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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용 시인이 많이 아프다. 병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말을 빌려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병의 명칭을 ‘아스트로싸이토마’라고 알려준다. 낯선 병명이다. 그 때문인지 시인은 주를 통해 “별무리 모양의 성상세포종”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주의 용어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어의 전문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용어가 전문적이 되면 병의 심각성에 대한 체감도가 떨어진다. 그 병이 어떤 병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적으로만 보면 낯선 용어의 병명과 설명은 병의 심각성을 우리들로부터 밀어낸다. 아마도 그것이 시인이 병을 밀어내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뇌종양의 일종이라거나 더 나아가 암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병의 심각성은 누구에게나 곧바로 체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체감도 강한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심각한 병이 왔으나 시인은 그 병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언어로 밀어낸다.
하지만 언어로 밀어냈다고 병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마주한 병의 심각성은 사실 시인의 아내가 “여보, 잘 들어. 악성이고……. 말기래”라고 말했을 때 이미 감지가 된다. “수술하자. 안하면 육 개월……. 실은 그것도 힘들대”라는 이어진 아내의 말은 심각성을 엿볼 수 있는 또다른 대목이 된다. 병이 심각해지면 쉽게 치료와 완쾌를 입에 올릴 수 없다. 그 경우 병은 곧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정도가 심할수록 대개 병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불러온다.
그런데 병을 맞이한 시인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오히려 병을 앞세워 자신을 찾아온 죽음을 껴안으려 한다. 시인은 수술을 종용하는 아내에게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 끊어”달라고 말한다. 시인에 의하면 스위스는 “존엄사가 인정되는 삶과 죽음의 중립국”이다. 시인은 병을 치료하려 들지 않고 그곳에 가서 죽으려 한다.
시인의 아내는 말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봐. 제발 수술하자 응? 내가 살릴게 꼭 살릴 거야”라고. 아내의 말에 김점용은 “미안해. 안 할 거야. 약속 지켜.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 끊어줘. 내 통장에 돈 있어. 스위스 가고 싶어”라고 고집을 부리더니 기어이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고 만다. 시를 읽는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 하지만 너무 걱정들 마시라. 이는 실제가 아니다. 시인이 말하는 비행기는 시인의 머릿속 상상의 비행기이다. 시인이 “스위스행 비행기 안에 있”고 “높고 아득한 공중을 날고 있다”고 했지만 그 비행기는 “안전벨트도 없고 기내식도 없고 예쁜 스튜어디스도 없”는 상상의 비행기이다. 그러나 이 상상의 비행기는 단순히 스위스에 가서 존엄사를 선택하고 싶다는 시인의 욕망을 대변하지 않는다. 이 비행기 안에선 병과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관점이 뒤집힌다. 대개 우리에게 죽음은 삶의 종언이자 소멸이다. 그러나 비행기 속에서 더 이상 그런 죽음은 없다.
아스트로싸이토마?
내 머리 속에 박힌 무수한 죽음의 별들이
날아가는 내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래, 지금까지 너무 한쪽으로만
비대칭으로 살기만 한 거야 영원히 살 것처럼
—「스위스행 비행기」 부분
김점용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너무 삶쪽으로만 쏠려 있다. 우리들에게 그 삶은 살아있는 삶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삶은 삶에 속박된 삶이기도 하다. 속박된 삶은 우리들이 삶을 부여잡고 바등거리게 만든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점이 더욱 여실해진다. 속박된 삶 속에선 죽음이 오면 삶은 추락한다.
「스위스행 비행기」는 바로 그 삶의 속박이라는 지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이다. 그 공간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힘은 현대 과학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인생이 어딨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반문을 통하여 그 힘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 세상에선 종양이라는 “머리 속의 별들”이 죽음이 아니라 “혼자서 스스로의 장례를 치르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때 시인도 함께 날아오른다. 죽음은 삶을 추락시키지 못한다.
비록 기어이 스위스행 비행기에 오르긴 했지만 그것이 실제의 비행기가 아니었던 탓인지 시인에게는 여전히 비행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보인다. 그 미련은 비행기 놀이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비행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비행기가 멀리 나타나 우리의 시야에 잡히면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나 스위스행 비행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 비행기에 탑승하여 소멸의 죽음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의 힘으로 전환시켰던 시인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시인은 “날아오는 비행기를” 손으로 잡는다. 그러자 “손 안에서 팔딱이는 금속의 심장”이 “뜨거운 엔진 속에서” 느껴졌다. 비행기는 비행기로 머물지 않고 시인의 손 안에서 “처음엔 조그맣게 멸치였다가/전갱이였다가 힘 좋은 참숭어였다가/등이 미끈하고 거대한 범고래가” 된다. 비행기 놀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시인은 “즐거워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비행기를 손안에 잡아두지 않는다. “식은 구름 한조각 조차 없는 텅 빈 하늘로/놔줘야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일 것이다. 아마도 “도착이 도착이 되고/출발이 출발이 되”는 실제의 비행기였다면 시인에겐 삶의 속박을 뿌리치고 손안에 잡아 놀이를 하며 즐기는 비행기를 가지게 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제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게 된다. 시인이 비행기가 “도착할 곳에” 이미 가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야
날아가는 비행기야
아득하게 사라지는 눈부신 천사야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네가 도착할 곳에 미리 당도해 있단다 비행기야
사랑하는 나의 비행기야
—「비행기야」 부분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로 가고 싶어 했던 시인은 이제는 비행기를 갖고 놀다 놓아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의 제목만 보고 비행기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가 보다고 걱정했지만 그 반대로 이제는 그 욕망에서 벗어나 많이 괜찮아진 듯하다.
