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재편하는 언어들 —최형심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와 장이지 시집 『안국동울음상점1.5』

『시와사상』, 2020년 겨울호

1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네비게이션 장치를 이용할 때 우리에게 위치 정보를 알려주는 GPS 위성은 시속 1만4천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지상의 시계와 비교했을 때 이는 매일 7마이크로초씩 시간이 느려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마이크로초는 100만분의 1초). 아울러 시간은 중력에 따라 달라진다. 중력은 지상으로 높이 올라갈수록 약해지고 지상 가까이 내려올수록 커진다. 중력이 커질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그 결과 지상 2만킬로미터 상공의 위성에선 시간이 지상의 시계보다 매일 45마이크로초 정도씩 빨리 흐른다. 그 정도 높이의 상공에선 중력이 지상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GPS 위성의 시계는 위성의 이동 속도면에서 보면 더 느리게 흐르고 중력면에서 보면 더 빨리 흐른다. 그리고 그 둘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매일 38마이크로초 더 빠르게 흐른다. 이 때문에 GPS 위성에선 지상의 시계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주기적으로 시간을 보정해주어야 한다. GPS 위성은 그 보정 장치를 갖추고 있다. 뉴튼은 세상을 절대적 시간의 지배아래 두었지만 아인슈타인의 세상에선 속도와 중력에 따라 시간이 달리 흐른다.
최형심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와 장이지 시집 『안국동울음상점1.5』을 읽으며 내가 아인슈타인의 세상을 떠올린 것은 혹시 우리가 사는 일반적 세상이 절대적 일상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혹시 시란 언어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또 시인에 따라 독립시킨 세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언어가 독립되면 세상은 언어에 따라 재편된다. 아인슈타인의 세상에선 속도와 중력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지만 시인의 세상에선 언어에 따라 세상 자체가 재편된다. 나는 두 시집에서 몇 편의 시를 골라 언어가 어떻게 일상언어의 지배를 뿌리치고 세상을 재편하는가를 살펴볼 생각이다.

2
최형심의 시로 시작해본다.

수몰지대의 별빛을 무릎까지 끌어 올리고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최형심, 「물위의 잠」 전문

시를 읽으며 내가 상상한 것은 날개를 펼친 채 물위에 둥둥 떠 있는 죽은 나비 한 마리였다. 시의 제목은 「물위의 잠」을 말하고 있지만 나비가 물 위에서 잠을 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소는 수몰지역의 물가이며, 때는 별빛이 물에 비치는 밤이다. 나비가 떠있던 자리의 물은 무릎 깊이이다. 아마 낮에 물에 들어가 그 정도 깊이란 것을 확인해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황이다. 현실적 정황은 대개 완고하다. 달리 설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그 완고한 현실을 시의 세상으로 재편한다. 재편된 시의 세상에서 나비의 죽음은 나비의 잠으로 바뀐다. 우리에겐 이미 죽음을 영면, 즉 영원한 잠으로 부르는 언어 습관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을 잠으로 전환시키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다. 날개가 펼쳐져 있지 않았다면 금방 물 속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므로 날개를 펼친 채 물에 떠있는 나비가 “날개로 잠을 잤다”는 것도 금방 수긍이 간다. 이는 아주 작은 변화 같지만 나는 이 변화가 별들이 높이를 버리고 무릎 높이의 물로 내려올 수 있었던 동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변화는 말하자면 시의 인력을 형성하면서 하늘의 별을 물속으로 불러온다. 이렇게 하여 별들이 내려오면 물은 밤하늘이 된다. 그러면 나비의 잠이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로 채워지게 된다.
어찌보면 시란 그런 것이다. 물에 떠 있는 죽은 나비에게서 죽음이란 언어를 걷어내고 나비를 물위에 잠으로 눕히는 것이며, 그 힘으로 하늘의 별을 물속으로 불러 별빛이 무릎까지 차는 세상을 만들고, 나비의 잠을 그런 세상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아마도 나비의 잠은 평온하게 빛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세상의 안타까운 모든 죽음들이 나비처럼 별빛으로 가득차는 잠에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시가 세상을 재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미는 듯한 경우이다. 장이지의 시에서 예를 구해본다. 시인은 “아이에게 줄 분유를 오거리 마트에 가서 훔”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얘기를 들려준다. 여자에겐 같이 사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공장을 다니다 때려치웠으며, 몇 번 장사를 하다 들어먹었다.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자리를 펴고 너저분한 물건들을”파는 노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아이의 분유값을 벌 수가 없었는가 보다.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분유를 훔친다.

