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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빠르고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속도의 세상을 가장 피부 가까이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세계이다. 가령 이용한의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 관심이 있다면 이제는 옛날처럼 중고서점을 뒤질 필요가 없다. 사실 중고서점을 뒤진다고 해도 두 시집을 손에 넣기는 쉽지가 않다. 두 시집이 중고서점에 나와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선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두 시집을 전자책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다. 시집은 나의 휴대전화로 곧바로 전송된다. 전송된 시집은 하나의 부피도 더하지 않은 채 내 휴대전화 속으로 자리한다. 나는 심지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전송된 시집을 읽을 수가 있다.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전자책의 세상에선 품절도 있을 수가 없다. 빠르고 편한 세상이다.
그러나 이 빠르고 편한 세상은 동시에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음의 불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이 사실 기계의 세상이란 것에서 온다. 책이 인간 세상의 것일 때는 서점을 찾아가 책을 찾고 직원이나 주인에게 내밀면 계산을 해주었다. 찾기 어려우면 물어보면 된다. 대형 서점이라면 찾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서점 안에 함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기계의 세상에선 어디에서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우리의 편리하고 빠른 세상은 사람들을 제거해 버린다. 속도의 세상에는 나밖에는 사람이 없다.
온라인 서점을 통하여 곧바로 손안에 책을 쥘 수 있는 세상은 집안에 앉아서도 책을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렇게 책을 샀다고 하여 책을 읽는 속도까지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 속도의 측면에서 보면 책방을 찾아가 책을 찾고 구입하는 속도가 종이책을 읽는 속도에 부합할 것이다. 책을 구입하기 위해 바치는 긴 시간은 불편이 아니라 사실을 책을 읽는 속도에 맞추어진 속도일 수 있다. 그것에 비하면 전자책의 구입 속도와 읽는 속도는 극과 극으로 갈라선다. 속도의 이원화는 편리를 불편으로 만들 수 있다. 서점에서 종이책을 구입할 때의 불편하고 오랜 시간은 읽을 때의 속도에 대한 예비 속도가 될 수 있다.
아울러 편리하고 빠른 속도의 세상은 이 속도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들을 이 속도의 세상으로부터 낙오시킨다. 속도의 세상은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과거로 밀어내고 낙오자의 꼬리표를 붙이려 든다. 이용한도 시대가 빠른 속도로 한 시대를 과거로 밀어내는 세상을 체감한 듯하다. 이번 세 번째 시집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에 실린 「날조된 측면」에서 “이를테면 1968년의 봄은 희미해져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8년은 그가 태어난 해이다. 그때 이후로 그가 태어났을 때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수많은 것이 생겨났다. 컴퓨터와 인터넷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없었다. 그가 알고 있으나 사라진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세상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968년은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이지만 세상의 빠른 변화를 생각하면 그 시절은 이제 아득하다.
자신의 세 번째 시집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에서 이용한은 속도의 세상을 추수하지 않는다. 아니, 속도의 세상을 역행한다. 물론 그 역행이 이용한 만의 시세계를 만든다. 그의 세 번째 시집에서 그 역행의 길을 따라간 나는 그의 속도로 흐르고 있는 인생과 묘생, 그리고 그의 여행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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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그의 인생을 살펴본다. 나이 서른을 두 해 앞두고 1996년에 펴낸 첫 시집 『정신은 아프다』에서 그는 “삶은 상처 받고 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그 상처는 “그 동안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아무도/내 곁에 있지 않다/어머니가 그랬고 첫사랑이 그랬고/내 그리운 친구마저 먼저 생(生)을 버렸다”(「아름다운 상처」)는 상실에서 오고 있었다. 그 상실이 가져온 것은 “사는 것이 무섭다 사랑하는 일도 겁난다”(「무지몽매한 날들」)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마흔을 두 해 앞두고 2006년에 펴낸 『안녕, 후두둑씨』에서도 삶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때의 시집 속에서 그는 “누구도/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는 저주를 뿌리칠 수가 없다”(「등푸른 자전거」)고 말했으며, 그때 삶은 저주가 되어 있었다. 또 그는 “어느 덧 나는 절반의 인생을 건너왔다”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삶을 “절반의 죽음에 다름 아닌” (「연어, 7번 국도」)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나는 망했다”(「나무아미—정선」)로 요약해 놓고 있었다.