나는 시인이 아내의 말에도 불구하고 스위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듯 말했지만 사실 시인은 아내의 말을 들었으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수술은 매우 특이하게 이루어진다. 시인이 자신을 ‘나’와 ‘그’로 분리시키고 수술을 ‘그’의 몫으로 맡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자면 삶의 속박을 운명처럼 살아가야 하는 몸의 존재이다. ‘나’는 그 속박을 모르는 시인으로서의 존재이다. 시인은 그를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자신은 그가 수술을 끝내고 돌아올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그도 몸이 불편한 사람
나와 같이 크고 둥근 휠체어를 타고 올 것이다
저 문이 열리면
검은 바퀴를 밀면서 내게로 올 것이다
그림자처럼 스르륵 와서 그대로 나의 절반이 되어줄 것이다
문이 닫히기 전 순식간에
내 절반의 나쁜 몸을 가져가고
바로 된 그의 몸을 붙여놓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분
수술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시인이 자신을 나와 그로 분리하여 그를 수술실에 들여보내는 것으로. 그를 수술실에 들여보낸 나로서의 시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몰라야” 하는 시인으로 그를 기다렸다.
몸의 존재로서의 그가 수술을 잘 감당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술은 후유증을 남겼다. 걸음걸이가 불안해진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잡지 않으면 몸의 균형이 흔들렸다. 그 때문에 시인은 “수평선을 잡고 걷”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가 수평선을 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허공이라도 잡으려는 듯 팔을 뻗어 균형을 잡아야 했으며, 그런 식으로 “똑바로 걸으려 애”쓰게 되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또 시인은 ‘왼눈’이 “감기지 않아 눈물이” 나곤 했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균형을 잃어버린 몸에 대한 설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인은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 않고 “눈물을 깎는다”고 말한다.
수평선을 놓칠세라 꽃을 깎는다
눈물을 깎는다
—「눈물을 깎는 법」 부분
깎는다는 행위는 대패질을 말한다. 대패질은 균형의 행위이다. 시인은 이를 “손은 머리를 감싸듯 가볍게 잡되 오른손은 대패 뒤꽁무니와 구멍 중간을 단단히 잡”아야 하며, “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무게중심을 오른발로 옮기며 살짝 당”겨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안한 보행과 그로 인해 흘린 눈물이 설움이 아니라 눈물을 깎는 행위가 된 연유이다. 시인은 “수평선을 들고 햇빛에 비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재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아니 “눈물을 깎으며 눈물 속을 걷”고 있다. 김점용의 세상에 서러움에 흘리는 눈물은 없다.
상황은 사실 좀더 심각하다. 김점용이 자신의 병 하나만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병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입장이다.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시다. 시인은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자꾸 숨겼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호미를 숨기고 얻어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호미도 숨기고/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날의 어머니를 이렇게 전한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서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거대한 황혼을 뒤로하고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황혼」 부분
시를 읽으며 나는 치매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것이 혹시 이 땅의 여자들에겐 숨기고 참아내며 살아야 했던 삶과 그 습관이 앗아가 버린 자기 자신의 상실이 가져온 질환은 아닐까. 평생 숨기고 참아야 했던 일들이 어머니에겐 그 얼마나 많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땅의 여자들이 스스로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자신을 숨김없이 살 수 있는 날이 오면 여자들에게선 그 병이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의 어머니 얘기는 나로 하여금 여자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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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심각한 병이나 치매는 삶의 큰문제이다. 그런 문제들 앞에 서면 우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실 삶은 수많은 사소한 것들의 연속이다. 김점용은 그의 섬세함으로 작은 것에서 엿보이는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벽에 달마도를 거는 일은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그 사소한 일에 우리의 삶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일에서 삶을 보고 있다.
시는 “못 박는 일은 쉽지 않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단단한 시멘트 벽”이라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어 조금만 힘을 주면/튕겨나가고/튕겨나간다.” 시멘트 벽에 못을 박아본 사람이라면 경험해 봤음직한 일이다. 이 사소해 보이는 일이 시인에게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순간이 되고 있다.
