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가장 오래된 문학 장르이다. 오래되면 빛나는 작품들을 많이 갖게 된다. 빛나는 작품은 소중하다. 작품이 너무 소중해지면 잘 보존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진다. 시인이 그 압박감을 그대로 수용하면 시는 빛나는 작품을 잘 닦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쓰여지게 된다. 비슷한 유형의 시들만 쓰여지게 된다는 뜻이다.
가령 시가 어머니를 은혜의 존재로 노래하면서 좋은 작품을 남기면 그것은 시의 성과가 되면서 동시에 시를 그 유형으로 제한한다. 말하자면 좋은 작품은 다른 시각의 작품을 제한하는 경향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표현과 시각이 비슷한 작품이 자꾸 뒤를 잇게 된다. 작품을 잘 닦고 보존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정반대로 시를 확장해 가는 경우가 있다. 그때의 시는 시나 사회에서 전해 내려오는 어떤 오랜 유형이나 시각을 뒤흔든다. 임지은은 후자이다.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에 실린 시인의 말은 그러한 시인의 입장을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시인이 “뻔한 말을 종이컵처럼 구겼다//아마 우리가 접시란 걸 닦고 있었다면/가장 소중한 것을 깨뜨렸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임지은에 의하면 시는 “뻔한 말을 종이컵처럼 구”겨서 버리고, 또 “가장 소중한 것을 것을 깨뜨”려서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잘 닦아서 보존해가는 것이 시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인의 입장을 그의 시구절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만 다른 것이 되고 싶었다
—「피망」 부분
그렇다면 시인은 왜 다른 것이 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현실이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일상은 그러한 삶에 대한 연습이 된다.
닭고기는 쫄깃함을 연습한다
식탁은 가족을 연습한다
포크는 침묵을 찍어 올린다
—「연습과 운동」 부분
닭고기는 쫄깃한 것이 좋을 것 같지만 좋아하는 닭고기의 부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식탁에 둘러앉아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이 나쁠 것은 없지만 세상의 모든 가족이 그렇게 단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식탁의 연습으로 만들어내는 가족의 자리가 가장 큰 고역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식탁에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포크로 침묵을 찍어올리며 식사 시간을 견디게 될 수 있다. 또 이제 세상에는 일인 가족이 너무나도 많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의 이름으로 연습해야 하는 그 식탁이 숨막힐 수 있다.
여성의 경우에는 사정이 더 심각할 수 있다. 남성 위주로 편재된 사고가 암암리에 주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다급하게 욕실을 두드린다
무슨 일이죠?
문밖에 한 남자가 서 있고
발밑에 그가 하다 만 생각이 쓰러져 있다
급하게 벗어놓은 슬리퍼처럼
너무 커서 신을 수 없는
생각을 일으켜 세우고서야 깨닫는다
그는 어떻게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걸까?
그러자 벼락처럼 끼어드는 생각
나 옷은 입었나?
—「생각 침입자」 부분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 나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 수많은 사회적 관습은 그 관습에 묻은 생각을 암암리에 개개인들에게 주입한다. 주입된 생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규제한다.
소화제를 처방하던 의사가 말했다
몸을 따뜻하게 하십시오
내가 입은 치마가 짧다는 얘기가 아닐 텐데
나는 자꾸 치마를 끌어내렸다
—「회전문」 부분
사정이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나를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살지 못한다. 그러면 이런 사회에서 나로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임지은에게 있어 그것은 나를 나로 뭉쳐두지 않고 분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떤 나는 속눈썹을 붙이고 외출을 했다/어떤 나는 안경을 쓰고 도서관에 갔다/어떤 나는 지하철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는 생활을 갖게 되면서 내가 수많은 나로 분화가 된다. 그 모든 것이 나로 묶이는 것이 현실이지만 시인은 나로 묶인 나를 분화시켜 수많은 나로 독립시킨다.
나는 매일 다른 나와 마주쳤다
—「내가 늘어났다」 부분
이로 인하여 시인은 “자주 너답지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되었지만 “나다운 게 뭐지? 생각하는 동안 다섯 명이 되”면서 시인의 자기 분화를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이를 “만들고 부수길 반복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나 속에 나를 묶어둔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면 그 나를 모두 분화시키는 것이 시인의 새로운 세상이 된다. 마치 시다운 것에 묶여 있던 시가 새로운 양상의 시들로 확대되어 또다른 시의 세상이 되는 것처럼.
임지은이 그의 시를 통해 보여주는 관계의 양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엄마와의 관계이다. 그의 시각 속에서 엄마는 여전히 은혜로운 존재이긴 하지만 동시에 잔소리의 존재이다. 구체적으로 엄마는 “욕실에서 깨진 타일을 쓸어 담”으며 “지겨워 못 살아, 저런 것도 자식이라고”라고 하며 딸의 가슴에 아픈 말을 던진다. 또 그 말의 뒤에 습관처럼 “나니까 참고 살지”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엄마는 딸과 번번히 부딪친다. 이유는 엄마가 “최대한 오늘을 어제처럼” 사는 “어제의 총집합”이기 때문이다. 딸은 엄마와 비교하면 분명한 오늘이다. 과거가 현재에 대해 과거를 주장하면 현재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나가려는 현재가 과거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잔소리란 현재에 대한 과거의 주장이며 그것은 딸의 현재를 깊숙히 파고든다.
