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의 너머에서 만나는 시의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9년 겨울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9년 겨울호

1
눈앞에 보인다고 하여 우리가 그 세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앞에서 보면서도 하나도 모를 수 있다. 특히 과학의 설명에 기대어 우리 앞의 세상을 볼 때 자주 그러한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에게 단풍은 가을이 되어 잎의 색이 바뀌는 현상이다. 그것은 가을의 특징이다. 그러나 과학의 설명은 다르다. 잎이 초록이 아닌 다른 색을 갖는 현상에 대한 과학의 설명은 여러가지이다. 그 중에는 엽록소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설명이 있다. 엽록소는 식물의 잎이 갖고 있는 녹색의 색소이다. 식물은 이 녹색의 색소 이외에 다른 색소도 갖고 있지만 여름에는 엽록소의 양이 많아 잎이 녹색으로 보인다. 과학의 설명에 의하면 잎은 초록에서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것이 아니라 엽록소가 줄어들면서 초록에 가려져 있던 다른 색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그렇게 보면 색의 바뀜이란 없다. 다만 한 색이 사라지고 다른 색의 드러남이 있을 뿐이다.
별의 경우에는 사정이 더 혼란스럽다. 우리는 밤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모두 별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가령 샛별이나 개밥바라기별이라 불리는 금성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금성은 엄격하게 보면 별이 아니다. 빛나기는 하지만 그 빛은 스스로 내는 빛이 아니라 태양빛이 반사된 빛이다. 과학은 금성을 별이 아니라 행성으로 분류한다. 지구별이란 말도 과학의 입장에선 잘못된 말이다. 과학에서 별이란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이기 때문이다. 태양계에서 별은 태양밖에 없다. 과학은 우리가 빛나는 것을 보고 있는데도 그것이 사실은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과학은 특유의 방법을 통해 세상을 탐구하면서 우리가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세상을 열어주곤 한다. 놀라운 점은 시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시는 과학적 수단이나 방법없이 거의 맨눈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 앞의 세상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열곤 한다. 때문에 시를 통하여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던 세상을 열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한 경험은 2019년 계간지의 가을호에 실린 시들을 둘러보는 자리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2
송승환의 시로 시작해본다. 그의 시는 매우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언준”이란 이름의 시인이 쓴 시라며 인용의 형식으로 시를 가져오고 그 밑에 짧게 이런 문구를 달아두고 있다.

나는 받아쓴다
—송승환, 「H를 위한 받아쓰기・1」(『모든시』, 2019년 가을호) 부분

그러니까 이 시는 형식상으로 보자면 「H를 위한 받아쓰기・1」이란 제목 아래 언준이란 이름의 시인이 쓴 「눈 결정」이란 시를 받아쓴 시이다. 시는 언준이란 시인이 2010년 11월에 태어났음을 밝혀놓고 있다. 2010년 11월이라면 이제 아홉 살이다. 그렇다면 혹시 결혼하여 낳은 시인의 아이는 아닐까. 그리하여 아이의 눈으로 본 시를 쓰게 된 것일까. 짐작은 가능하지만 확인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인용의 형식으로 취한 시에서 동시의 느낌이 나지도 않는다.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검색 엔진의 도움을 빌려보면 2018년 8월에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세상을 떴을 때 송승환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언준(彦俊)과 함께 오래 기억하겠”다는 짧은 추모의 말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사전은 이때의 언준을 재능과 덕망이 뛰어난 선비나 훌륭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이를 실마리로 삼아 언준을 송승환이 문학공부를 하면서 축적해온 어떤 총체적인 내면의 존재로 상상했다. 그것은 송승환의 시세계라기보다 그가 공부해온 문학들이 어울려 엮어내는 집합적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가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우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였으며, 그렇게 하여 쓰게 된 시를 받아쓰기란 형식으로 내놓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내 짐작이 많다면 시인은 시인의 속에 자신이 열어가고자 하는 시의 세계 이외에 시가 전통적으로 축적해온 양상에 충실한 내면의 존재를 또 하나 가질 수 있다. 때로 시인 안에 또다른 시인이 있다.
사라지면 존재는 지워진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선 그 반대의 양상이 벌어지곤 한다. 부재가 오히려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정영효의 시가 그러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가 사라져 버리자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 그가 살던 집이 드러났고 문득 목격자가 나타나면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계속 발견되지 않는 동안 그의 가치관이 발견되었으며 사람들의 기억이 하나둘 모여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화를 만들었다
—정영효, 「개입」(『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부분

