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영은 시집의 제목을 통하여 이렇게 묻고 있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라고. 내 대답은 많이 어지럽다이다. 왜 어지러운 것일까? 그의 시속에서 세상이 뒤집히기 때문이다. 전복된 세상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복된 세상은 동시에 즐겁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전복된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 즐거운 경험은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에서 얻어진다. 롤러코스터는 우리들을 실은 뒤 비틀고 뒤집으며 달린다. 우리는 어지러우면서도 즐겁다.
롤러코스터와 달리 세상을 뒤집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계영의 시는 언어에 세상을 싣고 비틀고 뒤집으면서 달린다. 시의 세상에선 그런 전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그 어지러움은 곧잘 시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언어의 롤러코스터에서 손잡이를 놓치고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도 거의 대부분의 시에서 롤러코스터의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시에는 어떤 안전 장치도 없었다. 그렇지만 떨어져 나가도 다치는 법은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언어의 손잡이를 놓치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유계영을 읽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언어의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지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순간들의 첫순서를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본다. 새벽마다 팬티를 뒤집어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어떻긴 뭐가 어떻겠는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전혀 다른 재미난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선 새벽에 “어제의 팬티를 뒤집어 입”고 오늘을 시작하면 일단 “냄새가 앞서나”가며 하루를 이끌어주고, “내일은 오늘을 뒤집어 이은 채 앞장” 서서 또다른 하루를 펼쳐준다. 그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지퍼의 안쪽에서 아침이 시작되지 않을까. 아마도 시인이 이렇게 묻게 된 까닭일 것이다.
아침의 빛깔은
누구의 고장난 지퍼에서 새어나오는 것일까
—「더 지퍼 이즈 브로큰」 부분
아침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팬티를 빨아 입지 않고 뒤집어 입는 사람에겐 아침마저 주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시인은 그러한 사람의 아침을 “고장난 지퍼”의 뒤에서 열어주고 있다. 아울러 그런 아침마저도 거저 오는 것이 아님도 밝혀놓고 있다. 그런 아침이나 새벽을 살기 위해선 “안팎의 무늬가 동일한 팬티를 매일 성실하게 뒤집어 입고 골목을 서성이는 새벽의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팬티를 뒤집어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에 대해 미간을 찌푸리며 반응했던 세상보다는 훨씬 재미난 세상이다.
아침 얘기를 침대 얘기로 옮겨보기로 한다. 사실은 이 또한 아침과 관련된 얘기이다. 만약 침대에 바퀴가 달려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침대를 옮기기 편하게 달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유계영의 반응은 좀 다르다.
침대에 바퀴가 달렸다는 건
아침을 피해 달아날 준비가 되었다는 것
—「다이얼」 부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아침의 찬란함을 말해도 우리는 일찍 일어나 그 아침을 맞기 보다 조금만 더를 외치며 침대를 파고든다. 그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침대에 바퀴가 달려 있으면 일어나서 출근하거나 학교를 가야할 아침으로부터 달아나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잘 수 있다. 심지어 아예 “해가 뜨지 않는 곳”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눈뜰 수도 있다.” 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밀고 달아나면 “옆집 소파에 누워 빈둥거려”온 “죽음의 사자”가 쫓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훨씬 더 재미난 세상아니겠는가.
우리의 눈에 익숙한 것이 시인의 눈에 완연하게 달리 포착되는 경우가 있다.
비눗갑 밑에서 부글거리는 거품들이 마침내 투명이 되는 것을 보아라
—「눈금자를 0으로 맞추기 위해」 부분
우리의 눈에 거품은 터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하지만 시인의 세상에선 거품들이 마침내 투명이 되는 것이다. 터진다와 투명이 되는 것은 다르다. 터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소멸을 뜻하지만 투명이 된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더 많은 거품이 터질수록 우리 곁을 더 많은 투명이 채우게 된다.