오거리 마트에 가서 남자는 분유를 훔쳤다. 분유를 들고 오자 여자는 불안했다. 같은 상표였다. 밤새 뜬눈으로 여자는 마음의 시궁창을 더듬었다. 여자는 손목을 그었다. 용케 가난을 졸업했다.
—장이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 부분

손목을 그은 여자는 죽었다. 시인이 전하는 얘기에선 어디에서도 은유나 상징은 없어보인다. 문제는 시인이 그 죽음을 가리켜 “용케 가난을 졸업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형심에게서 나비의 죽음이 잠으로 바뀌었을 때와 달리 우리는 가난의 졸업이 된 이 죽음을 곧바로 수긍하지 못한다. 사전의 뜻풀이를 빌면 ‘용케’는 “매우 기특하고 장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난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죽음을 정리하기에는 이 말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언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질 못한다.
때로 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현실 자체를 상징화한다. 그렇게 되면 시가 상징화한 현실은 시의 언어가 가리키는 표면적 방향에선 보이질 않는다. 그 현실은 우리들이 시의 표면적 언어를 넘어가야 보인다. 가령 이 시에선 여자의 죽음에 대해 “용케 가난을 졸업했다”는 말 이외에 다른 언급이 전혀 없지만 우리는 그 언급을 넘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죽음이 아니고선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란 사실을 만난다. 삶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떠넘기고 함께 짊어져야할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사회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 시의 언어는 역설의 언어가 된다. 언어가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이거나 아니면 다른 곳을 보아야 시가 말하려고 하는 곳이 보일 때가 있다.
때로 어떤 말은 특정한 지리적 공간에 묶여 있다. 가령 ‘씨클로’라는 말은 우리들을 베트남으로 데려간다. 씨클로가 베트남에서 접할 수 있는 자전거 택시이기 때문이다. 최형심의 시에서 그 씨클로를 만나본다.

씨클로가 소로를 따라 달리고 있다. 발톱처럼 깎이는 새들과 빈 옷걸이에 걸린 내 발은 아직 푸른빛이 아니에요.
—최형심, 「세 개의 발을 듣는 저녁」 부분

시의 제목에서 접하는 “세 개의 발”이라는 말은 씨클로가 갖추고 있는 세 개의 바퀴일 것이다. 그러면 왜 바퀴라고 하지 않고 발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씨클로의 바퀴에서 바퀴보다 발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세 바퀴 자전거라고 하지 않고 세발 자전거라고 하지 않는가. 바퀴가 자동차의 것이라면 씨클로는 기계적 동력보다 사람의 힘에 의존한다는 측면에서 발에 가까워 보였을 것이다. 그 바퀴가 내는 소리가 시인에겐 깊이 각인되었는가 보다. 제목이 「세 개의 발을 듣는 저녁」이 된 연유일 것이다. 시인은 씨클로를 타고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발이 보여주는 세상을 들었다. 인용한 부분은 그 세상의 첫 부분이다. “발톱처럼 깎이는 새들”이라고 했으니 씨클로가 가는 소로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발의 아래쪽에서 새들이 날아올라 마치 발톱이 깎이는 듯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시인이 씨클로를 타고 있었다는 실감이 난다. “빈 옷걸이에 걸린 내 발”은 발판에 올려놓은 자신의 발에서 받은 인상으로 읽었으며 ‘푸른빛’은 저녁빛이라고 생각했다. 씨클로는 아직 저녁이 아닌 시간에 저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이국의 저녁을 맛보게 된다.
장이지는 반대의 경우를 보여준다. 분명 다른 나라의 얘기인데 그 얘기가 시인에게로 건너와 주저 앉는다.

