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블라인드, 그 틈으로 본 세상 —류인서 시집 『놀이터』

류인서 시집 『놀이터』
류인서 시집 『놀이터』

류인서의 시집 『놀이터』에 실린 시인의 말은 아주 짧고 간략하다. 시인은 “언어의 블라인드 틈으로”라고 적어놓고 있다. 만약 이를 시는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답, 다시 말하여 류인서의 시론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짧은 문구에서 세상과 시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언어는 세상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사실은 세상을 가리고 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언어는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라기보다 세상을 가리고 있는 언어로 된 블라인드이다.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말하는 언어이다. 세상을 가리고 있는 언어의 블라인드를 보며 우리는 그것을 세상이라고 착각한다. 언어가 세상을 가리고 있다고는 했지만 정확히는 세상의 일반적 언어가 세상을 오직 한가지로 양상으로만 보여준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것이 더 정확한 이해가 될 것이다.
언어가 세상을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라면 세상을 보는 또다른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블라인드를 걷는 것이다. 류인서의 선택은 아니다. 그는 블라인드를 걷기 보다 블라인드의 틈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쪽을 선택한다. 사실 블라인드를 걷기는 어려울 것이다. 언어를 통해 일반적인 소통 방식으로 세상보는 것을 포기하면 완전히 새로운 소통 방식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방법, 다시 말하여 블라인드의 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 류인서에게는 그때 우리의 눈에 포착된 세상을 언어로 옮긴 것이 시의 세상이다. 물론 그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와는 크게 다르게 세상을 담아낸다. 이제 그 세상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들를 곳은 편의점이다. 이 편의점에선 빵까지 굽고 있다.

맛을 과장하여 구애하는 냄새들,
—「빵 굽는 편의점」 부분

편의점은 사실 빵집이 아니다. 하지만 많이 팔리는 것을 통하여 더 높은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커피를 내리는 편의점은 물론이고 빵을 굽는 편의점까지 생기고 있다.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하지만 편의점이 빵집은 아니다. 시의 제목인 「빵 굽는 편의점」을 검색어로 삼아 인터넷을 뒤져 보면 빵집형 편의점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저렴한 가격이며, 또다른 이유는 전문 빵집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맛이 괜찮기 때문이라고 한다. 빵집형 편의점은 계속 증가 추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일반 편의점보다 매출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 즉 저렴한 가격이나 높은 매출이 블라인드가 쳐진 언어의 세상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 틈을 벌린 시인의 눈엔 빵집이 아니기에 맛을 과장한 냄새로 손님을 끌려는 유혹이 보인다.
편의점에서 어떤 사람으로 시선을 옮겨 본다.

들리는 바로 그는 오래된 별빛을 수집하는 이라 한다.
—「소경」 부분

소경은 눈이 안보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언어의 블라인드 틈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시인의 눈에는 좀 다르다. 눈이 안보이는 사람은 세상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안보일 것 같지만 시인에게 그는 세상이 캄캄하기 때문에 항상 별이 떠있는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밤이 되어야 별을 볼 수 있으나 그에겐 항상 별이 뜬 밤하늘이 있다. 언어의 블라인드가 쳐진 세상에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세상에 뜬 별이 보이질 않는다. 그 별은 블라인드의 틈으로만 보인다. 우리는 밤이 와야 비로소 별을 보지만 언제나 캄캄한 하늘을 갖는 그들은 그 어둠 속에 별을 수집할 수 있다.
잠시 놀이터에 들러보기로 한다.

시소는 약속이 아니어서
잽싸게 무게를 버리며 달아날 수 있다
떠 있는 빈자리와 쏟아지는 이의 우스꽝스러운 엉덩방아,
이것은 갑에게서 가볍게 을이 생략되는
저울 놀이
—「놀이터」 부분

언어의 블라인드를 내리면 그 블라인드의 무늬가 보여주는 놀이터의 풍경은 “미끄럼틀과 시소, 혼자 흔들리는 그네, 생울타리에 기댄 작은 청소 수레가 속한/모래의 세계”로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블라인드의 틈을 살짝 벌리고 내다보면 시소에서 갑을관계의 전복이 보인다. 놀이터란 그런 곳이다. 갑을 관계가 ‘가볍게’ 생략되는 곳이다.
그러나 생각이 그렇게 정리되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내게 묻게 만든다. 과연 그럴까. 놀이터의 시소가 갑을관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친구와 시소를 타기 때문이다. 시소의 맞은 편에 직장의 상사가 앉아 있다면 “가볍게 을이 생략되는/저울 놀이”는 불가능해진다. 놀이터는 그 이면에서 갑을의 권력관계가 갖는 억압이 없어지려면 인간 사이에 상하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봄이 거의 지나간 숲으로 가본다.

숲의 입구에서 죽은 봄이 남은 꽃을 들고 계절을 흥정한다
—「정객」 부분

현실적으로 보면 봄은 다 갔으며 숲의 입구에 봄꽃이 몇 송이 남아 있을 뿐이다. 누구도 그 풍경을 두고 시를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풍경이 시가 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언어의 블라인드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블라인드의 틈을 벌리면 그 틈새로 심지어 죽은 줄 알았던 봄이 꽃을 들고 계절을 흥정하며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번에는 시인이 누군가와 나눈 대화 속으로 끼어들어가 본다.