첫 시집을 생각하면 20년이 넘는 세월이, 두 번째 시집을 생각하면 10년 넘는 세월이 다시 흘렀다. 그의 삶은 변했을까.
두 가지 변화가 눈에 띈다. 하나는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도망가지도 못하는 아내가 던지고 간/작고 하얀 알약”이란 구절이 그것을 짐작하게 한다. “요컨데 내가 아버지라는 게 가장 무서워요”라는 구절은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결혼과 아이의 출생은 큰 변화일 수 있지만 시 속에서 삶에 대한 입장은 표면상으로 보면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시인은 “웃는 표정을 걸어놓고 나는 울었다”고 했다.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울음마저 안으로 삼켜야 했던 삶이기도 하다. 시인은 “보세요, 여기가 이미 바닥이에요”라고 말하면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반지하 창문” 앞에 서 있다. 반지하의 삶은 그에게 죽고 싶어도 뛰어내릴 수도 없는 삶이다. 삶에 대한 회의가 등을 밀어도 바깥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한순간의 충동에 몸을 맡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이다. 세상에는 바닥보다 더 낮은 바닥이 있었고 시인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곳의 삶을 시인은 “불면을 건너면 불안”이 기다리는 삶이었다고 전한다. 어김없이 도래하는 내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에선 미래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인지 시인은 “가능성이란/불가능한 광년 너머에나 있는 것”이라며 “보세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구름이/방안에 가득해요”라고 말한다. 구름은 때로는 가벼운 우리의 마음을 얹어두는 곳이기도 하나 여기선 흐림의 다른 말이다. 시인의 삶은 흐림이다. 그리하여 한때 ‘상처’였고, 또 ‘죽음’이기도 했던 삶을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고 싶은 것과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달라요
둘 사이의 공백을 견디는 게 삶이죠
—「불안들」 부분
대개의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는 것은 곧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 둘은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용한은 그 둘이 다르다고 했다. 아마도 삶을 죽음의 경계 바로 곁에 세워두었던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미세한 차이일 것이다. 미세한 차이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알기가 어렵다. 굳이 그 둘을 구별해 보자면 “죽고 싶다는 것”에선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해 버리겠다는 마음의 움직임이 만져지며 “살고 싶지 않은 것”에선 힘겨운 삶에 등이 떠밀려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처지가 만져진다. 하지만 그 구별을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의 공백은 그렇게 크지 않다. 그 작은 공백을 견디는 것이 삶이라고 했으니 사실 둘은 어느 경우에나 모두 견디기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다.
이용한이 울음을 말할 때면 그 울음은 슬픔이라기보다 서러움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서러움을 삼키면서 사는 삶을 암시했지만 때로 임계점을 넘기면 울음을 참기가 어렵다.
창문을 열고 겨우 바깥을 넘겨보지 슬플 땐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슬픈 일이야 수도꼭지를 잠그다가도 울음이 쏟아지지
나는 그 무언가를 위해 이곳에 오지도 않았고
달아나려고 과속하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울고 있어요
죽고 싶은 순간에도 삶은 계속되고 있죠
—「고백」 부분
죽고 싶은 순간에도 계속되는 삶이라면 그 삶은 삶이라기보다 죽음에 가까워진다. 어떤 연유로 삶은 이렇게까지 내몰린 것일까. 이용한은 그의 삶을 몇 개의 짧은 구절 속에 요약해놓고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이 “모든 삶의…… 과거인 살았다를 횡단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속도의 세상은 앞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그가 “과거인 살았다를 횡단하며 살았다”고 했으니 속도의 세상이 향하는 방향을 역행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귀거래의 추억은 피치 못할 피난일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귀거래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니 그도 고향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고향은 상처 난 영혼의 치유처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에게선 고향도 일시적 도피처로 기능하는데 그친 듯하다.
이용한이 자신의 삶을 말할 때 등장하는 또 하나의 어구는 “무중력상태”(「날조된 측면」)라는 말이다. 무중력 상태에선 발 디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몸이 공중에 뜬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을 딛고 살아가는 듯했던 것이 그의 삶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 삶을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삶으로 이해했다.
