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빠져나가 언어로 행동하는 세상 —채호기 시집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채호기 시집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채호기 시집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시와 몸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나의 입장은 시가 몸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이해 속에서 시는 몸을 받아적는 행위였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어떤 몸의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느낌을 사랑이라는 말로 받아적었다면 그 언어가 바로 시가 된다. 따라서 내게 있어 시는 그 순서가 항상 몸의 뒤였다.
하지만 채호기는 그의 시집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에서 이와는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시집이 시작되는 자리에 적어 놓은 「시인의 말」에서 “몸에서 빠져나와 언어로 행동하기”라고 말한 부분이 그에 해당된다. 만약에 바로 그것이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라면 시는 몸의 느낌을 언어로 변환하여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몸을 빠져나가 언어로 움직일 때 얻어지는 것이 된다. 즉 시는 몸에 예속되어 있지 않고 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시가 몸의 뒤에 발생하지 않으며 둘 사이에 선후관계는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채호기의 시는 몸을 빠져나가 언어로 움직인 결과들이다.
몸을 빠져나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혹시 그것이 몸을 비운다의 변형은 아닐까. 둘의 차이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가 한 편 있다. 시 속에서 시인은 “여럿이 수다를 떠는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던 질문 하나를 소개한다. 질문은 “산에 가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데, 산에 가면 어떤 점이 좋아요?”란 것이었고, 시인은 “어떤 점이라기보다 어떤 순간이 있어요”라고 답한다. 그 순간은 “오래 걸어서 지쳤을 때, 더이상 걷기가 어려운데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벅차게 남아 있을 때”라는 좀더 구체적인 대답으로 보완된다. 시인은 그때가 왜 좋은지에 대한 이유를 완성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그때 사실은 “혼자 속으로 외롭게 대답을 완성”했다고 말한다. 완성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얼떨결에 이유를 말할 기회를 잃은 나는 혼자 속으로 외롭게 대답을 완성해본다.
(“그때쯤이면 나를 잃어버릴 기회가 생기니까요.”
“무아지경?”
“그것과는 좀 다른데, 텅 비어서 어떤 것이 들어와도 되는 자리가 생기는 거랄까, 뭐……”
“그게?”
“나를 대신하는 그 텅 빈 자리가 좋은 거겠죠.”)
—「잡담」 부분

말하자면 나를 빠져나간다던 처음의 얘기가 이 시에선 나를 텅 비우는 순간으로 바뀌어 있다. 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그동안의 얘기는 이에 더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비우지 않으면 시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비유가 곧잘 이 비유에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비운다는 말대신 처음에는 몸을 빠져나간다고 했을까. 그것은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나를 있는 그대로 놔두고 시를 얻고 싶을 때 나를 빠져나가게 된다. 시도 소중하지만 채워진 몸으로서의 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방향의 혼란도 눈에 띈다. 몸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를 발견할 때가 많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때도 몸안으로 드는 것이 사실은 몸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일 때가 많다.

나는 내 안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심장 소리가 거세게 고막을 두드렸다.

그곳은 언젠가 와본 것 같은 계곡이었다.
평범하고 흔해서 기시감을 주는
그곳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공기에 흩어진 채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숨을 들이마실 때 코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내가 되었다.
—「다른 곳」 부분

시인은 자신의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나 사실 그곳은 나의 내부라기 보다 “양쪽 산이 가파르게 솟은 계곡”이다. 시인은 계곡에 있으면서도 “나는 나의 내부에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왜 시인은 계곡을 자신의 내부라고 하는 것일까.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어디든 오래 다니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나의 내부보다 더 나같게 된다. 외부가 내부가 되는 순간이며, 그 내부가 사실은 바깥으로 빠져나간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몸의 안으로 드는 순간에도 몸을 빠져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몸을 빠져나간다는 것을 과연 어떤 의미일까. 또 언어로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그의 시가 답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산길을 걸어온 저녁, 마침내 산의 출구를 나서면 해는 지고 어스름이 나직이 깔린 들판이 잔물결도 없이 응고된 안개로 퍼져나간다.
—「명자꽃」 부분

아마도 시인은 등산을 한 듯하다. 산길을 내려와 등산로 입구를 나섰을 때는 해가 지면서 저녁 어둠이 산아래쪽의 들판에 깔린 시간이었다. 들판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몸이 받아들인 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 속에서 그 풍경은 “잔물결도 없이 응고된 안개로 퍼져나”가는 움직임이 된다. 몸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몸만의 고집스런 방법이 있다. 그 몸의 인식에 의하면 참새는 날고 나는 지상에 서서 참새가 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채호기의 말대로 몸을 빠져나갈 수 있으면 “참새의 동공에 담겨/솟구쳐올라 시선 겨누는 대로 흩어”질 수 있다. 내 생각과 달리 몸을 받아적었을 때 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일상이 있을 뿐이다. 몸을 빠져나가야 몸이 속박하는 일상의 감각을 벗어나 나도 참새와 함께 움직이는 시의 세상을 살 수 있다.
다른 시의 일부분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창가에 앉았을 때
저녁이 물끄러미 얼굴을 디밀어
내가 거울인 양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겨울 저녁,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부분

