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태도와 삶의 양상 —신용목의 시 「누구여도 좋은」

시인 신용목은 그의 시 「누구여도 좋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조금 더 젊었을 때는 누군가 살아 있었을 때 누구여도 좋은 누군가
어떻게 살 거냐
물으면, 나는 머뭇거리고 넌 되물었지만 아이가 있는 형들은 다 대답을 가졌다
그게 무서웠다
계획이 있다는 거 골목이 목적지를 가진다는 거
인생이 도달한다는 거,
용산역에 내렸을 때 누군가 나에게 전단지를 건넸다 빨간 고딕체로 씌어진 미래는

외롭게 죽을 각오를 못하게 한다
—신용목, 「누구여도 좋은」(『문예바다』, 2019, 겨울호) 부분

시인의 얘기는 젊었을 때 누군가 어떻게 살거냐고 물었는데 시인은 머뭇거리면서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으나 “아이가 있는 형들은 다 대답을 가”지고 있었고, 시인은 “그게 무서웠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 답을 가리켜 “계획이 있다는” 것이었고, “골목이 목적지를 가진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어디엔가 도달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우리는 의아해진다. 아이를 가진 사람이 삶에 대해 계획을 가진다는 것이 왜 무서운 일인가. 혼자 살 때는 계획이 없더라도 아이를 갖게 되면 이제 아이의 삶 또한 책임져야 하는 부모가 되었으니 당연히 어떤 계획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가 되어 책임져야할 인생에 대해 답을 가진 형들과 그들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면 부모가 된 뒤에도 무계획적으로 살라는 말이냐라는 반문을 불러온다.
물론 나는 결국에는 내 의문을 지우고 시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해가 시작된 지점은 시인이 형들의 답을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왜 시인은 형들의 답이 어떠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은 것일까. 혹시 그 지점이 시를 읽는 우리들과 시인이 만나게 되는 접점 같은 곳은 아닐까. 시를 읽는다는 것은 혹시 시인이 말해주지 않는 그 접점의 지점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시인은 그 접점의 지점으로 스스로 자신을 찾아올 독자를 방해해선 안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형들은 어떻게 답을 한 것이었을까.
혹시 형들은 예외 없이 “어떻게 살 거냐”라는 물음에 어떤 삶의 양상을 대답으로 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잘 키워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그런 삶의 양상 중 하나일 수 있다. 혹시 형들이 갖고 있는 답들은 그 양상마저 무섭도록 똑같지 않았을까.
“어떻게 살 거냐”라는 질문이 묻고 있는 것은 사실은 삶의 태도이다. 삶의 태도는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어떤 삶의 태도는 아주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질문을 곧잘 삶의 양상을 묻는 것으로 혼동한다. 삶의 태도는 모두에게 다양한 삶을 열어주는 반면 삶의 양상은 그 형태가 닫혀 있다. 예를 들어 부자로 사는 삶과 가난하게 사는 삶은 삶의 양상이다. 반면 정직하게 사는 삶은 삶의 태도이다. 정직하게 사는 삶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가 살 수 있다. 하지만 부자로 사는 삶을 삶에 대한 답으로 선택하면 가난한 삶은 물론 정직한 삶도 버려질 수 있다. 정직하지 않게 살아도 부자로 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삶의 양상은 옳고 그름이 없으나 삶의 태도는 옳고 그름이 있다. 이 둘의 혼동은 엄청난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랑은 삶의 태도이다. 그 사랑이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며 사는 삶을 뜻한다면 그러한 삶의 태도를 구현하는 실질적인 삶의 양상은 남녀 사이에 국한되지 않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사랑의 태도는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낳는다. 하지만 사랑의 양상을 사랑에 대한 답으로 삼게 되면 남녀 사이의 사랑만 사랑을 보장 받을 뿐, 다른 사랑은 모두 사랑의 밖으로 쫓겨난다. 태도와 양상을 혼동하면 태도가 수많은 사랑을 잉태하지 못하고 양상이 사랑을 쫓아내는 일이 벌어진다.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삶의 양상은 누구도 강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선 삶의 태도를 고민하지 않고 삶의 양상을 강제하려 든다. 혼자 살다 “외롭게 죽”는 삶은 삶의 양상이다. 누구나 그렇게 죽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삶의 태도는 삶의 풍경을 바꾸기도 한다. 다시 말하여 삶의 태도를 달리하면 같은 풍경이 달리 보일 수 있다. 대체로 우리들의 눈에는 거리에서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는 청소부가 보이고 빗자루의 끝은 쓸어야할 낙엽이 많아 많이 닳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청소일이 아니다. “청소부는 나무의 것을 빼앗아 가을의 것으로 만”드는 중이며 바닥에 낙엽이 끊임없이 떨어져 쓸어야할 잎들이 계속 나오는 것은 빗자루가 “얼마나 닳았는지 바닥이 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삶의 태도는 똑같은 세상을 달리보이게 해준다.
기차를 만드는 것은 삶의 양상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렇게 어떤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삶의 태도는 기차를 만들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는 기차를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고를 내지 않는 기차를 만드는 것은 삶의 태도에 가깝다. 시는 그러한 삶의 태도가 목표로 삼는 세상이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란 것을 암시한다. 그 암시는 “달리다가 어느 순간 철로를 벗어난” 완구용 기차 얘기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이 가져야할 것이 삶의 양상이 아니라 삶의 태도란 것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찌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삶의 태도를 버리고 삶의 양상으로 내몰리는 일일 수 있다. 완구용 기차가 탈선을 하여 “빌딩은 무너지고 가로수는 쓰러지고 그래도 파란 모자 역무원은 서서 깃발을 들고 웃는다”는 대목에선 그렇게 삶의 양상에 내몰린 어른들의 삶이 엿보인다. 사고가 나도 웃으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일 때가 많다.
신용목은 “유리에 이쪽과 저쪽이 함께 스미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태도와 삶의 양상도 혼동될 때가 있다. 하지만 구별해야 할 것이다. 또 곰곰히 생각해보면 구별이 된다.
시는 “면접을 보고 와서, 우리는 숲으로 난 창이 있는 카페에서 촛불을 불었다”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면접 뒤에 어디에 합격을 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생일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축하할 일이 생긴 것 같다. 문득 젊을 때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했던 어떤 삶의 태도를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축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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