속도는 빠른 발전을 가져다주지만 발전이 빠르다 보면 발전에서 인간이 제거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눈부신 경제 발전에서 무시되었던 노동자의 권리를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니 속도를 따라가지 않고 과거를 오간 속도의 역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살면 삶이 힘겨워진다. 기댈 곳도 없고, 또 돌아갈 곳도 없으면 더더욱 힘겨워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답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용한이 택한 길은 그와 똑같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거나 절망하고 있는 사람, 또는 아픈 사람의 곁에 서는 것이었다.
가령 아이를 키우면서 혼자 사는 여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혼자 사는 여자는 기댈 곳이 없다. 그 기댈 곳 없는 삶은 시인과 비슷하다. 무중력 상태를 산 시인과 마찬가지로 그 여자의 삶도 “오래된 허공을 걸”으며 기댈 곳이 없이 살아온 삶이다. 때문에 여자에게 “저녁은 발목이 아픈 여자의 형식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물이 새는 집에서” “몽키 스패너”를 들고 수도를 고치다가 물을 뒤집어쓴다. 시인은 그것을 “입술에서 발목까지 흘러내린 악몽”이라고 적는다. 온몸에 물을 뒤집어쓴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을 겪으면 삶이 서글퍼진다. 그러나 삶은 어떻게 살아도 삶이다. 인생은 화려하고 성공한 삶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한밤의 몽키 스패너」 부분
자신의 삶에선 죽고 싶었던 순간이 되었을 수 있었던 순간이지만 시인은 그 순간에 여자의 삶을 챙겨준다.
시인은 또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있는 한 사내의 곁을 지킨다. “고래의 밤은 깊고 사내는 심해에 잠겨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사내는 밤늦도록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다. 시인은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는 고래로, 그 옆에서 그를 위로하는 사람은 사내라고 부른다. 사내라고 지칭된 것을 보면 남자이지만 “꿰맨 자국이 역력한 원피스 지퍼”의 옷을 언급한 것을 보면 여자이다. 아마도 여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래를 위로 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여자에게 겹쳐지면서 여자는 남자가 된다. 아마 “내게도 고래 심줄 같은 악연이 있었다”며 “사는 게 끝 간 데 없는 벼랑이었”고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끝낼 수도 있었다”는 사연을 털어놓는, 그러면서 “조용히 돌아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린 술 취한 남자에게 건네는 여자의 위로는 곧 시인의 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 그것이 여자가 사내가 된 연유이기도 할 것이다.
쓸쓸함이야 쌓이면 얼마나 쌓이겠냐고
바다면 어떻고 바닥이면 또 어떠냐고
밀물지는 고통과 썰물지는 세월이 만났으니
꽃처럼 흩어지고 물처럼 철썩거리며
우리 그렇게 밀려나서 살자고
사내의 언 손이 고래의 신음을 끌어안는다
—「고래의 밤」 부분
위로의 순간에는 바닥에 이른 삶 또한 삶이 된다.
이용한은 이번에는 아픈 사람의 곁에 서 있다. 그 삶은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네 알”의 ‘알약’에 의지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의 삶이고 그렇게 불면을 앓다 약에 의지해 잠들면 “반쯤 죽은” 듯이 잠에 드는 삶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이며, 그런 측면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삶이고, 당사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삶을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애당초 마음이 다치고 몸이 젖는 일이어서 나는 자꾸 뒤척이며 흘러갈 것이다 오늘 따라 당신이 말아주던 말간 국수가 먹고 싶었고, 유언처럼 손바닥에 가지 마, 라고 적었다
—「가지마」 부분
이용한에게 사랑이란 대책없는 삶을 그 삶에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서 뒤척이며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불면의 삶이 있고 그 삶에게 “밤은 길다.” 그러나 불면은 아울러 자는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불면의 시인은 자는 얼굴에 손을 뻗는다.