열쇠가 열리지 않아,라는 a의 말
열 시가 열리지 않아,로 들었다
—「열 시 십 분들」 부분

말을 잘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우리는 잘못 알아들은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말을 확인하고 말로 돌아간다. 시인이 보기에 그것은 열렸던 말이 다시 닫히는 순간이다. 때문에 시인은 잘못 알아들은 그 말이 열어준 문으로 나갈 뿐, 말이 닫힌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질 않는다. 때문에 시인의 세상에선 말이 닫히면서 언어의 블라인드가 다시 내려지는 일은 없다. 대신 “열 시가 열리지 않았다는 건/열 시의 약속이 살이 있다는 속말”이 되는 세상이 열린다. 열린 그 문은 “닫히지 않은 풍경의 생장점,비상구”이기도 하다.
11월은 가을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겨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달이다. 그 달로 가보기로 한다.

사물들 그림자에서 힘줄이 도드라진다.
얼마간 더
햇빛의 연명 치료가 이어지겠다.
—「11월」 부분

11월은 색으로 물들었던 가을의 단풍잎이 지고 겨울이 시작되는 달이다. 날씨는 이제 가을을 입에 올리기 무색할 정도로 쌀쌀해진다. 아마도 시인에게 그 달은 그림자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인상을 남겼는가 보다. 그러나 또 11월은 쌀쌀하면서도 여전히 햇볕의 따뜻함이 완전히 가시진 않는다. 시인은 때문에 11월을 “햇빛의 연명 치료” 기간으로 보았다. 아직 단풍도 남아있을 것이다. 붉은 단풍은 색의 힘으로 그 연명 치료를 좀더 길게 끌고 간다.
말을 갖고 노는 세계는 이 세상에 없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공상은 살아 있는 현물 화폐,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붉은 돗자리 석 장 값어치라 들었습니다
—「공상은행」 부분

시인은 주석을 통해 이 시가 “세계 최대의 은행이라는 중국 공상은행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때의 공상은 공업과 상업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를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보는 생각으로서의 공상으로 바꾸고 있다. 현실적인 은행이 그 순간 상상의 은행으로 바뀐다. 현실의 공상은행(工商銀行)이 문을 닫고 시의 세상에서 공상은행(空想銀行)이 문을 여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세상은 “공상을 환전해주는 창구가 있습니까”라고 물어봐도 되는 세상이다. 어디에도 없으나 시의 세상에는 그런 은행이 있다.
비가 내린 직후의 공터로 가보기로 한다.

소나기를 넣으면
무지개로 구워져 나오는 공터라는군.
—「타임스위치」 부분

소나기가 지나가면 무지개가 뜨곤 하는 공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터의 무지개는 언어의 블라인드 틈으로 내다보면 완연하게 달라진다. 그곳에선 소나기로 구워내는 것이 무지개이다. 공터이나 사실은 도자기를 구워내던 가마터였을 지도 모른다.
카페에 들러 그 카페 옆에 딸려있는 방을 엿보기로 한다.

더운 술로 목구멍 축인 화분 꽃이 홀짝홀짝 빛을 게우네요. 꽃이 꽃을 떨치며 그림자를 풀어주네요.
—「커피 술」 부분

시인은 “커피집 친구”의 “곁방에서 술 마”셨다고 했다. “잠든 그녀의 정수리에 남은 술잔을 쏟을 뻔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취했나 보다. 그리고 그 술을 그 집의 화분에도 부어준 모양이다. 화분의 식물에선 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언어의 블라인드가 내려진 상태로 본 풍경이다. 그 블라인드의 틈을 벌리면 꽃은 빛이 되고 그림자를 풀어 놓는 놀이를 시작한다.
눈내린 날의 겨울로 가보자.

나는 한 줌의 눈을 알처럼 만지작거린다
—「책」 부분

눈이 오면 눈을 뭉쳐 작은 눈사람을 만들 때가 있다. 류인서에 의하면 그렇게 하여 “손에서 난쟁이 눈사람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시인에게선 그 순간이 알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알이니 부화될 수도 있다. 눈내린 날은 많은 생각과 느낌이 부화되기도 한다.
시인의 말을 빌려 류인서의 시를 언어의 블라인드 틈으로 내다본 풍경이라고 말했고 시를 통해 그 세상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소개한 시들을 통해 보는 틈의 풍경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어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틈새로 보는 그 세상이 실제로는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틈으로 본 세상에선 대립되는 두 개의 항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면 언어의 틈으로 보이는 세상을 확연하게 시야에 담아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가령 예를 들어 “두 발의 변온동물군”(「감정선」)이라는 말에서 두 발이 연상시키는 것은 사람이나 변온동물군이란 말을 들었을 때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파충류나 양서류이다. 파충류나 양서류에 두 발이 결합된 자리에서 어떤 이미지를 내다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이럴 때면 시가 잘 읽히지 않는다. 두 발로 걸었던 동물 중에 공룡이 있었지만 공룡은 변온동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를 모두 해명하며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류인서가 벌린 블라인드의 틈새에 함께 시선을 대고 비교적 쉽게 시선에 잡히는 것들만 보는 것으로도 시를 읽는 시간이 충분히 즐거웠다. 시를 읽다 창의 블라인드를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는 것도 시가 가져다준 즐거움을 확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블라인드가 없다면 창을 가린 커튼을 살짝 젖혀 보아도 될 것이다.
(『포지션』, 2019년 여름호, 시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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