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석의 시집 『2170년 12월 23일』은 제목으로만 보자면 우리들을 먼 미래의 세상으로 데려간다. 대략 150년 뒤의 미래이다. 그때 닥칠 세상에 대해 같은 제목의 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흐린 겨울 저녁인데 죽은 자의 글을 따라가는 앳된 소녀가 롤러스케이트 같은 기계를 타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땅은 좁아졌고 사람들도 줄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2170년 12월 23일」 부분
물론 상상일 것이다. “롤러스케이트 같은 기계를 타고 공중”을 타는 미래의 세상은 공상과학영화에서 곧잘 접할 수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시인도 마찬가지의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며, 그 상상 속에선 “구름 위를 한 사내가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걷”는 세상이 펼쳐진다. 그때쯤 인간이 중력을 뿌리치고 구름 위를 걷게 될 것이란 상상이다. 시인은 그때의 인류를 가리켜 ‘신인류’라고 말한다. 문명의 발달 속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시인은 미래를 상상하며 자꾸 “거기에 나는 없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먼 미래의 일이므로 당연히 우리는 그 시기의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우리가 거기에 없었다고 한 말은 다른 뜻으로 보인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누렸던 문명은 그때가 되면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문명이 세대와 세대 사이의 차이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한세대 사이에서도 소멸을 반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1995년에 만들어진 만화영화 <에반게리온>은 20년 뒤인 2015년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영화는 20년 뒤도 내다보질 못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카세트 테이프 재생기가 가장 좋은 예이다. 2015년엔 그 기기가 이미 사라지고 MP3 플레이어나 핸드폰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기기가 카세트 테이프를 대체하고 있었다. 2015년엔 카세트 테이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150년 뒤의 세상에서 우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150년 뒤의 세상이 문명이 찬란하게 발달한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시인의 상상 속에서 그 시대에 사람들이 공중을 걷게 된 것은 “지상이 오염되”어 “여성과 사내 들은 주로 공중에 떠 있거나 지하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때쯤 되면 지상의 오염으로 땅에서 살 수가 없어 공중을 걷게 된다.
시집의 제목은 150년 뒤의 미래로 가 있지만 미래의 세상을 말하고 있는 시는 그렇게 많지 않다. 「2170년 12월 23일」과 함께 「빙장」 정도가 미래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빙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을 시에서 인용해본다
우리는 액화 질소 가스를 사용하오 구시대적이지요 영하 2백 도로 시신을 얼려버리오 그러곤 분쇄하는 거지 그러고 나면 딱 30센티미터짜리 관에 들어간다오
—「빙장 氷葬」 부분
우리는 장례의 형태 또한 근래에 들어 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한때는 매장이 일반적인 장례의 형태였지만 그것이 화장으로 변했고 최근에는 수목장이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시인은 미래엔 매장이나 화장, 수목장과 같은 형태의 장례는 사라지고 빙장이 나타날 것이라 말한다. 시신을 얼려서 분쇄하는 방식의 장례이다. 화장은 매장할 땅의 부족으로 등장했다. 수목장은 죽음 뒤의 세상을 나무와 함께 하고 싶다는 인식의 변화가 가져왔다. 빙장의 등장은 오염된 세상의 결과이다. 빙장을 하기 전에 “먼저 시신의 몸속에 있는 칩들을 제거해야 하”며 “팔뚝이나 무릎에 있는 폰들과 인공지능이 감시하는 대체 장기들 스스로 진화한 랜섬웨어 더블들 잔여 파일들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설명은 우리의 몸을 기계로 채워가며 살아가야 하는 앞으로의 세상을 암시한다. 그 설명에 덧붙는 “수은과 납 성분 기타 중금속들은 나중 문제지”라는 말은 우리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빙장은 오염된 세상이 불러오게될 장례의 형태이다.
놀라운 것은 미래의 죽음이 자연의 복원력에 기대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가 아니라 버려둘 때 일어난다. “분쇄 처리가 끝난 관은 모두 오염 지역으로 보내지오 그곳 땅에 묻히는 거지요 관도 모두 한 달 안에 분해되오 미생물들이 다 분해하지요 놀라운 것은 이 분쇄된 시신이 묻힌 곳의 땅들이 살아나고 있다는 거요 시신의 영양을 빨아먹고 꽃들이 벌레들이 살아나는 장관을 보인 거요”라는 얘기가 그 순간을 전한다. 이 얘기는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란 이름으로 살아난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를 떠올리게 한다.
미래를 말한 두 편의 시로 미루어 짐작하면 성윤석의 시는 많은 부분이 오염된 오늘의 세상을 말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시에서 우리가 사는 오염된 세상의 실태를 전하거나 고발하는 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시가 오늘을 말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의 힘겨움이다. 삶의 힘겨움은 시의 곳곳에서 눈에 띈다.
3천만 명이 어느 날 아침 해고 통지서를 알람 기계를
통해 받았으며 2천만 명은 집을 잃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음」 부분
평생 직장이란 말은 이제 없어진 지 오래이다. 직장을 다니는 모든 이들이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상이다. 직장은 때로 돈벌기 위해 다니는 일터가 아니라 목숨줄이기도 하다. 2009년에 있었던 쌍용차의 정리해고 사태 이후에 30명에 이르는 해고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한 것은 어떤 이들에겐 직장이 곧 목숨의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기업이 사람의 목숨을 흔들며 이윤을 챙기는 시대이다. 살아가는 것이 힘겨울 수밖에 없다.
집을 잃는 일도 잦다. 끊임없이 전해지는 각종 자연 재해는 재해와 함께 집을 가져가 버린다. 그렇게 집을 잃고 나면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도 생긴다. 원전 사고가 난 일본의 후쿠시마 사람들이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거할 곳이 있어도 문제이다.