너의 불 꺼진 얼굴을 갸륵하게 만져본다
—「기억의 고집」 부분
불 꺼진 얼굴은 자고 있는 얼굴이다. 시인은 그 얼굴을 자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불 꺼진 얼굴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잘 지내는 사람을 두고 얼굴이 훤하다고 말한다. 불꺼진 얼굴은 그 반대일 것이다.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불면은 소리 없는 연민의 순간이 된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바닥으로 추락한 삶에 연민의 손을 내밀자 삶이 그 스스로 의미를 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삶이 별건가, 발바닥이 밑바닥을 훑고 가는 것
이건 가슴이 아니라 심장이 말하는 소리다
—「아홉시의 랭보 씨」 부분
이용한은 “내가 사랑한 것은 12월의 어쩔 수 없는 목련이다”라고 고백한다. “12월”은 목련이 피는 시기가 아니다. 시기를 맞추지 못한 목련의 운명은 뻔하다. 그것에 마음을 내준 사랑도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이다. 이용한은 그러한 운명을 겪는 삶을 “발바닥이 밑바닥을 훑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걷는 것이 아니라 훑고 간다고 했으니 발바닥은 밑바닥을 모두 감당할 것이다. 바닥을 훑고 가는 걸음은 발을 들고 험한 곳을 피해가지 않는다. 길이 자갈밭이라면 자갈밭의 험한 표면을 모두 감당하게 된다. 시인에겐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삶이 곧 삶이다. 시인은 이 얘기를 가슴이 아니라 심장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한다. 심장은 뛰어서 생명을 관장한다. 사랑이 길의 밑바닥을 모두 감내하는 발바닥 같은 것이라면 그 사랑은 가슴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심장이 되어 상대의 생명을 내가 뛰는 것이다. 내가 살면 상대가 살고 상대가 살면 또 내가 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무너진 삶이 무너진 삶의 곁에 서면 몰락의 속도가 가속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 무너진 바닥의 삶이 무너지질 않는 것이다.
무럭무럭 무너진 인생에게
혐의 없이 밤이 온다
—「무관한 근황」 부분
무럭무럭이란 말은 피어오른다거나 자란다와 결합될 때 자연스럽다. 무럭무럭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용한은 이를 “무너진 인생”과 결합시켜 놓고 있다. 무럭무럭이 무너진 인생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인생이 무너지면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이러한 인식 속에선 삶이 일방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는 삶의 자리에선 동시에 삶이 계속 자라고 있다. 나는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세상에 무너진 인생은 없고 다만 속도에 저항하며 자신의 삶을 산 인생이 있을 뿐이라는 전언으로 받아들였다.
무너졌다는 것은 실패한 인생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성공을 바란다. 실패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들이 말하는 성공이 과연 성공일까. 사회는 대기업에 취업하면 성공한 것으로 본다. 그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오르면 더더욱 성공이다. 그러나 대기업의 임원이 하는 일이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기업이 저지른 부정의 보도를 막는 일이고, 그것을 들어준 언론사의 취업 청탁을 들어주는 일이었다면 그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법관은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성공한 것이다. 대법관에 올랐다면 더더욱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대법관이 된 자가 권력과 결탁하여 자기 이익을 꾀하는데 재판을 이용했다면 그것을 성공한 삶으로 볼 수 있을까. 성공은 성공이 아니라 성공으로 날조되는 측면이 있다. 무너진 삶은 그러한 성공에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무너진 삶은 무너진 자리에서 동시에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으며, 아울러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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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이어 묘생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고 고양이는 묘생을 살며, 이용한에게 있어 묘생은 특별하다. 아무리 세상이 인터넷이나 무선통신의 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변화를 추구해도 고양이에게 그 변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고양이는 언제나 변함없이 묘생의 속도를 고집한다. 개가 늑대의 속도를 버리고 인간의 속도와 타협을 한 측면이 있는데 반하여 고양이에겐 그러한 타협이 없다. 그 묘생의 속도를 조금 엿보면 다음과 같다.
평생 밖에서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골목은 갸륵하고 지붕은 달콤하죠
—「고양이 아가씨」 부분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을 하는 고양이의 삶은 고양이의 속도로 사는 삶이다. 물론 고양이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묘생의 시간 속에서 속도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삶의 피곤을 이완시켜 준다.
시골의 한물간 다방에서 주인이 “물끄러미 연속극”을 보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삶 속에도 그 자리에 고양이를 한 마리를 가져다 놓으면 시대의 변화에서 밀려난 삶이 얼마든지 감내가 된다. 아니 오히려 밀려난 삶의 속도가 묘생의 속도와 잘 어울린다.
참 이상하죠? 고장난 것들을 사랑한다는 건
물끄러미 연속극이나 보면서
바닥에 대한 믿음 하나로 그냥 살아요
—「불가능한 다방」 부분
시인의 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그 지극한 사랑은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으면 그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의 죽음 위에 자신의 죽음을 얹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고양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이 된다.