나는 왜 왔나.
어쩌다 우리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나
어쩌자고 객지에서 이렇게 적막한가.
이러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장이지, 「모모타로桃太郎」 부분

내가 다른 나라 얘기라고 한 것은 시의 제목인 「모모타로」 때문이다. 모모타로는 일본의 설화에 나오는 아이의 이름이다. 설화는 강에서 빨래를 하던 할머니가 떠내려오는 커다란 복숭아를 건졌고, 그 복숭아 속에서 아기가 나왔다고 전한다. 그 아이의 이름이 모모타로이다. 설화 속에선 개와 원숭이, 꿩이 나오며, 아이는 세상의 나쁜 놈을 징벌하고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게 된다.
시에는 전해지는 설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설화 속 개와 원숭이, 꿩은 시 속에선 “세 마리의 개”로 바뀌어 있다. 시집 뒤쪽에 링크(LINK)라는 이름으로 붙여 놓은 짧은 설명에서 시인은 “길동무로 등장하는 ‘세 마리의 개’는 모두 우리 집 개들”이라고 알려준다. 설화는 모모타로가 세상의 나쁜 놈을 징벌하고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마무리하지만 시의 마무리는 이와 달리 객지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시인의 처지를 돌아보며 씁쓰레하고 있는 시인의 심정으로 읽힌다. 시는 우리들을 일본의 설화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설화가 시인의 삶으로 건너와 주저 앉은 느낌을 준다. 시는 때로는 우리를 이국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이국의 얘기를 우리에게로 가져와 우리 곁에 주저 앉힌다.
언어를 통한 세상의 재편에는 언어의 변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변화의 폭이 크면 시가 어려워진다. 언어의 조합이 낯선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 낯섬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언어로 재편되기 전의 현실을 짐작해 보는 것이다. 최형심의 시에서 그런 방식의 시읽기에 대한 예를 구해본다.

침묵이어서 거침없는 필체가 뜰로 번집니다.
—최형심, 「자청비」 부분

“거침없는 필체”와 ‘뜰’은 낯익은 조합이 아니다. 때문에 이 구절의 언어는 쉽게 수긍이 되질 못한다. 일종의 거리감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이 거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거침없는 필체”를 뜰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로 보았다. ‘침묵’이란 말로 미루어 마침 시끄럽지 않고 조용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뜰은 조용했고 그림자가 짙게 번져 있었다를 이 구절의 현실로 본 것이다. 때로 시의 구절이 난해하여 언어가 우리로부터 멀어보일 때가 있으나 실제로는 보기보다 가까울 수 있다. 하나 더 살펴본다.

늦봄이 깔려 죽은 산 아래가 긴 혀를 불쑥 내밀면 거미가 빈틈마다 뼈를 만든다.
—최형심, 「얀 브뤼겔 씨의 나비관」 부분

“늦봄이 깔려 죽은 산 아래”를 나는 꽃들이 떨어져 바닥에 깔려 있는 늦봄의 산 아래쪽으로 읽었다. 봄이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이다. 불쑥 내미는 긴 혀는 산 아래쪽에서 완연하게 흐르기 시작한 계곡의 물줄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 또한 우리에게서 멀지 않다. 빈틈마다 만들어놓은 거미의 뼈는 빈 자리마다 거의 빠짐없이 쳐져 있는 거미줄을 생각했다. 거미와 거미줄의 조합은 낯이 익지만 거미와 뼈의 조합은 낯설다. 도대체 왜 거미줄이 뼈와 조합된 것일까. 거미줄은 거미의 집이다. 집은 기둥으로 세워진다. 기둥은 줄보다는 뼈에 가깝다. 그런데 거미는 제 몸에서 뽑아내 거미줄을 친다. 몸에서 뽑아냈으니 그것은 줄보다 뼈에 가깝다. 나는 그런 생각의 계단을 타고 거미의 뼈에 이르렀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게 생각의 계단을 밟아 언어적 거리감을 완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거리감을 완화시키는 것을 시를 읽는 재미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장이지의 시에선 조금 다른 양상을 접할 수 있다. 언어적 변화를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여 벌어진 간극에 재미가 채워지는 경우이다. 가령 어느 집에나 냉장고가 있다. 냉장고는 음식을 썩지 않고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존해주는 기능을 한다. 냉장고 속에는 마실 것과 먹을 것들이 가득 들어있다. 이것이 아마도 일상 언어의 지배아래서 냉장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일 것이다. 아무 재미가 없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상을 냉장고가 말을 건네는 세상으로 바꾸며, 그러면 세상이 재미있어 진다.