원래는 창가에 앉아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보낸 저녁 시간이 몸이 겪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몸을 빠져나와 저녁을 비추는 거울로 변신하고 그 변신을 통해 저녁이 자신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게 만든다. 시인은 잠시 저녁의 거처가 된다. 그러면 어떤 점이 좋은 것일까. 그렇게 되면 “해가 지”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과 “빈 나뭇가지와 회색빛 얇은 하늘에/어둠이 조금씩 미세하게 스며들”며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는 저녁 시간이 “나에게 자신을 비춰보는 저녁의/감정 같은 것이”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내 몸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세상이다. 시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 세상에선 저녁과도 감정의 교류를 할 수 있다.

5) 눈과 눈, 눈과 눈과 눈, 눈과 눈들을 연결하는 회랑과 기둥들이
정교한 설계로 축조된 하얀 도시를
밟을 때
건축물이 부서지는 소리
다음에 발자국이 남는다. 어떨 땐 무릎 위까지 빠지며 허우적대다
깎아지른 단애로 둘러싸인 아득한 깊이를 남긴다.
—「눈이 쓴 산문에 앉아」 부분

눈이 많이 내렸을 때는 눈밭을 걸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나고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 그것이 몸을 빠져나가지 않았을 때 눈이 내린 세상에서 경험하는 우리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눈이 내린 세상은 시의 세상에선 “정교한 설계로 축조된 하얀 도시”가 된다. 현실에선 많은 눈이 내리고 밟을 때 뽀드득 소리가 나지만 채호기의 세상에선 한 세상이 건축되고 무너진다.
꽃병을 눈앞에 둔 채호기는 이렇게 묻고 있다.

저 꽃병은 자신이 흙이었던 때를 기억할까?
—「꽃병」 부분

우리에게 꽃병은 용도로 파악된다. 꽃을 꽂아두었을 때 꽃병은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채호기는 꽃병의 의미를 용도에서 찾지 않고 그것의 기원에서 찾는다. 기원으로 보면 꽃병은 한 때 흙이었다. 이는 사람들은 죽으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흔한 얘기와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지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꽃병의 자매”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원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채호기는 다시 꽃병에 대해 “아무것도 꽂지 않았을 때/비로소 자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그 물음 속에는 꽃병이 그냥 그 자체로 의미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쓰임새로 의미를 찾는 방법은 사실은 매우 폭력적인 방법이다. 용도가 없어진 대상을 폐기의 운명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폭력적인 시각으로 인간마저 재단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런 세상에선 인간에게 쓰임새 많은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하고 용도가 없어지면 인간마저 폐기하려 든다. 최소한 언어로 행동하는 시의 세상에선 그런 폭력에 맞서야 한다. 용도로 대상의 의미를 재는 세상은 있어선 안된다. 적어도 시의 세상에선 그러해야 한다.
또다른 시에서 채호기는 “새벽 숲에서 검은 사슴과 마주쳤”다고 했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한 나무가 일어서듯/갑자기 또다른 사슴이 일어섰고/둘은 화들짝 산 아래로 사라졌다.” 아마 모두가 사람이 두려워 도망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채호기는 그에 대해 “해칠까 무서워 도망간 거라고?”라고 반문한 뒤, 그런 생각을 “그건 인간의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시인이 짐작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새벽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다.
저녁에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겠다.
—「검은 사슴」 부분

사람들에겐 시인의 생각이 더 터무니 없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몸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몸을 빠져나가 언어로 행동하는 시의 세상으로 가면 우리는 시인의 터무니 없는 세상을 살 수 있다. 그 세상을 살면 숲의 주인은 사슴이다. 우리는 방문객이다. 방문객은 주인있는 땅을 들어가려면 항상 허가를 받아야 한다. 숲은 사슴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시인의 터무니 없는 생각이 사실은 올바른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시는 그런 세상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나를 빠져나가는 나 때문에 시를 곁에 세워두면 시인은 둘로 나뉘어진다.

나?
나라고 쓰면서 동시에 갈라진다. 하나는 내 몸을 가리키면서 파고들면서(물결이 배 밑바닥을 지나가면서 배가 일렁이듯) 공명하고(무엇이 무엇에 공명하는 것일까?), 다른 하나는 종이에 덧칠되면서 종이를 긁으면서 표면에 붙으면서 나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 부분

나는 이를 몸으로서의 나와 시로 구현되는 나로 구별했다. 몸의 세상은 일상의 세상이다. 그 세상에선 사슴이 인간이 무서워 도망을 친다. 몸을 빠져나와 언어로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 사슴이 허락해야 우리가 숲에 들 수 있다. 우리가 몸을 빠져나와 시의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시인은 써야 그 세상을 살 수 있고 나는 시인이 쓴 것을 읽는 것으로 그 세상을 살 수 있다.
(『포지션』, 2019년 봄호, 시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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