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말들의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1
도시는 어디를 가나 온통 콘크리트로 덮여있다. 편리 때문이다. 이해는 간다. 콘크리트로 덥지 않으면 흙먼지가 도시를 덮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편리를 위해 콘크리트로 세상을 덮어놓고 살면서도 또 그 세상을 못견뎌 한다. 편리를 얻는 대신 자연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연은 생명이다. 도시의 우리는 편리한 세상을 사는 댓가로 생명으로서의 자연을 잃었다. 그러니 도시의 우리는 사실 편리한 죽음을 사는 셈이다.
그 상실감을 메꿔보려 사람들은 곳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화단을 만들고 화분이라도 마련한다. 모두 상실의 도시를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 하지만 가장 경이로운 것은 생명의 상실을 댓가로 치루고 마련한 이 도시에서 갈라진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나와 푸른 생명을 가꾸는 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풀들이 꽃을 내밀 때도 있다. 민들레가 그중 흔하다. 골목을 걷다 보면 담벼락 아래서 자주 만난다.
나는 이 현실을 비유로 바꿔 시에 대한 설명으로 삼아보고자 한다. 이 비유에서 콘크리트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일상 언어이며, 푸른 풀들의 자리에는 시가 놓이게 된다. 비유 속에서 일상 언어가 콘크리트에 대비된 것은 그 언어가 일정한 양태로 굳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구성한 비유 속에선 시의 언어가 일상 언어와 달리 살아있는 언어가 된다. 말하자면 콘크리트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푸른 풀의 언어이다.
예를 통하여 비유를 좀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 때는 6월초이며, 나무 한 그루가 서쪽으로 서 있다. 시간은 오후 5시반경. 해가 완연하게 누워 나무의 가운데에 걸려 있으며 앞뒤로 보자면 나무의 뒤로 놓여 있다. 이 풍경을 일상 언어에 담아내면 “나무가 해를 가리고 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대로의 설명에 가까운 표현이다. 이 일상적 설명은 풍경을 전해주는 동시에 그 말로 풍경을 콘크리트처럼 덮어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일상적 표현을 다르게 바꿀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가령 같은 풍경을 “나무가 해를 품고 있다”는 표현 속에 담을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바꾸면 나무에 가려져 있던 해가 저녁으로 잉태될 수 있다. 곧 저녁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해가 져서 오는 저녁이 아니라 나무가 잉태한 저녁을 살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작고도 쉬운 언어 훈련이 일상 언어에 균열을 내줄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균열의 자리에서 얼굴을 내미는 풀의 언어를 시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2019년 여름호의 계간지와 비슷한 시기의 격월간지에 실린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게 굳어있는 일상 언어의 세상에서 살아있는 언어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 중에서 몇 편을 골라 살아있는 언어의 세상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

2
첫순서는 김소연의 시로 시작한다. 장소는 어느 식당이다. 대개 우리는 음식과 맛으로 식당을 재단한다. 시인은 좀 다르다. 그는 “넓지 않은 내부이지만/테이블과 제면실과 주방이/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말로 식당의 소개를 시작한다. 넓지 않다고 했으니 작은 식당이다. 작다는 말은 확정하려 든다. 아마도 그 확정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다는 말대신 넓지 않다는 말을 불러왔을 것이다. 시인이 선택한 언어는 식당을 말해 주면서도 미세하게 시인의 마음을 담는다.
우리는 대개 식당에 음식을 먹으러 가지만 시인은 “이곳에 규칙을 지키러 온다”고 말한다. 이 식당에 올 때마다 일정하게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는 뜻이다. 그 습관은 “얼음 보리차를 한 잔 마시고/젓가락을 오른편에 나란히 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습관의 시작은 “물수건으로 두 손을 닦고/창 바깥을 보는 척하면서 제면실을 바라”보는 다음 행동으로 이어진다. 제면실에는 ‘그’가 있다. 식당이니 당연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이제 시인은 그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토마토를 씻는 소리”와 “나무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이다. 아마도 주방 쪽으로 창문이 있나 보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시인의 자리까지 이른다. 그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옮기고 있다.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한 발짝 들어와 그의 등을 스쳐 다가온다
—김소연, 「토마토 소바」(『릿터』, 2019년 6-7월호) 부분

