘은 창이 많아 빛이 잘드는 시간대이다.
땅속과 지하실은 차이가 있다. 땅은 우리를 묻어버리지만 지하실은 우리를 그곳에 보존할 수 있게 해준다. 땅속의 것은 발굴해야 하지만 지하실의 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묻혀버린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지하실의 문을 여는 것만으로 좀더 용이하게 우리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 송재학의 지하실은 과거이기 때문에 그곳의 언어 또한 과거의 언어이다. 옛말은 종종 번역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과거의 책을 들쳐보는 것으로 옛말을 살펴볼 수 있으나 그때의 언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시인은 그런 상황이다.
시인은 “껍질 없는/메아리는 지하실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지하실은 빛이 없고 말이 웅웅 울린다. 빛이 없으니 글자를 읽을 수가 없고 소리로 들어야 한다. 그 얘기는 과거의 언어 세상을 현재의 맞춤법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읽어보면서 그 소리로 그때의 말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읽어볼 때 나는 소리를 시인은 메아리라고 했고, 그 메아리가 현대의 맞춤법과 맞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껍질이 없다고 본 것이다. 맞춤법은 언어의 껍질인 셈이다. 과거의 언어는 읽으면 그 껍질을 벗어버린 메아리가 된다. 하지만 그 메아리도 낯설 때가 있다. 현재와는 소리마저 다를 때가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메아리가 낯설기에/나도 어딘가로 스며드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한다. 어딘가로 스며든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전후의 맥락으로 보았다. 전후의 맥락으로 스며들면 말의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된다. 시인은 그렇게 스며든 끝에 “메아리의 울림은 꽃피는 순서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꽃피는 순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말도 자연과 닮았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되살아나는 멸종된 언어도 배웠다
이를테면 문어체를 닮은 얼룩들,
모음과 자음이 느슨하게 엮인 원시 지느러미들,
어둠 속에서만 사용했던 방언도 있다
—「메아리」 부분

구어체를 써야할 부분에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문어체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송재학은 얼룩으로 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대화체가 아니라 문어체로 윤색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말도 옛날과 똑같이 모음과 자음이 엮여 말이 만들어지지만 시인은 옛말에서 그 결합의 느슨함을 본다. 말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며, 느슨했으니 변화가 왔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선 말도 진화한다. 옛말은 원시 시대의 흔적일 수 있다. “어둠 속에서만 사용했던 방언”은 과거에만 사용하다 없어진 말로 이해되었다.
내가 사라진 옛날 말로 이해한 것은 시인은 “멸종된 언어”라고 칭한다. 지구는 45억년의 역사 동안 다섯 차례의 대멸종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중생대 백악기말의 공룡 멸종이다. 이때의 멸종으로 1억5천만년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언어의 경우에도 그렇게 멸종된 언어들이 있다. 그때는 발견되어도 해독되지 않는다.
송재학이 복원한 언어의 경우에는 사정이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다. 화석으로만 남는 공룡과 달리 언어는 그때의 형태 그대로 남는다. 물론 옛말의 의미를 짐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이 “메아리가 똬리 튼 고독한 모서리는/불빛의 모가지도 외면한다”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시인은 “침묵이 소리를 알 때까지,” 그러니까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워 생각에 잠겼다가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까지 “말과 말 사이”는 어둠으로 메워져 있고 그래서 “지하실에서 말은 단순해지고 있다”고 전한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냥 말이 세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시절이 지금처럼 복잡하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멸종된 언어를 살리는 일이 단순히 옛말을 가져와서 다시 쓰는 단순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몇 달 동안 과거의 출판물이나 사전을 뒤져 이제는 쓰이지 않는 말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현재로 가져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송재학에 의하면 그런 작업이 말을 소리로 읽어 그 말의 메아리를 듣는 일일 수 있다. 단순히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복원이 아니라 그 말을 오늘로 가져와 어떤 특별한 체험을 안겨주는 것이 복원 작업의 의미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때 우리는 복원된 말에서 오늘의 말을 대치한 옛말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내게는 송재학의 시집에서 접한 복원된 말이 그랬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그 복원된 말을 살펴보며 그 말들이 내게 열어준 세상을 얘기해 보기로 한다.

2
옛말은 복원되어도 열쇠가 없는 건물과 같아서 말의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들어가려면 우리에겐 열쇠가 있어야 한다. 열쇠는 사전이 제공한다. 집에 사전이 없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전은 인터넷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거의 모두 무료로 제공된다. 한 예로 국립국어권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이 있다. 종이 사전을 뒤적일 필요가 없다. 이제는 화면에 사전을 펼쳐놓고 시를 읽으면 된다. 시의 한 부분을 읽어본다.