나는 이를 반대로 뒤집어서 읽어보았다. 그러면 첫구절은 그가 사라지기 전에는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로 읽힌다. 이러한 방식의 읽기는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고 사라지기 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을 겨우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그가 가졌던 삶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사람들 곁에 있을 때는 한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 시는 동시에 반대로도 읽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면 그가 사람들 곁에 존재하던 때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시는 부재가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존재가 지워져 부재 상태로 있던 평상시의 세상도 함께 보여준다. 우리는 분명하게 존재할 때는 지워지고, 없어지면 오히려 존재가 부각되는 이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울음은 슬픔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가장 분명한 형태일 것이다. 누군가가 울면 우리는 그것을 그가 슬프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세상에는 “울지 못하는 울음”이 있다. 이영광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 현장은 세상 떠난 스승의 운구 장소이다. 시인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또 한 선생 보내드리려 하는 병원 뜰에
팔월 뙤약볕 어지럽고, 아 정말 하직인가
생각하는 슬픔으로 주춤주춤,
운구 행렬 뒤따를 때

머리 허연 육십대 여자 시인 하나가 별안간
목 놓아 운다

울어도 좋다는 허락을 들은 건 한 사람뿐이라는 전갈을
영매처럼 다들
내려받은 것인가

울지 못하는 울음들이 슬픈 듯 기쁜 듯
못 참는 울음 하나를 따라간다
일망타진된 포로들처럼
—이영광, 「울음」(『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부분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난 울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울지 못하는 울음”이 있다. 시인은 그 울음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못난 상주같이 체면 불구 목을 놓으면 되겠느냐고/옛날, 영시 시간에 점잖게 말하고선 입/꾹 다물던 노 스승”이 그 연원의 하나가 된다. 하지만 스승의 그 한 마디 말이 이유의 전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더 옛날로 거슬러 오른다. 그렇게 거슬러 오르면 “그저 참아라 참아야 하느니라 하던/마른 어린 날”이 슬픔을 울음에 담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어린 날이 바람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울음을 감추고 자라선/씩씩한 환자가 됐”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울음을 속으로 삼키면서 산 삶이 겉으로 보기에는 씩씩해 보였을지 몰라도 내면의 통증으로 남았다는 뜻일 것이다. 울음에서 슬픔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울음을 들여다보고 그 울음의 연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곧잘 성격이 전혀 다른 대상을 가격이 똑같다는 이유로 하나로 묶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산은 커피 한 잔 값이면 살 수 있어. 그 돈으로 담배 한 갑을 살 수도 있지. 우산과 커피와 담배는 모두 비와 썩 잘 어울린단 말이야.” 이런 얘기는 가격이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똑같다는 뜻으로 들리곤 한다. 그럴 듯해보이지만 김행숙에게 이는 대상의 가치를 몰가치화하는 일이다. 시인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길 건너 편의점에 이 커피를 들고 가서 우산으로 바꿔올 수 있는 사람, 있어? 우산을 물고, 빨고, 태워서 연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 여기, 누구, 있어? 그럴 수 없다면, 우산과 커피와 담배의 값이 같다는 게 무슨 소용이람. 결국 우리는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거야.” 하나를 가지기 위해 내가 포기한 것들을 말해줄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네.
—김행숙, 「커피와 우산」(『포지션』, 2019년 가을호) 부분