그냥 길이 되는 거다
고양이처럼 고양이처럼
죽으면 납작해지는 거다
—「로드킬」 부분
사랑이 궁극에 다다르면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길로 삼을 수 있다. 그때면 고양이는 죽음마저도 온몸으로 껴안은 동물이 된다. 누구도 죽음을 껴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고양이는 길에서의 죽음을 껴안고 길이 된다. 그리고 고양이의 죽음은 죽음 같은 삶도 그렇게 껴안을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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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행 얘기를 할 차례가 되었다. 이용한이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했다는 것은 지명이나 숙소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많은 시편들로 쉽게 확인이 된다. 그가 인생을 말할 때의 시 속에서 우리가 접한 현실을 생각하면 그 많은 여행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행을 삶의 여유로 보는 입장에선 더더욱 그럴 여지가 크다. 여유 없는 삶에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구심에 앞에서 이용한의 여행에 대한 조언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떠나고 보니 문득 나는 떠나고 싶어졌다
—「아홉시의 랭보 씨」 부분
우리의 일반적 사고 속에선 대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먼저이며, 그 마음이 등을 밀어 여행이 시작된다. 즉 떠난다는 행위는 떠나고 싶다는 욕망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용한은 욕망과 행위의 순서를 뒤바꾼다. 그는 떠나는 행위를 앞세우고 욕망이 뒤를 따르게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떠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욕망이 몸을 따라오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여 떠난 이용한의 여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고 채우는 여정이 아니다. 그에게 여행이란 그곳의 속도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만달만달 하면서
다 늦은 낙타의 고삐를 노란 달에 내다 건다
—「만달고비」 부분
만달고비는 고비 사막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몽골의 도시이다. 사람들은 사막을 보러 가는 길에 이곳에 들르지만 시인이 이곳에서 본 것은 그곳만의 속도이다. 그곳의 속도는 만달만달하고 흐르며 사람들의 움직임에 그대로 배어 든다. 이는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달은 공중에 매달려 야크야크 운다
—「야크호텔」 부분
달은 어디서나 똑같지만 “해발 4800미터의” 야크호텔에선 야크야크하고 운다. 그곳에 사는 동물의 울음이 달에 밴 결과이다. 이용한에게 여행의 가장 큰 미덕은 야크호텔에 머물 때 그곳에 사는 동물의 울음이 밴 달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며 잠시 그 야크의 속도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몽골의 붐브그로로 자리를 옮겨도 마찬가지이다. “붐브그르에서는 바람이 붐브그르 붐브그르”불며, 그곳의 아이들도 같은 속도를 보여준다.
먼지 속에서 아이들은 붐브그르 붐브그르 뛰쳐나온다
—「붐브그르」 부분
붐브그르 가면 바람이 그곳만의 속도를 갖는다. 그 속도는 자연의 속도이다. 인간을 채근하거나 경쟁으로 내몰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깨닫게 된다. “티베트의 시간은/말과 야크가 걷는 속도로 흘러간다”는 것을.
티베트의 시간은
사원에 기댄 라마의 낮잠처럼 갸륵하고
설원을 건너는 나비떼처럼 흩어진다
란창강은 란창란창 휘어지고
얄룽강은 얄룽얄룽 흘러간다
—「티베트의 시간」 부분
멀리 여행지만의 얘기가 아니다. 여행지에서 그곳만의 속도를 체감하고 돌아오면 이 땅에서도 아직 자연이 자연의 속도를 버리지 않고 흘러간다.
가만히 전생의 허약함을 앓는 봄밤에
이왕이면 우리 죽지 말고 멸망하자
희미하게 굴러온 별과
곡성곡성 흘러가는 강물이나 중얼거리며
우리 울지도 말고 낙화하자
—「곡성」 부분
그리고 여행은 곧 그곳의 속도이기 때문에 속도를 맞추면 일산의 마두역에서 몽골의 서쪽으로 위치하는 알타이 아이막으로 훌쩍 날아갈 수 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마두역을 열두 바퀴 돌면 알타이 아이막이다 이건 내가 알타이를 여행할 때 써먹는 수법인데, 반드시 캔자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가 나오는 리시버를 왼쪽 귀에 꽂고 있어야 한다 오른쪽은 위험하고 낭떠러지다 꼭 기억해둘 것은 구형의 노턴 500cc 포데로사가 필요하다는 것, 거기에 걸터앉아 텡게르, 텡게르 두 번을 외치면 부웅, 하고 동체가 프로펠러처럼 알타이 언덕으로 날아간다 그러나 체를 한 번만 부르면 사법연수원으로 떨어지고, 텡게르를 한번 더 부르면 지구의 끝으로 곤두박질친다
—「마두에서 알타이 가는 법」 부분
마두역은 일산에 있는 한 전철역이다. 마두역에서 알타이 아이막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마두역을 알타이 아이막의 속도로 거닐면 마두역이 알타이 아이막이 된다. 여행의 경험은 이곳에서 알타이 아이막의 속도로 걸을 수 있게 해주며, 그 속도로 걸으면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없어진다.
