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 구조의 시 —하재연 시집 『우주적인 안녕』

하재연 시집 『우주적인 안녕』
하재연 시집
『우주적인 안녕』

어려웠다. 또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재연의 시집 『우주적인 안녕』을 읽으며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하재연의 시가 주는 혼란은 좀 미묘한 측면이 있다. 시의 일부분을 제거하면 그 혼란이 제거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시의 훼손이 발생한다. 시의 일부를 마구 제거하면서 시를 읽을 수는 없다. 이런 경우 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혼란 그 자체를 수긍하는 것이다. 혼란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다른 하나는 혼란을 정리하여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방법으로 그의 시를 읽었다.
시집의 맨앞에 실린 「양양」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는 “열 마리 모래무지를 담아두었는데/바다로 돌려보낼 때/배를 드러낸 채 헤엄치지 못했다고 했다”는 얘기로 시작된다. 읽는데 어려움은 없다. 키우던 모래무지가 있었는데 바다에 풀어놓자 모두 죽었다는 얘기이다. 이에 대해 시인은 “집에 와 찾아보니/모래무지는 민물고기라고 했다”고 말한다. 뒤늦게 모래무지가 왜 죽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얘기를 듣는 우리는 모두 모래무지의 죽음을 불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불운은 모래무지가 민물고기란 것을 구분하지 못한 사람 탓이다. 우리는 모래무지를 민물고기로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모래무지의 불운은 물고기를 풀어놓은 바다가 양양 바다였다면 더욱 안타까울 수 있다. 양양은 민물인 남대천이 동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물고기가 살 수 있는 민물이 있었으므로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 커진다. 시를 읽으며 생각을 이곳까지 끌고 오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누군가의 생일이라 쏘아 올린 십 연발 축포는
일곱 발만 터져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다고
—「양양」 부분

“십 연발 축포” 가운데 “일곱 발만” 터졌다면 세 발은 터지지 않은 것이다. 터지지 않은 세 발만 보면 불운이지만 7이란 숫자를 행운으로 여기는 흔한 습관을 생각하면 일곱 발만 터진 것을 행운으로 여길 수도 있다. 이 얘기만으로 보면 세상의 일이란 행운과 불운으로 정확하게 경계를 가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시인은 물고기의 불운을 말하면서 그 불운이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를 구별못한 때문이라고 말해놓고는 동시에 불운과 행운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고기의 불운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 얘기의 뒤에서 곧바로 불운과 행운은 명확하게 가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니 읽는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혼란스러우니까 우리는 시를 수긍하기 어렵게 된다. 시를 수긍하려면 이 혼란을 정리해야 한다.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축포가 불운이건 행운이건 우리가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 둘을 구별하는 일이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는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실수가 불러온 모래무지의 불운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죽음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불운 탓이 되면 한이 되기 쉽다. 한맺힌 죽음은 눈을 감지 못한다. 모래무지의 죽음 또한 한맺힌 죽음이라면 눈을 감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에 대해 시인은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했다”고 말한다.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물고기가 눈을 감지 못하긴 하지만 원래 물고기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타고온 모래무지의 불운에 대한 이해의 맥락에서 보면 또 우리의 이해를 흔든다. 하지만 이는 한맺힌 죽음을 말할 수 있는 뜬눈마저 따로 갖지 못하는 물고기의 또다른 한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런 한을 가져오는 불운이라면 어떻게 하든 막아야 하며, 막는 방법은 모래무지를 민물고기로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시를 이렇게 정리한 끝에서 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쓸데없는 불운과 행운은 굳이 구별하려 들면서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구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양양」이란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너는 자꾸 유성을 유성우라고 말하고
나는 너의 말을 고쳐주었다 그런데도 너는
—「양양」 부분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시인은 친구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나 보다. 친구는 유성을 유성우로 혼동하고 있었고, 시인은 그것을 고쳐주고 있었다. 그 끝에 “그런데도 너는”이라는 말을 덧붙여 놓은 것을 보면 효과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그런데도 유성을 유성우라고/나는 자꾸 너의 말을 고쳐주지만”의 형태로 시의 마지막에서 다시 반복된다. 나는 이 마지막 구절이 첫구절의 마지막에 놓인 ‘너는’에 이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마지막 구절에서 “유성을 유성우라고” 하고 있는 것은 떼어서 보면 시인 자신의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친구의 말이며, 시인은 여전히 그런 친구의 말을 고쳐주고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 시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유성을 유성우라고 말하는 친구와 그것을 고쳐주고 있는 시인의 시간으로 시의 가운데 부분을 감싸고 있다. 그 둘의 밤이 감싸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죽은 친구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의 친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죽은 친구에게 “사람이 죽지 않으면/지구가 터져버릴 텐데/그래도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너도 죽지 않았을 텐데”라는 말로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아쉬움을 보여준다. 시인의 회상에 의하면 죽은 친구는 “아이의 그넷줄에 목을 매”달아 죽었으며, 시인과는 “내 생일이 그의 장례식”이라 “올해의 내 생일도 그의 기일”인 독특한 인연의 친구이다. 둘 모두 죽은 친구를 잊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아쉬움과 회상은 아름답다. “별이 떨어지는” 밤은 그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을 더욱 아름답게 고양시켜 준다.
이러한 구조, 즉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가운데의 내용을 감싸고 있는 구조를 무시하고 이 시를 차례대로 읽으면 구절과 구절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아 혼란스럽다. 시인은 왜 처음과 마지막이 가운데를 감싸는 이런 구조를 취한 것일까. 그것은 가운데의 내용, 즉 죽은 친구에 대한 아쉬움과 회상의 순간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와의 사소한 대화도 모두 소중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조 속에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함께 감싸고 있던 그 자리의 친구가 모두 똑같이 소중한 하나가 된다.
「양양」이란 제목으로 쓰여진 두 편의 시를 보면 시가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흐름을 뒤흔드는 구절이 끼어들어 혼란을 야기하며, 첫구절이 바로 뒷구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구절로 이어지면서 가운데 구절들을 감싼다. 하재연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두 시의 예에선 시가 가진 구조를 정리하는 일이었으며, 그것이 정리되었을 때 시가 수용되었다.
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구성의 양상을 정리하여 수용하는 것은 두 편으로 마치기로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시의 일부 구절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넘어가 본다.