책상 위 좀 치울래? 딸
엄마, 이거 내 꿈속이야
—「밴딩 엄마」 부분
나는 이 대화를 엄마는 꿈속에서까지 잔소리를 한다고 읽었다. 현재의 발목을 잡는 행위는 꿈속에서까지 이어질 정도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묻게 된다.
엄마는 하지 마와 그만해를 섞은 문장이에요?
—「궁금 나무」 부분
은혜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시가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 임지은은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면서 엄마를 지워나간다. 그것은 엄마를 벗어나, 즉 또 하나의 엄마가 되는 행보를 벗어나 나를 찾는 행위이기도 하다. 독립된 생활은 엄마를 벗어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집에 남겨진 사람과/집을 떠난 사람에게/다른 질감의 생활이 주어”(「콩나물」)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엄마를 모두 지울 수는 없으나 엄마의 영향력에서 상당히 멀리 벗어날 수 있다. 시인에겐 엄마가 흐릿해지는 순간이다.
엄마가 흐릿해지고 있다
—「모르는 것」 부분
관계의 일반적 양상과 암암리에 수용된 획일적 시각을 바꾸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시의 세상을 여는 일은 의외로 간단한 작업으로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
지퍼를 열었는데 코끼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오렌지였다
—「과일들」 부분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니! 말도 안되는 얘기이다. 그 자리는 원래 연필의 자리이다. 시인도 곧바로 거짓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코끼리가 아니라 오렌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통에는 오렌지도 넣기 어렵다.
사실 이런 류의 얘기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례가 있다. 바로 보아구렁이의 뱃속에 코끼리를 집어 넣은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그 예이다. 그것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이지 실제로 보아구렁이가 코끼리를 삼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의 의심없이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는 임지은의 얘기는 쉽게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일까. 안에 코끼리를 그려넣은 필통을 보여주었다면 이 얘기는 아무 저항없이 수용되었을 것이다. 때로 언어로 옮겨지면 쉽게 수용될 수 있는 것도 수용되질 않는다. 임지은은 다만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를 언어로 그려보는 것으로 세상을 달리 여는 감각의 변환을 시도했을 뿐이다.
사실 필통에 코끼리를 넣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진을 배울 때 이와 유사한 학습법이 있다. 바로 집안에 있는 모든 물체의 이름을 두 시간 정도 바꿔부르는 것이다. 즉 소파를 사자라고 부르고 냉장고를 하마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바꿔부르면 대상에 대한 느낌이 바뀐다. 그러한 연습은 세상에 대한 느낌을 새롭게 환기하여 평상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해준다. 필통에는 연필이 들어있지만 그런 시각으로는 필통의 연필에서 한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 연필을 코끼리라고 부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간단한 일 같지만 그 일이 세상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하여 감각이 환기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세상이 달라진다. 어떻게?
초록색에서 벗어난 연두색
—「프리마켓」 부분
“사람들이 쓰던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을 프리마켓이라 부른다. 시인이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라고 말한 것의 하나가 “초록색에서 벗어난 연두색”이다. 나는 이 구절의 연두를 원래는 초록색이었으나 색이 바래 연두빛으로 희미해진 물건으로 보았다. 옷일 수도 있겠다. 어쨋거나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그간의 시각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색이 바랜 물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면 “초록색을 벗어난 연두색”을 얻는다. 초록은 오랜 굴레일 수도 있다. 색이 희미해지면 바래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색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 영어 이름은 낮잠 중에 지어졌으나
방심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 부분
기모는 보풀이 있는 옷감을 말한다. 기모 스타킹이나 기모 바지는 보풀이 있으며 이 때문에 더 따뜻하다. 이 기모의 보풀이 영어로는 냅(nap)이다. 냅은 낮잠이란 뜻도 있다. 시인은 영어 단어의 뜻을 빌미로 기모의 영어 이름이 낮잠 중에 지어졌다고 말한다. 냅에는 또 방심하다는 뜻이 있다. 그 뜻을 빌려와 시인은 “1월의 사람은 방심한 사이에 3월의 사람이 되고/진정한 새해란 새 학기가 시작되는/3월 아니겠냐며/조금 가벼운 티셔츠를 꺼내 입습니다” 라고 말한다. 기모 제품을 입고 보낸 겨울이 어느덧 3월이 되어 이제 기모를 입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졌는데도 아직도 기모를 입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방심한 때문이다. 말이 우리의 삶을 제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모는 쓸모없이 아주 긴 낮잠입니다”라는 말도 기모라는 말이 낮잠을 뜻하는 영어 단어라는 것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우나 시는 시속에서 그런 사실을 넌즈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뜻에 기대면 시는 아주 기발해진다.
시인은 시집의 마지막 자리에서 “나는 책으로 된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책의 끝에는 이렇게 쓰여있다고 전한다.
꽃.
나는 끝을 꽃으로 잘못 썼다
—「식물에 가까운 책」 부분
어떻게 되었을까. 꽃이라고 쓰자 책이 “식물에 가까운 책”이 되었고 끝이라는 말이 없으므로 “끝이 없는 이야기”가 그 책에 담겼다.
임지은의 시는 그가 꿈꾼대로 지금까지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일 수 있다. 시의 맛을 얘기한다면 그의 시가 꿈꾸는 맛은 이렇다.
수많은 존재가
뜻밖으로 튀어 오르는 맛
—「존재 핥기」 부분
시를 통해 전해들은 전언에 따르면 임지은의 시는 “핥아 먹”어야 제 맛일지도 모른다. 독특하고 재미난 세상이었다.
(『포지션』, 2019년 여름호, 시집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