이 바람은 눈을 갖고 있다. 물론 시의 어디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하지만 바람이 시인의 자리에 이르러 “목덜미가 서늘해질 때” 시인은 “테이블에 박혀 있는 옹이와 눈 맞추기”를 했다고 했다. 주방의 그가 내는 소리에 눈을 맞추고 있던 자신을 바람에게 들켜 급하게 시선을 옹이로 옮긴 것이다. 그에 이어진 “해가 질 때에 여느 사물들처럼 황금빛 테두리를 갖기” 는 역광의 저녁빛에 비친 풍경을 향유하는 시간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나서 이제 시인은 음식을 먹는다. 음식은 ‘소바’이다. 즉 메밀국수이다. 우리는 보통 음식에 대해 맛을 말하지만 “무즙과 와사비를” 곁들여 먹는 그 소바에 대한 시인의 말은 “감사합니다”란 것이다.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는 일은 흔한 일이다. 대개 우리는 배를 채우는 것으로 그곳에서의 시간을 지나치나 그 시간이 모두 한 편의 시가 되어 지나가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식당에 들렀던 나의 걸음을 임효빈은 패스트푸드점으로 데려간다. 햄버거를 팔고 있으며, 알바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한때는 아르바이트란 말이 많이 쓰였으나 요즘은 그 말을 짧게 줄인 알바라는 말이 더 흔하게 쓰이고 있다. 김소연이 소바를 먹고 있었던 식당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가게 안에선 소란이 벌어지고 있다. 손님이 알바를 향하여 햄버거를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상손님이다. 시인은 그 순간을 “휙, 얼굴을 강타한 햄버거를 볼 수 없어요 직구였거든요 변화구였다면 약간의 낌새를 챌 수 있었을 거예요”라며 유머에 싣는다. 그래도 햄버거마저 ‘무안’해 할 듯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수모를 당했는데도 알바는 이를 “툭툭 털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땅의 약자들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 시인은 그 알바의 심정을 “속이 사라진 나”라고 말하여 “속이 쏟아진” 버거와 같은 처지임을 알려준다. 그 진상 손님에게는 개라는 말이 어울린다. 시인은 알바의 입을 대신하여 그 말을 진상 손님에게 이렇게 돌려준다.

당신은 어디서 굴러온 뼈인가요 통뼈라도 나는 알 바 아닙니다 굴러가세요 굴러가다 보면 네거리가 나와요 당신이라면 빨간 신호등도 푸른 신호등으로 보일 거예요 성격이니 그냥 가도 무방하겠죠 다만 당신 안의 개는 데려가세요 지나가는 개도 알 바 아니니까
—임효빈, 「나는 알 바 아니다」(『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부분

시 속의 어디에도 알바라는 말은 없다. 대신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의‘알 바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는 그 ‘알 바’가 알바를 이중으로 함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알 바 아니다」라는 제목은 내가 알바 이전에 사람이라는 말로 들린다. 시인은 이러한 이중적 의미의 ‘알 바’라는 말을 통해 진상 손님에게 개XX라는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시는 욕하지 않고도 욕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점을 나온 걸음을 속초로 옮겨본다. 신용목이 안내해준다. 속초는 누구나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아마 속초라는 지명 앞에서 나도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내게도 속초는 동해 바다가 보고 싶은 날, 가장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동서울터미널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속초가는 버스가 빈번하며 홍천까지 고속도로가 놓이고 미시령터널이 뚫린 이후로는 속초까지 가는 시간도 더욱 줄어들었다. 속초의 버스터미널에서 바다가 아주 가깝다는 것도 그곳의 매력이다. 내가 속초를 다녀온 것은 여러 번이었다. 회를 한 접시 먹는 날도 있었고, 바다는 빼놓지 않고 보고 왔다. 그렇다면 나는 속초를 보고 온 것일까. 물론 갈 때마다 그곳은 속초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속초가 있을 수 있다. 그 속초를 시인이 보여준다.

음악을 물에 담그면 물고기 같을까? 이 방이 물에 잠겨 있다면 가스불은 산호초 같겠지. 무수한 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무수한 인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푸른 침묵.