남들보다 앞서겠다는 경쟁의 욕망으로 속도를 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이 가진 그것만의 속도를 살면 봄에 수수꽃다리가 꽃을 피울 때면 꽃이 있는 역이 역의 이름을 꽃에게 내주며, 그러면 그 역이 어디에 있든 그곳은 수수꽃다리역이 된다.
우리 끝없는 수수꽃다리역으로 가요
망가진 표정이 겨우 지루한 혀를 내민다
안개나 바람이 속도를 감추는 곳으로 가요
하품이 길게 누운 해변이거나
자발적 실종자의 게스트하우스
뾰족하고 모난 것들의 이마가 쾅 콰앙 노크하는
이끼의 욕조와 싸구려 마사지 클럽이 착하게 뒤섞인
심심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휴게소에서 우리 만나요
—「수수꽃다리역」 부분
속도의 세상에 매여 살면 수수꽃다리가 피는 것도 모르고 계절을 지나가게 된다. 성공을 좇는 삶이 그렇게 되기 쉽다. 세상의 어떤 삶도 바쁘게 살기 위해 속도의 세상을 쫓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은 바쁘다. 그러나 속도의 세상을 벗어나려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속도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이 여행에서 얻어질 수 있다. 여행을 멀리 잡을 필요도 없다. 수수꽃다리가 꽃을 피울 때 수수꽃다리가 있는 곳을 찾아가면 된다. 우리를 맞아주는 것은 꽃이지만 동시에 꽃의 속도이기도 하다. 꽃은 자신만의 속도로 우리가 너무 빠르게 달리면 계절을 지나치게 된다는 것을 알린다. 돌아올 때면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속도를 되찾게 될 것이다. 이용한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얻은 것도 인간의 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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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소년’을 만난다. “유역을 돌아 차부에 이를 때까지/소매마다 덕지덕지 목련이 묻어 있었다”는 구절로 미루어 보면 강가를 따라 버스 터미널까지 걷기를 좋아했고, 목련꽃을 좋아했던 소년이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손금에 칼을 그으며 이별을 외던/소년은 마침내 약한 곳으로 떠났다”는 구절은 소년에게 자해를 한 시절이 있었으며, 어딘지 모르나 고향을 떠났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따금 세찬 사투리에 섞여 동백이 졌다”(「내가 소년이었을 무렵」)는 구절로 짐작하면 말이 크게 다른 지방으로 사는 곳을 옮긴 것 같으며 목련 대신 그곳에는 동백이 많았던 것 같다.
소년은 목련의 속도에서 자랐으나 자라면서 그 속도를 잃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그 상실이 방황을 불렀다. 그러나 바닥의 삶 속으로 무너진 이용한은 그곳에서 멸망했으나 멸망한 삶이 아니라, 또 속도 경쟁에서 밀려난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를 지킨 인생과 사람들을 본다.
바닥의 삶만이 그의 속도를 확인시켜 준 것은 아니다. 고양이도 그에게 삶의 속도를 일깨워준 소중한 존재이다. 여행 또한 그에게 세상에 아직 속도를 잃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 묘생, 여행 속에서 모두 자신의 속도를 되찾는다. 아마도 시인은 다시 찾은 그 속도의 세상을 어릴 적의 자신에게 돌려주고 싶었나 보다. 시의 마지막 자리에 소년을 세워둔 연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용한의 세 번째 시집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어렴풋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시집 속에서 시들이 용한용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이용한 시집,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문학동네, 2018)
2 thoughts on “자신의 속도로 흐르는 인생, 묘생, 그리고 여행 —이용한 시집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이런 글이 꽁짜라니! 이래서 만날때 마다 밥 사고 싶어지잖아요.
이런 댓글이라니. 만나서 밥사주고 싶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