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어제는 잘 때 여름내 열어두었던 창문을 반쯤 닫아야 했죠.
오늘 바깥을 나가 보니
손끝을 스치는 바람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어요.
계절의 느낌은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며칠만에 몸을 씻었는가를 세어보는 것으로
금방 손에 잡히곤 하는데
근질근질한 머리를 고수한채 벌써 이틀째를 넘기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가을이 상당히 가까이 온 것 같아요.
바깥으로 나서면 여전히 여름이 남긴 초록빛 자취가 여기저기 지천이지만
벌써 가을을 입에 올리는 성급함이 그다지 어색하지가 않아요.
벼들이 고개를 숙였어요.
벼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수록 잘 익었다는 얘기죠.
그러고 보면 우리는 겸손으로 익은 결실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셈이예요.
근데 왜 가끔 그 겸손한 밥알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는 곤두서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먹은 밥알이 곤두서지 않는 세상에서 겸손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논에선 벼가 아니라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허수아비가 한동안 지켰을 밭의 추수는 다 끝난 것 같아요.
그럼 이제부터 허수아비는 뭐하죠.
아마도 이제부터는 가을을 지키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허수아비씨,
바람이 CD를 흔들 때마다 음악이 울리는 건가요.
봉숭아는 붉은 꽃을 주렁주렁 매달았어요.
이제 누군가의 손끝을 저 붉은 빛으로 물들인 뒤
첫눈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겠지요.
일단 봉숭아는 그녀에게 가장 먼저 붉은 빛을 나누어 주었어요.
한쪽 손의 새끼손가락, 약손가락, 그리고 가운데손가락,
이렇게 세 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들였더군요.
나, 너, 그리고 우리 딸,
아무래도 그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손가락은 그녀가 물들였는데
우리 세 식구가 온통 봉숭아의 붉은 빛을 뒤집어 쓴 느낌이었어요.
아직까지 고추밭의 8할은 시퍼런 색이예요.
그렇지만 선홍빛의 고추가 사이사이로 뜨겁게 익고 있죠.
빨간 고추가 매운 것은 이해가 되는데
푸른 고추가 매운 것은 잘 이해가 되질 않아요.
특히 빨간 고추가 익어갈 때면 푸른 고추는 하나도 안매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느낌을 믿었다간 큰 코 다칠 거예요.
고추잠자리도 빨갛게 익었어요.
근데 고추잠자리는 여름 내내 푸른 빛이 었나요.
밤이네요.
바람에 떨어진 밤송이도 참 많더군요.
익기도 전에 떨어진 것들 말이예요.
따가운 가시로 사람들 손은 피했는데
바람의 짓궂음은 피할 수가 없었나봐요.
이건 호두예요.
밤송이에 한대 맞아도 얼얼하지만
요것도 털 때 한대 맞으면 머리가 띵하죠.
은행이예요.
잎도, 열매도 노란색으로 물들어가겠죠.
원래 노란색은 아이들 색인데
왜 익어가면서 아이들 색을 갖게 되는 걸까요.
감이예요.
말랑말랑하게 익은 감은
그 부드러움이 간난 아이의 볼을 연상시켜요.
저렇게 푸른 색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을 때면
분명 푸르른 젊음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말랑말랑한 진홍빛으로 무마되면서
아이의 볼과 같은 부드러움을 한움큼 손에 쥐고는
삶의 마지막 자리에 서게 되는 걸까요.
코스모스예요.
어릴 적 시골서 학교 다닐 때,
우리들이 항상 이 꽃을 길 옆에 심었죠.
그러고 보면 시골길의 가을은 우리가 코스모스를 심어서 데려온 것이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시골길에 우리가 심었던 코스모스가 없었다면
가을은 오다가 돌아갔을 것 같아요.
해바라기죠.
갑자기 해바라기 앞에 죽치고 서서
깜깜한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고 싶어요.
그래도 밤이 환할 것만 같아서요.
들꽃 둘이 머리를 맞대고
얘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아마도 오늘의 바람은 느낌이 남다른가 봐요.
가을 바람이 스치면
세상의 모든 풀들이, 세상의 모든 꽃들이, 세상의 모든 나뭇잎이
서로 가까이 몸을 부비며
얘기를 시작해요.
이 노란빛좀 보세요.
초록이 받쳐드니 더욱 곱지요.
여름내 가꾸어온 빛이예요.
그러니 이 빛을 가꾸는데 들어간 정성은 참 대단한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예요.
등에 메신 망태기 속엔 무엇이 들었을 까요.
이른 가을의 청명함이 그 속에 가득 들어있을 것 같아요.
4 thoughts on “가을이 오는 소리”
어릴때
화단 비슷한 데서 꽃을 따서 소금 좀 넣고 돌맹이로 찍어서
손톱에 바르고 예쁘지 한 지가 새삼스럽네요~^*
그때 그 여자 친구들 얼굴 한번 더듬어 보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한번 그려봅니다~^*
그때 그시절은 참 아름다움의 추억이 있었나 봅니다~
추억의 시간 넘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실은 고것만 뽀샵처리 했어요.
손톱 부분은 놔두고, 나머지 부분만…
Red 채널 복사해서 레이어하나 만들고, 모드를 Luminosity로 바꾸고, Blur 넣고, Mask 넣은 뒤에 브러시로 손톱 부문만 만져서 원래 색깔로 복원시켰죠.
아내가 손이 거칠어서 흉하다고 못넣게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젊었을 때 손은 아주 고왔답니다.
내가 왠수죠, 뭐.
봉숭아 꽃물들인 손이 참 이쁘네요.^^
저도 내일은 들여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