바다.
—신용목, 「속초」(『포지션』, 2019년 여름호)

시인은 질문의 형식에 실어 바다를 물었지만 나는 확정된 구절로 그 질문을 읽었다. 질문의 형식에서 질문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의미를 확정해주길 바라는 기대를 읽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물고기는 물에 담근 음악이 되었으며, 그러자 물고기가 유영하는 바다가 음악으로 가득찼다. 당연히 가스불은 산호초로 바뀌었다. 시인에게 속초란 그런 곳이다. 물고기가 음악으로 바뀌어 바다를 유영하고 가스불을 켜면 방이 바닷속이 되면서 가스불의 자리에 산호초가 놓이는 곳이다. 인사를 나눈다면 가까운 사이이지만 너무 가까우면 인사를 나눌 필요도 없다. 바다와 시인의 사이는 인사도 필요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다. 또 내게 바다는 파도와 물의 세상이었으나 시인에게 바다는 말없는 언어이다. 바다에서 “푸른 침묵”을 마주한 연유일 것이다.
몇 번 갔었으나 내가 보지 못했던 시인의 바다는 계속된다. 시인은 바다를 보며 “물수제비 파장으로 스러지는 해가 남은 말로 흔드는 수면”이라고 한다. 수면의 물결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저녁 햇볕을 말하는 것이리라. 독특한 것은 시인이 이때의 수면을 문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그 수면을 보며 “저 문을//열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밤은 누군가 바다의 문을 열어젖힌 시간이라는 것”이라는 말로 그 문이 열리는 시간까지 알려준다. 시인에 의하면 바다의 문이 열리고 나서 “문 너머 서서히 어두워지는 골목까지 걸어온 심해를 찬바람으로 맞이하는 시간”이 바로 밤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를 바람에 묻어나는 바다 내음으로 이해했다. 밤은 그 바다 내음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인의 속초로 가면 바다 내음이 후각 세포에 완연한 밤시간에 심해를 걸어나온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일상적으로 다녀왔던 속초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바다이다.
조재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얘기의 대상은 돼지이다.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돼지는 돼지라는 가축보다 사람들이 즐겨먹는 고기로 더 익숙하다. 돼지는 도축되어 정육점으로 가고 사람들은 정육점에서 사온 돼지고기를 집에서 조리해 먹는다. 먹으면 살로 가서 비만을 불러오기도 하며 채식자들은 먹지 않는다. 하지만 대개는 좋아한다. 돼지고기는 맛있지만 이런 돼지고기 얘기가 재미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인이 돼지를 ‘그’라고 칭하면서 의인화하고 언어를 바꾸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일상적인 돼지고기 얘기에서 큰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발과 손이 잘리고 살가죽이 벗겨지고 족발은 정육점에 맡겨지리라
부활하리라 사흘 만에, 주방에서
식탁에 올라 우편을 차지하리라
왕들은 포크를 들고 달려들리라
상석의 좌편에서 다른 먹거리를 무찌르리라
땅 위의 영주들과 모든 백성이 그의 전부를 경외하리라
비만의 완전한 길을 가르치고 단식자들에게는 적이 되리라
채식을 숭상하는 불신자들과 맞서리라
구하는 입들에게는 납득이 되리라
한 번이라도 심취한 자들이 모든 나날의 주식으로 삼으리라
—조재형, 「돈 잃고 마음을 고치다」(『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부분

재미나지 않은가. 일상의 돼지고기 얘기는 하나 재미날 것이 없지만 시는 그 세상을 재미난 세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재미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시의 제목이다.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이 시의 제목 「돈 잃고 마음을 고치다」에서 돈이 화폐가 아니라 돼지를 뜻하는 한자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다의 변형이지만 아울러 시의 제목은 우리들이 돼지고기 먹고 위장의 포만감을 얻을 때 시인이 돼지를 잃고 돼지를 보는 시각을 고쳐 이 시의 재미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가끔 시는 지극히 평범하던 일상도 재미로 바꿔준다.
슬픈 현실로 옮겨가 본다. 김중일의 시는 학교 앞에서 “과속하던 트럭 바퀴”에 치어 숨진 아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인은 차마 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작은 새 한 마리”라고 지칭한다. 아이라는 말로 그대로 옮기기엔 그 말에 얹혀 곧장 전해지는 비극의 강도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새”로 아이의 죽음을 대신하며 비극을 위로한 시인은 ‘어린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그 말을 “어린 이”로 바꾼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길을 건너던 한 어린이가 빗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부터 비웅덩이에 남은 어린이들이 모여 낙엽을 띄우고 있다
소나기를 태우고 지상에 내려온 비웅덩이를 잡아타고, 세상에 잠시 어렸던 아이 한 명이 올라간 날,
온몸에 늘 푸른 멍이 어리던
유리창 위에 찬 달빛이 어리듯 이 세상 위에 잠시 어리던
어린이라는, 어린 이들을 어떻게 한 명이라도 더 붙잡을까
세상에 어린 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붙잡으려고,
매년 나무들은 나뭇잎을 다 내버린 채 빈 손을 치켜들고,
지켜서고 있다
—김중일, 「어린 이」(『애지』, 2019년 여름호) 부분