수갑도 없이 들어갔던 감옥을 내놓습니다
—「셋방 있음」 부분
시의 제목은 시인이 말하는 ‘감옥’이 셋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인은 이를 가리켜 “사람보다 먼저/무기징역을 받은 감옥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성실하게 일하고 아낀다고 해도 셋방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세상이다. 모은 돈의 액수보다 더 빠르고 높게 임대료가 뛰어 오르기 때문이다. 셋방을 탈출하는 길은 셋방을 나와 더 작은 다른 감옥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감옥에 진배없다.
삶이 이렇게 되면 습관적으로 인식되던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 우리에게 대나무는 곧은 삶의 대명사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달리 투영된다.
모든 순간의 그림자 지구에서 가장 많은 무릎을
만들고 있는 대나무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이 많은 무릎을 딛고 올라간 것들의 울음들
대나무는 무릎을 얻는 대신 속을 버렸구나
—「그림자놀이」 부분
시인에겐 대나무의 마디가 무릎으로 보인다. 무릎을 딛고 자란 것이라면 사실은 기어간 것이라고 봐야 한다. 기어가는 삶이 행복할 수는 없다. 대나무의 무릎에서 울음소리가 들린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 했기에 대나무는 속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삶이 힘겨우면 대나무 마디가 무릎으로 보이고, 나무의 빈속에는 속을 내주고 살아야 했던 자신의 삶이 투영된다.
힘겨운 삶은 삶에서 목적을 제거해 버린다.
그에겐 목적이 없습니다 살아 있으니 살아갑니다
—「고통」 부분
목적 없는 삶이 어디에 있으랴. 그러나 시인은 그런 삶이 있다고 말한다. 목표나 목적은 삶을 앞으로 추동하는 힘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하중이 그 목적을 제거할 때가 있다. 현실이 암담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럴 때는 “살아 있으니 살아”가게 된다. 목숨이 삶을 밀고가는 동력으로 작용할 때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동력이다. 시인이 보기에 많은 사람이 목숨이라는 최소한의 동력으로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꿈꾸었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검은 개인」이라고 보았다. 같은 제목의 시가 여러 편이다. 그 여러 편들의 시가 시인이 말하는 검은 개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나는 개인이라서 만인을 경멸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만인이라서 만인을 지긋이 바라보고 그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을 생각한다
한 개인의 걸음 말이다
—「검은 개인」 부분
나 검은 무리가 아니라
검은 개인
—「검은 개인」 부분
우리는 당신이 셀 수 없을 때까지
표정을 생산하지
우리는 개인이다
—「달밤에 체조」 부분
성윤석이 보기에 이 시대는 만인의 시대이다. 만인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만인이 되길 강요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집단화되는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시인이 ‘만인’이라 부르는 집단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함몰되곤 한다. 때문에 만인의 만인은 다양한 개개인이 모인 집단이라기 보다 자그마치 만인인데도 마치 하나의 개인과 같이 움직인다. 시인은 만인이 되기보다 개인으로 살고 있다. “검은 무리”가 아니라 “검은 개인”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시인이 하필 개인을 강조하면서 그 개인을 검은색으로 나누어 색으로 지칭한 것은 검은 색이 모든 빛을 흡수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흰색은 그런 측면에서 고고한 색이다.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고고한 색보다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까지 모두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이 되고 싶어한다.
집단과 개인이 다른 것은 집단은 개인을 구성원으로 하면서도 그 개인들의 표정을 모두 일색으로 강요한다. 때문에 집단의 개인은 표정이 모두 똑같아진다. 그러나 집단에 속해 있어도 개인이 모두 독립되어 있다면 표정이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이 셀 수 없을 때까지” 끊임없이 “표정을 생산하”는 자가 진정 개인이다. 개인은 개인만의 고유한 표정을 갖는다.
시인으로부터 엿보면 삶은 힘겹고 만인의 하나가 아닌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가 않은 세상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그 힘은 의외로 우리 가까운 곳에 있다. 시집 속엔 여러 예가 있으나 두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성윤석은 마당에 산수유가 꽃을 피운 봄을 이렇게 말한다.
샛노란 봄 마당을 내어놓는다
마당은 이렇게도 건축되는 것이다
—「산수유」 부분
시인의 눈에 산수유는 “스스로 날개 한번 펴지 못한/노오란 명줄들”이다. 산수유의 꽃에 삶의 힘겨움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한편으로 산수유를 “노오란 숨”이라고 말한다. 꽃으로 호흡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꽃들과 달리 존재감이 크지 않아 “우리도 있었다고” 알려야 하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있겠다고” 서 있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이 산수유이다. 시인의 눈엔 그 산수유가 꽃을 피우고 봄을 불러 ‘봄 마당’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마당이 건축되는 곳에서 꽃을 호흡하며 한동안 견딜만해진다.
시인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섬진강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섬진강 물은 물이 물을 가느다랗게 뽑아 다시 물에게 주는 그런 강이었네 물속에선 벚굴이 벚나무를 기다리지
—「하동 매화 농원」 부분
벚굴은 섬진강 하구 일대에서 자라는 굴을 가리킨다. 서너 개가 한데 모여 자란다고 하며, 그 모습이 물속에 핀 벚꽃과 비슷하게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다. 또 벚꽃이 필 무렵에 맛이 가장 뛰어나서 붙은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거나 섬진강은 그곳만의 굴을 갖고 있다. 자신만의 삶을 갖는 꿈과 겹쳐진다.
삶은 힘겹고 문명의 먼 미래는 암울하다. 때로 그런 현실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오랫 동안 자연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해온 것들이다. 우리의 힘이 오랫동안 가까운 데 있었다.
(『포지션』, 2019년 겨울호, 시집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