우리가 이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돈이란 것이 암암리에 대상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가격이 똑같다는 이유로 몰가치화하는 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시인의 지적은 그러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사소한 트집 같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돈을 자본으로 확대하면 이는 자본의 속성이 될 수 있다. 자본은 임금이 똑같다는 이유로 사람을 마음대로 바꾸어 쓰려는 속성이 있다. 그때 사람은 같은 임금으로 쓸 수 있는 상품과 불과해진다. 자본이 가진 가장 폭력적인 점이다. 사람에게서 사람을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물건을 가격으로 몰가치화하는 작은 일이 사실은 사람의 가치를 그에게 주는 임금으로 환산하여 몰가치화하는 자본의 속성을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 시인의 작은 이의 제기가 자본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일 수도 있다.
시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주연이나 주인공보다 거의 시선을 받지 못하는 주변부로 향할 때가 많다. 박경서의 시도 그렇다. 시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피아노와 협연을 하고 오케스트라의 무대이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가 그 무대의 주인공이다. 당연히 시선은 피아니스트에게로 모인다. “악장 속으로 빠르게 잠영하는 열 손가락의 물질”을 보여주는 ‘지휘자’도 그 무대의 또다른 주연이다. 당연히 시선은 지휘자에게로 모인다.
하지만 시인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향하고 있지 않다. 시인은 환하게 비치는 조명이 오른쪽으로 향하면서 “오케스트라의 배경”을 이루어줄 때 “빛에서 가장 먼 왼쪽”을 “그의 지정석”으로 삼고 있는 존재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그는 「페이지터너」이다. 연주자가 연주를 할 때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인은 그를 성실하게 기록해놓고 있다. “피아니스트가/흑백으로 초원과 물길을 만들”며 “왼쪽으로 도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페이지터너는 그 와중에 “오른쪽으로 도는 음자리표를 지켜 내야”하는 사람이다. 피아니스트가 흑백의 건반으로 초원이 펼쳐지고 물길이 이는 듯한 음의 선율을 만들 때 음자리표에 주의를 집중하다 악보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또 시인은 “다음 소나타를 열어” 주는 그의 동작을 “물고기를 낚아채는 물갈퀴의 자세”라고 아주 섬세하게 짚어내고 있다.
연주가 끝나고 환호는 대개 주된 연주자와 지휘자의 몫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무대에 조명이 들어와 그를 볼 수 있게 된 순간, 시선을 모두 페이지터너의 몫으로 돌려준다.

지휘자의 열한 번째 손가락이 멈추고
고요가 여백보다 환할 때

무대 조명이 실수하는 순간 그는 존재합니다

어둠이 깜짝 놀라야 비로소,
또 하나의 연주자가 됩니다
—박경서, 「페이지터너」(『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부분

우리는 곧잘 공평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공평을 이유로 페이지터너에게 무대의 조명을 할애하진 않는다. 그러나 시의 세상에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연주가 끝나고 들어온 조명 불빛을 모두 그에게 할애할 수 있다. 그것이 시의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먼지는 미미해서 잘 감지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 또한 곧잘 먼지에 비유된다. 그러나 과학은 그 먼지가 모여 별을 이루고 지구가 속한 태양계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온우주가 사실은 그 먼지가 모여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나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나의 분명한 사실로 체감할 때가 있다. 먼지를 모으는 집진통이 투명하게 되어 있는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했을 때이다. 먼지통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음 날 진공청소기로 집을 청소하면 어디에 이렇게 많은 먼지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확연하게 먼지가 모인다. 이렇게 몇 천년만년 모이면 정말 지구 하나는 거뜬히 이루고도 남지 않을까 싶어지는 순간이다. 청소를 하며 우주 생성의 비밀을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더 민감하다. 김기택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는 발바닥으로 먼지를 체감하고 있다.

발바닥에 마른 먼지가 낀다. 그 먼지들이 타고 날던 공기가 느껴진다. 먼지는 발바닥 지문과 주름 사이에도 끼어있을 것이다. 먼지 먹은 발바닥이 목말라 하는 것 같다. 발바닥이 조금 미끄러워진다. 발바닥이 먼지만큼 두꺼워지는 것 같다. 먼지를 신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먼지는 발바닥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막지 않는다. 느낌이 종아리와 허벅지와 등뼈와 목을 통해 두피에 닿는 것을 막지 않는다.
—김기택, 「발바닥」(『애지』, 2019년 가을호) 부분