“어린 이”의 어리다는 나이가 적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른거리다라는 뜻의 어리다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 발도 딛지 못하고 가버린 듯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말을 불러냈을 것이다. 때문에 이 말에는 나이 어린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어른거리다 가버린 듯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시에 들어 있다. 시인의 마음에 가장 크게 동참을 하는 것은 나무들이다. 나뭇잎을 다 털어내고 빈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이 시인의 눈에는 “빈 손을 치켜들고” 속도를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상에 어린 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붙잡”아 보려는 그 나무들의 안간힘을 운전하는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아이들의 희생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일상의 세상에선 잎을 털어낸 빈가지의 나무이지만 시의 세상에선 속도를 줄이고 조심 운전을 하라는 주의 신호가 된다.
백은선은 반려견과 함께 하고 있는 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언어로 형상화한다. 첫대목을 보자.

피와 포

피포
—백은선, 「피, 포」(『모든시』, 2019년 여름호) 부분

“피와 포”라고 했을 때 내게 그 말은 피라는 이름의 개와 포라는 이름의 개가 약간 떨어져 있는 듯 보였고, “피포”라고 했을 때는 두 마리의 개가 서로 엉겨 몸을 부비고 있는 순간을 연상시켰다. 물론 개들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피는 기쁘다”거나 “다리 위엔 눈알을 굴리며 뛰어오르는 개들”과 같은 설명으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시인이 지금 “형편없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체국에 가는” 길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피피”나 “포포”, 또는 “피피/포포”이다. 이 때문에 시를 읽을 때 나는 피와 포가 시속을 뛰어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려견에 대한 시는 있을 수 있지만 반려견이 시속을 뛰어다니게 하기는 쉽지 않다. 이 시가 눈에 띈 이유이다. 시는 “피, 포, 포, 피, 피, 포, 피, 피, 포……”로 마무리된다. 시속에서 시인의 개 두 마리가 정신없이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황인찬은 “아, 시 계속 이렇게 쓰면/좋은 시인 못 되는데, 나도 아는데……”라는 말로 시를 시작하며 시의 세계에 어떤 전형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시인은 좋은 시인이 되려고 하질 않는다. “인찬아, 너는 은유를 못 쓰니까 가능하면 쓰지 말자,/그렇게 말씀하시던 선생님도 계셨는데//좋은 시인 못 될 거라 상관이 없네”라는 구절에서 전형적인 좋은 시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이 때문에 “좋은 시인 못 되면/소라도 되어야지”라는 구절은 좋은 시를 쓰느니, 즉 전형적인 시를 쓰느니 차라리 소가 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시인은 결국 소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소가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는 좋은 시의 전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좋은 시는 “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 저어 오오//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라는 구절로 인용되어 있다. “소가 된” 시인에게 이러한 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목가적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한 지극하고 억지스런 긍정”으로 비판되는 대상이다. 소가 되고 나면 그런 풍경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그런 풍경과는 무관하게
소가 된 나는 뭐 이미 정육식당 어딘가에 놓여 있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호수고 그대는 노 저어 오고
산에는 꽃이 피겠지 계속 피겠지

꽃피는 한우(집 근처 소고깃집)에서는
소고기가 자꾸 익어가고

그런데 이 시를 다 써도 내가 소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정육식당에 가만히 놓여 있는 소고기가 된 나는
고기 냄새를 맡으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황인찬, 「요가학원」(『문학동네』, 2019년 여름호) 부분

전형은 그것 자체로는 해악이 없다. 문제는 전형이 시의 확대를 가로막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를 시의 영토 안에 받아들이기 주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들은 전형을 지키는 한편으로 전형을 벗어나야 한다. 황인찬은 자신은 전형을 벗어나 시의 영토를 확대하는 편에 서겠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행위를 “천천히//천천히 위로 올라가며//아무것도 없는 곳을 비추려” 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빠르게 갈 수 없는 길이며,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도 때로 시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소가 되는 것도 마다않고 살 때 그러한 시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며, 그때 우리는 전형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의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시를 만날 수 있다.
유계영의 시를 마지막 순서로 들여다 본다. 시가 아주 짧다.