사람들도 그렇지
내 사람인가 싶을 때
속잎에 비치던 눈물
녹이 슬고
등을 보이고
—「달마도를 걸다」 부분
튕겨나오는 못은 일그러지고 어긋나는 인간 관계의 양상이 된다. “넓게 패인 못 자국”은 그렇게 하여 남게된 상처이다.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덮는 방법은 또다른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상처를 “닿을 수 없는 그림으로라도 덮어보자고/의자 위에 발끝을 들고/조금 더 위에/조금 더 위에” 자꾸 못을 새로 박으려고 하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천장을 뚫고 윗집 7층의 벽에 22층의 벽에/아파트 옥상에 뜬 둥근 달의 거실에/달에도 못 걸고 그 위에 더 높고 먼 별의 창문에/별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별빛에 못질을 하”도록 만들기에 이른다. 별빛에 못질을 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못질을 했다고 생각한 “먼 별빛”은 사실은 ‘헛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리가 못질을 한 것이 사실은 “퍼렇게 멍든” 우리 자신의 ‘손가락’이라고 알려준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상처를 덮기 위해 또다른 관계를 꿈꾸지만 또다른 상처만을 만들며. 시는 답을 들려주진 않고 있다. 그렇지만 때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 우리가 구해야할 답의 시작일 수 있다. 「달마도를 걸다」는 사소한 일에서 그 시작의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시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회의를 내포할 경우, 그러한 회의의 순간은 수없이 많다. 아픈 자가 빠른 치유와 완쾌를 원할 때 시는 무력하다.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원할 때도 시는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 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양이를 한 마리씩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김점용은 우리에게 「검은 고양이를 받아줘」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언제인가 “문 밖에 고양이가 울던 밤”이 있었고, “안과 밖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그건 고양이가 분명했”다고 말한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리던 어느 하룻밤이 있고나면 그때부터 어둠 속에 검은 고양이를 채워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시인이 내미는 검은 고양이를 받으려면 날이 어두워지기만 기다리면 된다. 물론 시인도 인정을 한다. “보이지 않고 본 적이 없”다고. 그렇지만 시인은 그래서 사실은 고양이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검은 고양이가 분명”하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시인은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것 같다. 고양이를 내밀면서 동시에 “삶이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르는 채 넘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말장난 아니냐며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사람들 때문에 덧붙인 말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식의 딴지만 걸지 않는다면 시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 바로 “오랫동안 찰흙같이 끈끈한 밤이 계속되”면 검은 고양이가 “갈빗살을 타고” 들어와 우리 “안에 새끼를 낳고 또 낳아/역진화를”를 하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검은 고양이가 “온전한 어둠을” 완성시키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다치지 않는 밤”을 살 수 있다. 김점용이 말한다.
이 밤에 도둑고양이처럼 녹아든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통째로 받아줘 즐겁게 받아줘
어서
—「검은 고양이를 받아줘」 부분
그러나 여전히 시인이 내미는 검은 고양이에 당혹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검은 고양이를 받아들기에는 너무 현실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시인도 그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좀더 우리들의 피부에 닿을 수 있을 듯한 구체적인 세상으로 우리들을 이끈다. 그 현장은 “추수 끝난 벌판이다.” 벌판에선 트랙터가 “타타타타/웅웅웅웅/온 동네를 울리며 논을” 갈고 있다. 그런데 그 트랙터가 양희은의 노래를 틀어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나 보다. “이쪽 논 귀퉁이 트랙터가 방향을 바꾸느라/타타타타가 다다다다로 잦아들자/돌아서는 너에게 사랑한단 그 한 마디~/난데없이 양희은의 노랫소리 들”렸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는 계속되어 트랙터가 “다시 이쪽 논배미 모퉁이에 이르자/이번엔 한계령이” 들려온다. 그리고 결국 노래는 트랙터에 아예 양희은을 앉히기에 이른다.
양희은이 트랙터를 몰고 논을 간다
아침 이슬을 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간다
농부의 가슴팍을 간다
외로운 천지간을 간다
우묵하게 간다 쟁깃날을 내려
깊이, 더 깊이 간다
—「양희은이 트랙터를 몰고」 부분
추수가 끝났다고 했으니 벌판은 비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양희은의 노래를 틀고 그 빈 벌판을 갈면 벌판에 노래가 채워진다. 노래는 씨앗처럼 그 벌판에 뿌려져 겨울을 날 것이다. 봄이 와 논에 다시 모가 심어지고 그 모가 푸르게 자라나면 그때 우리는 모가 아니라 양희은의 노래를 보게 된다. 노래가 푸른 모로 자라난 세상이다. 노래는 듣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우리는 노래를 볼 수도 있다. 김점용이 우리에게 내준 세상이기도 하다. 시는 노래가 씨앗처럼 빈 벌판에 뿌려지고 그 노래가 푸른 모로 자라나는 세상을 우리에게 내준다.
3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가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병이 오면 우리는 대게 병을 앓는다. 그러나 시인은 병이 와도 시를 살아낸다. 시를 살아낸 시인은 시의 힘으로 병의 속박을 벗어난다. 때문에 그가 아픈데도 나는 행운처럼 그의 시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일이 있다. 내가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를 살아낸 덕택이지만 그의 시가 가능했던 것은 그에 대한 아내의 사랑 덕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시의 모태가 되는 그의 존재가 지워졌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그의 시 속에서 만나는 “제발 수술하자 응? 내가 살릴게 꼭 살릴 거야”라고 했던 아내의 말 속에서 그 사랑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김점용을 살리고, 김점용이 시를 살아낸 뒤끝에서,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사랑과 시를 오갔다.
(『문예바다』, 2020년 가을호, 신작시와 근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