사람들이 설마 그렇겠는가 하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발바닥에 마른 먼지가” 끼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먼지들이 타고 날던 공기”를 느낀다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과장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시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 느낌 사이에 상상하나를 집어 넣기는 했다. 발바닥에 낀 마른 먼지를 본 순간, 허공을 날던 먼지를 상상하고 있었을 시인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상상을 했다면 그 순간의 먼지 느낌을 갖는 일은 충분히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식의 상상을 끼워넣으면 “먼지 먹은 발바닥이 목말라 하는 것 같다”는 시인의 이야기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상상의 도움을 얻어 읽어가면 시인의 섬세한 감각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가 된다. 그리고 그 실제적 감각은 우리들이 발바닥을 통해 먼지마저 체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순간 발바닥에 먼지가 묻어 더러워지는 세상이 아니라 “먼지를 신고” 방바닥을 걷는 또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시인의 도움을 얻어 발바닥으로 먼지를 체감할 수 있게 되면 “벌겋게 터진 채 벽지에 붙어 겨울을 났다가 바스러진 모기 날개도 발바닥으로 들어”올 수 있다. 벽에 붙어 있다 떨어진 모기 날개가 발바닥에 묻는 순간이다. 그러면 “그 모기가 날던 공중도 발바닥에 함께 들어온다.” 그때부터 우리는 잠시 “모개 날개의 부력을 신고” 걸을 수 있다. 우리가 먼지를 신고, 또 모기 날개의 부력을 신고 방안을 걸을 수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먼지’가 “걸음이 되어 실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발바닥에 먼지가 묻어서 발이 지저분해지는 순간이 시의 세상에선 전혀 다른 세상으로 열릴 수 있다.
이필의 시로 넘어가본다. 첫 구절을 “우리는 매일 빵공장에 간다”는 말로 연 시인은 그 빵공장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주고 있다. 그곳에서 시인은 “영하 20도 냉동창고 안에서 마스크를 끼고/얼어붙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입김을 다 써 버렸”다고 말한다. 처음에 이 구절은 말을 할 때마다 허연 입김이 훨훨 뿜어져 나오는 영하의 냉동 창고에서 일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입김을 다 써 버렸”다는 말은 그런 이해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입김이 호흡이므로 내게는 이 구절이 마치 빵공장의 노동자들이 그들의 호흡을 바쳐 일해야 했다는 뜻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공장의 자본가가 요구하는 것이 그것인지 모른다. 자본은 단순히 노동을 바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호흡을 바쳐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입김이 허옇게 날려, 우리들의 호흡이 밖으로 완연하게 드러나는 냉동 창고에서나 비로소 그 사실이 감지될 뿐이다. 우리는 노동하고 있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호흡마저 일에 바치고 있다. 노동의 착취를 넘어 우리의 호흡마저 착취당하고 있다.
시인은 또 “컨베이어벨트에 빵을 얹었는데/우리는 뒤로 걷는 것 같았어”라고 말한다.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는 뜻일 것이다. 물체가 앞으로 움직이면 우리는 몸이 뒤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동자가 노동을 하면서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무얼 걸러 내려는 건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 이유 없이 우리는 강박처럼 무얼 거르고
벨트를 멈춰 세우고 다시 무얼 거르고
벨트를 멈춰 세우고 다시 무얼 거르고
몇몇은 그냥 제자리에 서서 왔다 갔다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지
—이필, 「빵공장의 비밀」(『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 부분

