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세상, 인간의 세상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

우리는 인간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짐승의 세상은 아닐까. 내가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읽으면서 자꾸 되풀이하게 된 질문이었다.
“늑대들이 왔다”는 말로 시작하여 늑대를 사냥할 때 얼음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피를 묻힌 칼을 거꾸로 세워놓는다는 에스키모인들의 사냥법을 기본 얼개로 삼고 있는 시가 있다. 시는 늑대의 운명을 이렇게 전한다.

먹는 것이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녁이 왔고
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
—「늑대들」 부분

시인은 늑대의 얘기를 전하는데 나는 이를 동물의 얘기로 명확하게 경계를 그어 구별할 수가 없었다. 늑대는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우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영악하고 잔혹하여 자본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타인의 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그것을 사냥의 성공으로 자랑한다는 생각이 시를 읽고 난 뒤에 고개를 들었다.
이는 시인이 “누의 정강이와 성기를 물고 늘어지는 하이에나들”을 말하며 “누가 끝내 잡아먹힌” 세상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인은 누떼들이 이동할 때 내는 소리를 “둠둠둠둠 둠둠둠둠”이라는 말 속에 담는 것으로 시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시의 마지막에서 “어둠둠둠”(「하이에나」)으로 변환된다. 소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떼의 이동 소리가 아니라 어둠이 세상을 점령한 느낌이 강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이를 동물의 세계로 명백하게 경계를 그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자연 생태계가 인간의 세상에서도 경쟁의 이름으로 곧잘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동물의 얘기를 들으며 자꾸 사람의 세상을 그 세계에 겹치고 있었다.
짐승의 세계를 짐승의 세계로 선을 그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시인이 전하는 사람 세상의 얘기 때문이었다. 「탄센의 노래」가 좋은 예이다. 시는 “불의 노래”와 “비의 노래”를 동시에 전한다. 불의 노래는 “노래할 때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지며 “불은 번져가고” “강속으로 걸어들어가며 노래를” 부르면 “강물도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비의 노래는 반대이다. “노래할 때마다 불꽃이 하나씩 꺼”진다. 노래의 힘으로 “비가 내리고,” 그러면 불의 노래로 끓어올랐던 “강물도 가라앉기 시작”한다. 시는 이 불과 비의 노래가 비극으로 끝났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노래의 휘장은 찢기고
비에 젖은 잿더미만 창백하게 남아 있는 밤
불과 비도
어떤 노래도 더이상 들리지 않는 밤
—「탄센의 노래」 부분

시의 어디에서도 짐승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짐승의 세상이 시의 바깥에 은폐되어 있을 때가 있다. 그 은폐된 세상을 확인하려면 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를 빠져나가야 한다. 이 시에는 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이 제목과 시에 덧붙여진 주석에 마련되어 있다. 주석은 이 시가 “고대 인도의 가수 탄센과 그의 딸에 관한 신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 뒷문을 통하여 시를 빠져나온 뒤 검색을 하면 우리는 시의 기반이 된 현실을 알 수 있다. 그 현실은 불의 노래가 탄센의 노래이며, 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탄센의 딸이라고 알려준다. 딸은 비의 노래를 부르다 죽는다. 그러므로 탄센의 노래는 딸의 죽음을 불러온 비극의 노래이다. 현실은 이 비극의 출발점에 두 사람이 아니라 왕와 탄센을 시샘한 자들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파괴했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모두 사람이라기보다 짐승 같은 자들이다.
시인은 시 속에 노래를 담아 두면서 불의 노래와 비의 노래를 전하고 그것이 비극의 노래임을 암시했을 뿐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짐승의 세상에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노래였고, 때문에 짐승의 세상을 막아 그 노래를 보호하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비극의 연원을 찾아 시의 뒷문을 나온 내가 던져진 곳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도 사실은 짐승의 세상이었다.
이는 「파일명 서정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서정시라는 제목의 서류철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짐작하게 될까. 당연히 서정시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시는 주를 통하여 시의 제목이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의 제목에서 왔음을 밝힌다. 때문에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는 서정시가 들어 있지 않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시인 쿤쩨에 대한 감시와 사찰의 내역이다. 「탄센의 노래」 때와 달리 시인은 이번에는 현실을 시의 바깥에 두지 않고 시 속에서 그대로 드러낸다. 감시와 사찰은 몰래 살펴보는 것이지만 시인은 그 행위를 감금 행위로 본다.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명 서정시」 부분

통일전의 동독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이는 멀리 남의 일이 아니다. 가까이 이명박 정권에서도 민간인 사찰이 있었고, 박근혜 정권에선 문화예술계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사찰이 아니지 않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어떤 사찰에 기초한다는 측면에서 사찰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희덕에게 있어 그러한 행위는 몰래 엿보거나 차별을 하는 행위를 넘어 사람을 사찰과 블랙리스트 속에 가두는 감금 행위이다.
감시나 사찰이 왜 곧 감금인지에 대해선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다른 시가 그 이해를 돕는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로운 배후가 생겼다
그들은 전화선 속에서 숨죽여 듣고 있다가
이따금 지직거린다, 부주의하게도