포도는 검게 익는다. 마치 사과가 사과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다. 떨어지는 사과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뉴튼은 사과를 아래쪽으로 당기는 힘을 보았다. 유계영도 그렇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본다.
뿌리는 흙속에서 어떤 기억을 훔치길래
열매가 검게 물드는 것인지
포도알 속에 웅크린 검정을 알알이 발음해보며
—「심야산책」 부분
시의 세상에서 포도는 검게 익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흙속에서 어떤 기억을 훔쳐다 열매를 검게 물들이는 것이다. 포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 “포도알 속에 웅크린 검정을 알알이 발음해보”는 일이다. 만약 포도가 정말 시인의 말대로 흙속에서 훔쳐온 어떤 기억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포도에서 그 기억을 들을 수 있을까.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방법은 좀 달라진다. 그 기억이 포도알 속에 검정으로 웅크리고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을 들으려면 입안으로 삼키면서 들어야 한다. 즉 우리가 포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 기억을 발음하며 듣는 일이 된다. 포도만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포도는 검게 물든 기억이지만 어떤 과일은 붉게 물든 기억이며 또 노랗게 물든 기억도 있다. 우리는 열매를 먹을 때 기억을 먹는다. 기억은 결국 우리의 몸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열매를 먹을 때마다 온갖 열매를 물들였던 흙속의 기억이 된다. 흙속에는 수많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대개는 나뭇잎의 기억일 것이며, 한때 색을 가졌던 것들의 기억일 것이다. 우리의 몸은 열매를 먹을 때마다 그 기억이 된다. 열매를 맛으로만 먹던 세상보다는 훨씬 괜찮은 세상이다.
유계영은 자주 우리의 일상적 인식을 뒤집는다. 하지만 뒤집힌 세상에서 우리는 혹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뒤집혀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그는 뒤집어서 오히려 바로 세우고 있는 것이다. 다음 구절은 좋은 예이다.
빛의 반대는 어둠이 아니라 빛의 없음입니다
포승줄에 묶여 줄줄 끌려나오는 빛의 암살자들은 압니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없음입니다
—「반드시 한쪽만 유실되는 장갑에 대하여」 부분
우리는 대개 빛의 반대를 어둠이라고 생각하지만 유계영은 빛의 없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빛의 부재를 빛의 반대로 본다. 그러면 어둠과 빛의 부재는 다른 것일까. 빛이 없을 때 어두운 것 아닌가. 둘은 잘 구별되지 않는 듯 보인다.
이 둘의 다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내가 택한 방법은 밤의 골목길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다. 가로등은 어둠 속의 빛이다. 어둠 속의 빛은 빛의 있고 없음을 확연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켜져 있으면 빛이 있는 것이고 꺼져 있으면 빛은 없는 것이다. 빛의 반대가 어둠이 아니라 빛의 없음임을 체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돌을 던져 가로등을 깨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빛의 암살자”이다.
빛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때가 있다. 빛의 동의어로 쓰이는 다른 말로 희망이란 말이 있다. 희망은 빛의 없음이 빛의 반대어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일제 병탄 시기에 독립 투사들은 모두 우리들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의 빛이었던 셈이다. 만주국의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성적이 좋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할 기회를 잡고 일제관동군 장교로 근무하며 독립군을 학살했던 자는 “빛의 암살자”이다.
빛의 반대를 빛의 부재라고 말한 시인은 삶의 반대를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없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죽느니만 못한 삶이나 살아도 사는게 아닌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을들의 삶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대엔 모두가 살아 있으나 수많은 이들이 삶의 반대편으로 몰려 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러 곳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내놓는다. ‘고깃집’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마련한다. 진짜 나무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조 나무이다. 나무에는 작은 전구들을 휘감아 놓는다. 그것이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유계영의 세상에선 그 트리가 다음과 같이 바뀐다.