왜 수국이 수시로 변하는지 서로 알기에 어슬한 꽃무늬를 얻었다
—「취산화서(聚繖花序)」 부분

시를 읽어가던 내 눈길은 어슬하다란 말의 앞에서 그 걸음이 막힌다. 그 말은 나로하여금 바로 앞에 빤히 보이는 “꽃무늬”로 건너가지 못하게 한다. 나는 사전에서 검색을 한다. 사전은 그 말이 조금 어둡다는 뜻임을 알려준다. 나는 그 말의 문을 열고 꽃무늬로 건너간다. 그러자 조금 어두운 조도의 꽃무늬를 만나게 된다. 앞을 막아섰던 말이 이제는 꽃무늬의 조도를 낮추고 있다. 어슬하다는 말대신 조금 어두운이 서 있었다면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조도가 낮은 꽃무늬를 만나는 대신 곧바로 조도가 조금 어둡게 제한된 꽃무늬를 보았을 것이다. 언어가 복원되면 복원된 언어 앞에서 길이 막히지만 그 문을 열고 언어를 마주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한 달에 한 번 하숙집 아주머니의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객차를 매달고 오는 증기기관차가 조브장한 ‘ㅁ’자 시멘트 마당에 간이역을 꾸몄다
—「하숙집」 부분

이번에 나의 걸음을 막은 것은 조브장하다는 말이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사전에 그 뜻을 기댄다. 사전은 내게 그 뜻이 짧거나 작은 듯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뜻을 알고 나자 네모난 모양의 시멘트 마당을 앞에 두고 열리지 않았던 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들어서자 작은 듯한 느낌의 마당이 나를 맞아준다. 나는 이미 크기가 제한된 마당을 본 것이 아니라 언어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그 크기를 비로소 체감한다. 복원된 언어는 자주 언어로 들어서는 문이 된다.
항상 사전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시가 아예 말을 설명해 주었다.

드므라는 말, 심심하지 않은가 수면 위의 ‘드’와 거울이라는 ‘므’의 부력을 생산하는 후설 모음이다 물을 마시고 저장하는 낮고 넓적한 독이라는데, 찰랑거리는 물소리 대신 말을 잘 구슬리지 못한 혀가 앞장서면서 계면쩍다
—「드므라는 말」 부분

드므라는 말을 시인이 시의 가운데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지만 그 말은 잘 와닿질 않는다. “낮고 넓적한 독”에서 독이란 말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김치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전이 아니라 인터넷의 검색 엔진에 도움을 받았다. 대체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네이버이나 나는 구글의 도움을 받았다. 구글에는 이미지 검색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하면 드므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곧바로 알 수 있다. 검색 엔진은 드므의 모습을 셀 수 없이 많이 보여주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은 궁에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도망가게 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다는 설명까지 볼 수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 방화수로 사용하였다는 또다른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시속에서 접했던 “거울이라는 ‘므’”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드므를 말하면 그 말로 실제의 형상을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만으로 드므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시의 이해를 위하여 이미지의 도움을 빌리는 이러한 방법은 옛것 뿐만이 아니라 달맞이꽃(「달맞이꽃/명상」, 꽃이 노랗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서체(「달맞이꽃/아프면」, 구글의 이미지는 예서체를 전서, 초서, 행서, 해서와 비교하여 보여주기까지 한다), 북극황새풀(「불가능의 흰색」, 우리나라에 없는 꽃이지만 꽃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산사나무(「숲속에 흰 피가」, 꽃이 희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와 같이 그 모습이 곧바로 짐작이 가지 않는 말들이 시 속에 등장할 때도 매우 유용하다. 눈으로 직접 봤을 때처럼 확연할 때는 없다.
다시 옛말의 복원이 독특한 경험을 안겨준 또다른 경우를 살펴본다.

달빛의 불안은 꽃에게도 번졌다 달빛은 손금의 점성술을 믿는다 거기 새겨진 소름들, 달맞이꽃을 배달하는 물결은 소박한 등롱을 얻었다
—「달맞이꽃/월식」 부분