나의 아가미로 들이쉰 호흡이
너의 폐에 전달되며 우리는 흑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차가워지고
—「기계류」 부분

“나의 아가미로 들이쉰 호흡이/너의 폐에 전달”될 정도면 둘은 한 몸에 가깝다. 한몸에 가까운 사이면 뜨거워야 정상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둘의 사이를 “흑점처럼/서로가 서로에게 차가워지고” 있는 사이라고 말한다. 사실 흑점은 절대 온도로 보면 말할 수 없이 뜨겁다. 다만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서 검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나와 너의 사이는 어떤 사이인 것일까. 의문을 이렇게 가져가면 이 구절은 잘 풀리질 않는다. 이 구절을 수용하기 위한 내 방법은 태양에서 나와 너로 접근한 것이었다. 그 과정은 이렇다. 태양은 뜨겁다. 그 뜨거운 태양은 사랑을 숨기고 있다. 태양이 숨긴 사랑의 거처가 바로 흑점이다. 사랑은 그곳에 주변보다 낮은 온도로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는 사랑은 차갑고 어둡다. 나와 너는 내 호흡이 너의 폐로 옮겨갈 정도로 가깝고 그래서 뜨겁지만 동시에 둘의 사랑은 태양의 흑점처럼 숨겨져 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을까. 세상에 사랑을 숨기는 경우는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구절을 읽고 정리한 내 방법이었다.
흔한 경우인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맥락에서 구절의 의미를 짚어보게 되는 예도 있다.