나는 하루 두 번의 무효를 외치기 위해 성실하게 미쳐 가는 시침이다
너무 많은 예측을 해 낸 까닭에 일찌감치 노쇠해 버린 풋내기의 손목 위다
—유계영, 「마가목」(『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전문

제목인 「마가목」은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모르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면 된다. 검색해보면 여러가지 약효를 가진 나무란 것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마가목의 사진들은 꽃은 희며 붉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 시에선 제목과 본문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일단 본문을 따로 읽을 수밖에 없다. 첫구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시침’이라고 했다. 시침은 하루에 두 번 시계 자판을 돈다. 시침은 그 점에 있어선 아주 성실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하루 두 번의 무효를 외치기 위”함이라고 했다. 따라서 알고 보면 하루가 다 무효가 된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있는데 그 하루가 모두 무효가 되어 버린다면 미칠 지경이 될 것이다. 첫구절은 그런 삶을 말하고 있다. 그런 삶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첫구절에서 만나는 시침의 시계는 손목시계이다. 둘째 구절에서 “손목 위”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목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이 풋내기이다. 풋내기는 대개 싱그럽다. 그러나 시인은 풋내기가 “일찌감치 노쇠해 버”렸으며, 그 까닭을 “너무 많은 예측을 해 낸” 탓이라고 말한다. 풋내기라면 예측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뛰는 것이 풋내기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풋내기가 너무 미래에 연연해 하면 그것은 풋내기가 아니라 노쇄한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나는 첫구절을 너무 성실하게 살지 말자로 읽었다. 하루가 무효가 되버린다면 그 성실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은 풋내기라면 미래 따위를 생각하거나 앞날을 재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 정도로 이해되었다. 시 속의 시인은 손목 위의 손목 시계에서 시침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문은 읽히지만 제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면 차라리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며」가 더 어울린다.
그러나 제목을 달리 읽으면 제목 또한 본문과 잘 어울릴 수 있다. 그것은 제목을 의미로 읽지 않는 것이다. 그냥 제목이 나무의 이름이니 시의 본문 앞에 실제 현실에서처럼 나무를 세워두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즉 정확하게 보면 시의 제목은 「마가목 아래서」가 된다. 아마도 이 시의 영감을 받을 때 바로 시인의 앞에 마가목이 서 있지 않았겠나 싶다. 그러면 「마가목 아래서」라고 쓰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나 시는 정확을 목적으로 하는 장르는 아니지 않은가. 아울러 마가목이라고 써서 나무를 시의 앞에 세워두면 우리 또한 시인과 똑같이 마가목 아래서 시를 읽어볼 수 있다. 시인과 위치가 같아지는 것이다. 시의 세상에선 시인이 시에 대한 실마리를 떠올렸을 때 그의 앞에 서 있던 나무가 제목의 자리로 옮겨가 그대로 시의 앞에 서기도 한다.

3
나는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시를 살아있는 언어의 세상이라고 했다. 우리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대개 음식의 맛으로 그 시간이 지나가지만 시의 세상에선 그 시간 전체가 시의 시간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일상에선 진상 손님이 있는 날이면 알바가 비인간적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 수모를 꾹 참아야 하지만 시의 세상에선 진상 손님에게 개라는 말을 은근슬쩍 욕으로 돌려줄 수 있다. 시의 세상에서 찾은 속초에선 밤의 골목에서 문을 열고 걸어나온 심해를 만날 수 있다. 가끔 우리의 입을 만족시켜 주었던 흔한 음식으로서의 돼지고기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재미를 안겨주는 곳도 시의 세상이다. 시의 세상에선 차사고로 숨진 어린이의 비극 앞에서 나무들이 가지를 세워 운전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시를 읽는 것으로 시 속을 뛰어다니는 반려견을 볼 수 있을 때도 있다. 시의 전형을 벗어나기 위해 소가 되어버린 시인을 만나는 재미도 있다. 제목인 줄 알았는데 제목의 자리에서 나무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 모두가 내게 비로소 살아있는 언어의 세상이었다.
(『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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