시인은 일을 하면서도 “무얼 걸러 내려는 건데 그게 무엇인지/아무 이유 없이 우리는 강박처럼 무얼” 걸러냈다고 말한다. 노동에서 작업만 남고 판단는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는 속도가 그런 상황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들이 강요받고 일의 현실이다. 노동자는 인간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반복된 작업을 계속하는 기계가 되어간다.
또 공장에선 무엇인가를 “닥치는 대로 공업용 세제”로 씻는 일이 있었고 그 일 때문에 “우리의 위생에 대해서/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잠잠해져’ 버렸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의 삶이 그렇게 무마된 것은 아니다. “창고를 나가기 전에/갑자기 누군가 눈앞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물질은 밤새 우리 몸속을 쏘다니다가/너무 환히 표백된 공장 정문 앞에서/구호가 되었”다고 덧붙인다.
시인의 얘기는 삼성 반도체의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한 백혈병과 산업재해 피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워온 단체 반올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삼성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공장은, 또 기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움직인다. 시인은 노동자들의 오늘을 “여전히 우리는 매일 빵공장에 간다”는 말로 전한다. 내게는 빵공장에 간다는 말이 가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치환되어 들렸다. 그 빵공장은 없어졌고, 더이상 그런 빵공장은 이 세상에 세울 수 없었다는 말로 시를 마감할 수 있어야 정상인 세상일 것이다.
이필이 이 땅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빵공장이라는 비유를 내세워 구조적 차원에서 전했다면 박세미는 일, 즉 노동이 우리 인간과 갖는 관계를 구체적 작업을 통하여 아주 미세하게 짚어내면서 또다른 차원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혹독한 현실을 전하고 있다.
시에 등장한 인물은 “1인 운영 국숫집의 주인”이다. 주인이지만 종업원이기도 하다. 국수집을 혼자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국수 한 그릇이 손님에게 나가기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이 그의 일이다.” 시인은 그가 “자가 제면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미 완성된 면을 구입하여 쓰지 않고 그때그때 곧바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최종적으로 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죽은 사람이 하지만 면을 뽑는 것은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주인은 기계의 도움을 얻어 면을 뽑은 이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해내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은 “숙달된 일에는 생각이 잘 끼어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일에 숙달이 되면 일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일은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날 사고가 발생한다. “기계가 그의 손을 반죽인 양 빨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즉 “기계와 손이 서로를 단단하게 옥죄어 상대의 작동을 중지시켰을 때/생각만이 이 가게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사고가 나고서야 비로소 생각할 순간을 갖게 된 것이다. 혹독한 댓가였지만 주인은 이를 통해 귀중한 것을 얻는다.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것이며, 손가락이 국숫가락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며, 손 조심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과 실제로 손을 조심하는 일 사이의 관계없음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다
당연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
일하는 자가 생각하는 자가 된 것이다
—박세미, 「일」(『문학동네』, 2019년 가을호) 부분

다행히 주인은 손가락을 잃지 않았다. 달려온 구급대원들이 “금방 제면기를 분해했”고 비록 “세 마디로 이루어진 희망”이 “생각보다 더 잘게 부스러지고 굽어”져 있었지만 제 때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는 “손이 회복되는 동안 가게가 아닌 곳에서/그는 새로운 제면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 시를 읽었을 때 내가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린 이름이 있다. 김용균이다. 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다 석탄을 실어나르는 컨베이어벨트에 빨려 들어가 죽은 노동자이다. 그는 살아나지 못했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산업재해로 죽어 생을 마감했다. 국수집의 주인은 살아남아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그는 죽어서 이제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시는 국수집 주인의 얘기를 전하고 있지만 마치 죽은 김용균의 생각은 이제 살아있는 자들이 몫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새롭고 안전한 일의 방식을 살아있는 자들이 고민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듯하다. 때로 한 젊은 노동자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터에서 재해란 이름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이제 그의 생각이 되는 것이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 된다.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제면 기계에 빨려들어간 살아있는 우리들의 손가락이 된다.

3
나는 우리 앞의 실상이 과학이 알려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할 때가 많다고 말했었다. 시도 그렇다. 시는 시인의 안에 시의 이름으로 축적되면서 생성되는 또다른 존재가 있어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의 시를 받아적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는 멀쩡하게 있는 존재를 지우면서도 존재가 없어지면 부재로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 우리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울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 슬픔은 울지 못하는 울음으로 내면화된다. 내면화되면 보이지 않지만 시는 보이지 않는 울음을 보여주곤 한다. 돈이 그 액수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몰가치화해버리는 무서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시이다. 세상은 중심을 벗어난 주변부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반대이다. 주변주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의 자리를 마련한다. 최소한 시의 세상에는 정의가 있다. 시는 심지어 먼지마저도 우리의 발바닥에서 걸음을 걷게 해준다. 시가 자본의 무서움을 알려주기도 한다. 자본이 무서운 것은 돈없이는 못사는 세상으로 우리들을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제거해 버린다는데 있다. 시는 우리들을 생각하게 하고 그 생각을 통해 우리가 인간을 되찾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2019년 계간지의 가을호에서 시를 읽었을 때 시가 내게 알려준 것들이었다.
(『문예바다』, 2019년 겨울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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