모조 나무를 휘어감은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잎사귀에 빛을 물린다 어둠도 없이
환한 젖가슴을 내어놓고서
—「레이스 짜기」 부분
전구들이 잎사귀에 젖을 물리듯 빛을 물리고 있는 것이 시인이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받은 인상이다. 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일까. 원래는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조의 인생에게도 따뜻하게 젖을 물리는 것이 크리스마스 때 실천해야할 사랑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단순히 장식을 보는 자리에서 시인은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본 셈이다.
시 속의 어떤 구절에서 시인이 바위의 크기를 말할 때면 나는 도대체 그 크기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해변과 왼손잡이용 식칼의 거리만큼 큰 바위가 될까
—「해는 중천인데 씻지도 않고」 부분
시인이 말하는 바위는 어느 정도의 크기인 것일까. 해변은 익숙하다. 해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왼손잡이용 식칼은 낯설다. 모두가 물을 것이다. 식칼도 왼손잡이용이 있어? 있다고 한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용 식칼로 파를 썰면 파가 칼의 옆으로 묻어난다. 하지만 왼손잡이용 식칼을 사용하면 파가 칼옆에 하나도 붙질 않는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과 있는데도 있는 줄 몰랐던 낯선 것 사이의 거리가 시인이 말한 바위의 크기일 것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바위로선 익숙하면서도 낯선 크기일 것이다. 무슨 바위가 저렇게 크냐거나 바위치곤 너무 작지 않냐는 반응이 나오는 크기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이렇게 쓸데 없어 보이는 것에 머리를 굴렸다. 그것이 유계영의 시를 읽을 때의 재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시에선 시가 도처에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어항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물고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가 태어날 수 있다. 유계영은 물고기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돼지와 돼지고기 사이엔 군침 흘리는 미식가가 꼭 있는데
물고기는 살아서도 물고기 죽어서도 물고기
—「만성피로」 부분
돼지와 돼지고기는 완연하게 다르다. 돼지는 살아 있지만 돼지고기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물고기는 살아있으나 죽어 있으나 물고기로 불린다. 재미난 발견이다. 또 하나 내가 주목한 것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이다. 계기는 멀지 않다. 시인의 어머니가 “어항을 돌”보도록 시킨 것이 그 계기이다. 어머니는 주의까지 주었다. 시인은 “고기밥 너무 많이 주지 마라/낮에 엄마가 남기고 간 말이다”라는 말로 그 사실을 알려준다. 대개 그러한 경우 우리는 시키는대로 하고 말지만 시인은 고기밥만 주지 않고 물고기를 살피며 많은 생각들을 한다. 가령 “고기밥을 많이 주고 나빠지는 수질” 앞에선 “몽땅 먹고 몽땅 싼” 때문인지, 아니면 “먹을 만큼 먹고 남겼”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궁금해하는 식이다. 어느 경우이든 수질은 나빠지지만 원인은 완연히 다르다.
양식집에서 고기를 썰며 식사를 했다고 해보자. 그곳에 무슨 큰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은으로 만든 포크와 나이프
살고자 하는 마음과 죽고자 하는 마음이
먹으려는 마음으로 챙챙 부딪친다
검고 드넓은 테이블 위에서
—「푸가」 부분
평범한 식사 시간이 시의 세상에선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벌이는 결투의 시간이 된다. 둘 모두 살고 싶은 마음도, 또 죽고 싶은 마음도 버리고 “먹으려는 마음”으로 결투를 벌인다. 우리는 목숨 걸고 먹고 있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가 주는 즐거움은 사실은 기구의 안전장치를 통해서 담보된다.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롤러코스터는 공포가 될 것이다. 유계영이 선물하는 언어의 롤러코스터에는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위험도 없다. 다만 읽으며 머릿속이 어지러울 뿐이다. 때문에 언제든 언어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수 있다. 나의 경험도 그런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운좋게 언어의 손잡이를 놓치지 않고 안전하게 시 한 편이 그리는 궤도를 완주하여 탑승장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의 시가 주는 전복의 즐거움이 컸다.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포지션』, 2019년 가을호, 시집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