시를 읽어가던 내가 구절을 따라 흐르던 눈길을 멈춘 것은 등롱이란 말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는 읽기를 멈추고 사전으로 그 말을 검색한다. 사전은 내게 등롱을 등의 한 종류로 대오리나 쇠로 살을 만들고 겉에 종이나 헝겊을 씌워서 만든 등이라고 했으며 안에 등잔불을 넣어서 달아 두기도 하고 들고 다니기도 한다는 설명을 추가해놓고 있었다. 설명을 읽은 나는 대오리를 찾아본다. 대오리는 대를 쪼개 가늘게 깎은 오리라고 했다. 나는 다시 오리를 찾아본다. 오리는 실, 나무, 대 따위의 가늘고 긴 조각이라고 나와 있다. 내가 찾은 것은 등롱이었으나 등롱으로 걸음을 들인 나는 대나무를 거쳐 가늘고 긴 조각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단 두 자의 말이었으나 나는 그 말을 잠깐 길게 걸었다. 시를 읽다 또다른 산책을 한 느낌이었다.
옛말이 과거에 사용되었던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이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때도 있다. 그 예는 참척이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다는 이 글자는 자디잔 가시로 가득하다
그 가시들은 뼈의 혼란에서 건져낸 것이다.
—「참척(慘慽), 4월의 글자」 부분

참척이란 말이 가시로 가득하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참척의 한자에 주목해야 한다. 시인의 눈에는 이 한자의 수많은 획들이 가시로 보인 것이리라. 이 글자를 가리켜 시인이 4월의 글자라 명명한 것은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때문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바다속에 수장되어 목숨을 잃은 그 참사는 나중에 아이들을 수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습에 걸린 오랜 시간은 뼈만 수습하는 비극을 가져왔다. 시인에겐 그 비극을 그대로 담고 있는 글자가 참척이란 옛말이었다. 옛말이 오늘의 비극을 가장 잘 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때로 옛것이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전한다.
복원된 언어들은 사전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이와 달리 시인은 딱지본, 즉 1910년대 이후에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소설을 시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또다른 복원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 경우에는 사전이 큰 구실을 하지 못한다. 시를 골라 한 부분을 읽어본다.

풀 끗혜 이슬 생기듯 동모가 또 생기는가 보다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부분

사전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끗혜를 끝에로 읽고 동모를 동무로 읽어 이 구절을 풀 끝에 이슬 생기듯 동무가 또 생기는가 보다로 읽어낸다.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끝에는 끗혜를 지하실에서 소리로 읽어낼 때 울리는 메아리 같은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이 도달하지 않아 어두우나 소리내어 읽으면 맞춤법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끗혜가 그렇듯 끝에의 메아리로 울린다.

이 마암의 괴로움을 바릴 고장이 어디인가, 철호는 한강의 물을 나려다보고 잇셧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이런가」 부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이 마음의 괴로움을 버릴 곳이 어디인가, 철호는 한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로 읽어낸다. 이번에도 우리는 말의 메아리로 옛말을 번역본을 갖게 된다.

달은 어졔밤과 갓치 발고 변하지 안코 흐르는 물은 월색에 청포 가라노은 듯하고 들이는 거슨 철셕철셕하는 소래분이다
—「미남자의 루」 부분

나는 이를 달은 어젯밤과 같이 밝고 변하지 않고 흐르는 물은 달빛에 청포 갈아넣은 듯하고 들리는 것은 철썩철썩하는 소리뿐이다라고 읽어낸다. 읽을 때의 나는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이 씌어지던 시대로 가 있다. 글에 그 시대가 담긴 때문일 것이다. 100년전의 과거는 먼 과거이지만 시인은 언어의 복원을 통해 과거와의 거리를 말할 수 없이 가까이 좁혀준다. 우리가 그 과거의 언어를 쉽게 읽는다는 것은 좁혀진 과거와의 거리 덕택이다. 우리는 잠시 과거를 산다.

3
복원이란 무너지거나 사라진 것을 다시 원래대로 세워놓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송재학의 언어 복원은 다른 경험을 안겨준다. 그가 시 속에 복원해놓은 “멸종된 언어”들은 단순히 옛말을 되살려 쓴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복원된 언어는 옛말의 재현이 아니라 그 복원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는 또다른 언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 사라진 말들은 같은 말을 현재의 언어로 썼을 때는 기대할 수 없는 통로 구실을 하면서 우리들을 다른 세상으로 이끈다. 우리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상을 제한하던 오늘의 언어에서 벗어나 또다른 세상을 접한다. 그 경험 속에서 언어는 문이 되며 우리는 그 문을 열었을 때 또다른 세상을 체감한다. 또 시의 맥락에서 벗어나 잠시 말을 산책할 수 있게 된다. 시의 형식으로 만나는 딱지본 소설은 아득한 100년전의 세상을 말을 통해 잠시 오늘처럼 살게 해준다. 시인이 옛말을 복원하면 단순히 옛것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말로는 살 수 없는 또다른 세상을 살 수 있게 된다.
(『현대시』, 2019년 5월호, 시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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