그들은 엿들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새로운 배후」 부분

감시가 나쁜 것은 그것 자체가 나쁜 행위이기도 하지만 더 나쁜 것은 감시가 세상을 온통 감시의 세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전화를 받다가 들려오는 “지직거”리는 소리는 감시가 없을 때는 그냥 잡음에 불과하지만 감시의 세상에선 감시자들이 “전화선 속에서 숨죽여 듣고 있다가” “부주의하게” 내는 도청의 소음으로 의심받는다. 시인은 이 때문에 “새로운 배후가 생긴 뒤로/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귀가 운다”고 말한다. 곤두세운 신경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시인이 감시자들을 감시자라 말하지 않고 “새로운 배후”라고 말한 것은 사실은 상당수가 감시자가 아니라 감시로 인한 의심의 대상들이어서 이를 구별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시로 인하여 모든 것이 감시에 대한 의구심으로 뒤덮이는 세상이 인간다운 세상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인간들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깝다.
인간의 세상이 사실은 짐승의 세상이었다는 가장 명확한 예는 일제 병탄시기에서 찾아진다. 시인은 그때의 세상이 짐승의 세상이었음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죽음을 당한 여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전한다.

그들은 죽은 개를 묻듯 우리를 묻었습니다.
커다란 구덩이에, 시체 위에 시체를,
우리는 썩어가면서도 누군가의 등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요?
죽은 줄도 모르고 이따금 묻습니다.

우리는 사람도 여자도 될 수 없었습니다.
철조망 너머로 달맞이꽃이 피어도
달거리 동안 피를 흘려도
우리는 짐승들을 받고 또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짐승, 남자라는 짐승, 군인이라는 짐승,
그들은 죽은 개를 던지듯 우리를 함부로 내던졌습니다.
—「들린 발꿈치로」 부분

그 시절이 짐승의 시절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해방된 땅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어느 날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있었다는 점에서 짐승의 시대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짐승의 시대를 넘어선 것일까. 시인에게 그 답을 구하면 사정은 그렇질 못하다. 시인은 “나날들이 나달나달해졌다”며 “끝까지 사람으로 남아 있자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다.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여전히 힘든 세상이란 뜻이 된다. 그러면서 시인은 “축생도에 속한 존재들”이 “오늘도 우굴거리다 우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축생도는 죄업 때문에 죽은 뒤에 짐승으로 태어나 괴로움을 받는 세계이지만 시인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축생도라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는 죽기도 전에 이미 짐승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의아한 세상이 된다.

절망은 길가의 돌보다 사소해졌다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나날들」 부분

절망은 물론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짐승으로 살아야 한다는 데서 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절망의 세상에서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으며 산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희덕의 시에서 그 답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듯하다. 시인의 아버지는 「나평강 약전(略傳)」에 요약되어 있다. 나평강이 나희덕의 아버지란 점은 같은 성씨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시의 전언에 따르면 나평강은 “얼마간의 가축을 키웠”으며 “병아리들을 부화시켜 마당에 놓아먹였”다고 한다. 자란 곳이 시골이었다면 그 나이대의 아버지들에게 흔히 있던 일일 수 있다. 또 시는 그가 “입덧이 심한 아내를 위해/얼룩염소 한마리를 사다가 젖을 짜 먹였”으며, 그 아버지를 “염소가 언덕에서 풀을 뜯을 때/가만히 앉아 무슨 생각인가를 하염없이 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아버지가 남긴 기억은 “염소가 풀을 다 뜯은 후에도/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다”는 구절로 이어져 있다. “언덕의 풀처럼 나지막하고 바람에 잘 쓸리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아버지가 나희덕에게 남긴 인상이었다. 시는 아버지가 먹고 사는 일 이외에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이나 음악 소리에 시간을 내주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지막하다고 했으니 그가 세속적인 높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고 바람에 잘 쓸리는 사람이었다고 했으니 자연친화적인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정리한 아버지에 대한 간단한 약전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갓 난 달걀과
마약 짜낸 염소젖,

생전에 그가 식구들에게 건네준 전부였다

그보다 더 따뜻한 것을 알지 못한다
—「나평강 약전(略傳)」 부분

시인은 아버지가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 배부르거나 맛난 것이 아니라 “따뜻한 것”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배를 채워준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체온으로 채워준 것이다. 삶이 먹고 사는 것으로 모두 채워지는 세상에서 시인이 사람을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시들 가운데선 「주름들」이 가장 인상적이다. 주름은 세월과 늙음의 징표이지만 시인은 어머니의 주름을 파도로 보고 있다.

이 해변에 이르러
그녀는 또 하나의 주름에 도착했다
—「주름들」 부분

아마도 어느 날 바닷가로 떠난 어머니와의 여행이 이 시를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해변에서 어머니의 주름은 “밀려오는 파도 역시/바다의 무수한 주름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주름은 곧 파도인 것이다. 둘의 사이는 사실 잘 이어지질 않는다. 주름과 파도 사이를 이으려면 주름의 생긴 모양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름은 파도의 물결을 닮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주름을 보며 세월을 읽는 것이 아니라 파도의 모양을 본다.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가 주름을 통해 세월을 말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 주름으로 파도를 일으키는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주름을 만든 세월의 많은 부분이 먹고 사는 일에 바쳐졌을 것이나 시인의 어머니에게 그 주름은 일렁이며 일어나 파도가 된다. 파도의 주름을 가졌으니 그 어머니는 넓고 깊은 바다였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어머니라면 시인이 짐승의 세상을 견디며 인간을 지켜가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지만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기 보다 짐승의 세상에 가까울 때가 많다. 나희덕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는 그 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울러 그가 그 세상에서 사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소중한 두 가지의 힘도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밝혀두어야 할 점은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지는 않다.
(『포지션』, 2019년 봄호, 시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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