무한과 무한의 사이에 찍힌 하나의 점과 같은
우리에게
—「스피릿과 오퍼튜니티」 부분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화성에 보낸 탐사 차량이다. 시인은 이 두 탐사 차량을 기계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 여긴다. 실질적으로 두 탐사 차량이 우리에게 송신하는 것은 화성의 사진이지만 시인이 “슬픔이 무한으로부터 전달되어온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은 기계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화성에 고립된 인간을 보고 있으며 그 고립은 슬픔이 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우리를 “무한과 무한의 사이에 찍힌 하나의 점”으로 본 점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인간을 하나의 점과 같이 인식하는 것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시에선 미미한 존재의 우리를 깨닫는 일이 과학의 아이러니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에 이르는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화성은 멀다. 차를 몰아 시속 193km의 속도로 달릴 경우 화성에 도착하는데는 134년이 걸린다. 인류는 그 먼 곳까지 탐사 차량을 보냈다. 위대하지 않은가. 우주 탐사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인류는 우주 탐사선 보이저1호를 태양계 끝까지 보냈다. 보이저1호는 특히 태양계를 떠나면서 지구의 사진을 찍어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그 사진 속에서 지구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과학, 특히 우주 과학에선 위대한 업적을 이룰수록 우리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하재연이 우리를 “무한과 무한의 사이에 찍힌 하나의 점”이라고 말할 때는 그 과학의 아이러니가 읽힌다. 화성에 보낸 탐사 차량의 얘기 뒤에 그 점 얘기가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 과학을 끌어들이면서 의미가 이중으로 중첩되는 경우도 있다.

은하처럼
더 멀리 있을수록
더 빠르게 멀어지는
당신과 나
—「평균율」 부분

천문학의 발견에 의하면 우주는 팽창하고 있고 은하와 은하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우리 은하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멀어지는 속도도 더 빨라진다. 시인은 “당신과 나”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가져다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체감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이 구절은 당신과 내가 “빠르게 멀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이중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우리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그 세상의 당사자가 감당하는 실상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하재연은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말한다. 가령 폭우가 쏟아질 때 둘이 우산 하나를 같이쓰고 걸어갔다면 우리의 눈에는 다정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상황의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투명한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고
너랑 나는 다른 비를 피하고 있었지
—「폭우」 부분

아마도 우리의 눈엔 우산 하나를 둘이 같이 쓰고 같은 시간대의 비를 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고” 비를 피했다고 하고 있다. 우산이 하나면 나누어 쓸 수가 없다. 함께 써야 한다. 그런데도 우산을 나누어썼다고 한 것은 비록 하나의 우산 아래 같이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가 아니었던 결과일 것이다. 다른 마음은 비에 대한 느낌마저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하면서 노출되는 이러한 이질감은 제삼자의 눈에는 보이질 않고 당사자들만 알 수가 있다. 우리의 눈에는 둘이 머리에 꽃을 꽂고 있으면 한 마음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각자인 둘의 마음을 “웃는 꽃과/우는 꽃을/각각 머리에 꽂고//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전하며 이질감을 부각시킨다. 시인은 당사자들의 입장은 보기와는 다를 수 있는 것이라며 내가 남들을 볼 때 습관적으로 내릴 수 있는 판단을 저지하고 뒤흔든다.
일반적 판단으로는 곧바로 수용이 안되는 구절도 있다.

나는 무릎이 아프고,
아픈 무릎에는 아름다운 의자가 좋을 것이다.
—「의자 찾기」 부분

이 구절을 읽는 우리는 당연히 묻게 된다. 아픈 무릎에는 편안한 의자가 좋지 않나? 그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판단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아름다운 의자가 좋다고 말한다. 잘 수용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이는 시의 다른 구절이 해명해준다. 시인은 자신이 찾고 있는 “나의 의자”를 “내가 아름다운 의자라고 부르는 그 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아름다운 의자란 일반적 의미의 아름다운 의자가 아니라 시인에게 딱 맞는 의자인 셈이다. 그러니 무릎 아픈 시인에게 딱 맞는 의자는 아름다운 의자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아름다운 것은 잠시 아픔도 잊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아픈 무릎에는 아름다운 의자가 가장 좋을 수 있다. 의자의 아름다움에 잠시 무릎의 아픔도 잊게 되기 때문이다.
대개 시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순차적으로 흐른다. 그러한 경우엔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가면 된다. 이러한 유형의 시를 평면적 흐름의 시라고 칭할 수 있다면 하재연의 시는 입체적 구조의 시이다. 순서대로 읽으면 혼란이 발생한다. 그 구조를 파악하고 나면 혼란이 정리되고 시가 수용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것이 쉽지는 않다. 우리들이 단일하고 순차적인 흐름의 시읽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얘기도 된다.
(『포지션』, 2019년 가을호, 시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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