부엌이 휑뎅그렁해서 식탁에 앉았더니, 냉장고의 말이 들렸다.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 세계로…….’ ‘DRINK ME…….’‘EAT ME…….’
—장이지, 「누드 냉장고」 부분

냉장고가 무엇인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모두가 설명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이 재미난 경우는 없다. 장이지는 우리 곁의 그 무료한 일상에 재미를 더해준다. 궁금증도 생긴다. 왜 하필 영어로 말을 건넸을까 하는 점이 그렇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수입품이 많이 들어오는 시대이다. 영어로 말을 건넬만하다. 시인의 세상 재편에는 시대도 반영이 된다.
살다보면 가끔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이 한적한 곳을 고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장이지의 언어는 양상이 다른 대처를 보여준다. 그것은 세상에 울음상점을 차려놓고 그곳을 방문하는 것이다.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 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 ‘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咸池’니 하는 울음들의 이름들을 가르쳐주겠지.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 부분

나는 이를 슬퍼서 울음을 참을 수 없을 때는 안국동쯤으로 나가 거리에서 울고 싶었다의 변형으로 읽었다. 울음을 파는 상점은 있을 수 없지만 울고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는 없는 세상을 말하면서도 우리에게 가깝다.
현실의 세계에선 고양이는 고양이고 우리는 우리지만 시는 고양이를 말하면서 우리를 보게 한다. 담장 위를 날렵하게 달려가는 고양이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뛰어난 동물적 본능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타고 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관점은 다르다.

담장 위를 들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갔다.

저것이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발이 위기의식으로 벼려져 온 탓이다.
—장이지, 「담장 위의 소풍」 부분

고양이의 타고난 본능이 장이지에겐 위기의식의 소산이다. 위기의식은 불안을 부른다. 불안은 우리를 불안에 묶어둔다. 고양이는 담장 위를 불안없이 날렵하게 걷지만 알고 보면 그 날렵한 걸음은 위기의식이 가져온 불안 때문에 생긴 것이다. 불안은 담장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에 온신경을 집중하게 만든다. 고양이는 날렵하지만 불안 때문에 날렵한 걸음걸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도 그렇다. 뒤쳐지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는데만 매달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고양이를 그 위기의식에 묶어두지 않는다. 시인이 고양이가 담장을 달려가는 것은 “담장이 끝나면 무엇이 버티고 있을까”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담장 위의 고양이는 우리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빠르게 달려가기만 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던 우리가 가야할 곳을 찾을 가능성이 고양이에게서 보이기 때문이다. 시는 고양이를 말하면서 우리의 길을 연다.
시인은 우리의 미래를 고양이를 빌지 않고 상징을 통해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고요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얼굴을 지우고, 등줄기를 헐고, 발바닥을 떼어냈다. 이윽고 그가 사라졌을 때, 짙은 그림자 하나가 일어나 덩치 큰 고요를 짊어지고 갔다.
—최형심, 「고요가 된 남자」 전문

고요 안으로 들어갔으니 남자는 말이 없어졌을 것이다. 떠들면서 고요 안으로 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요해지자 남자의 얼굴이 지워졌다. 이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등줄기도 허물어졌다. 그렇다면 남자는 남자로서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발바닥을 떼어냈다. 발바닥이 없으니 어디로도 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면 남자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일까.
시인은 그때 남자의 그림자가 일어나 고요가 된 남자를 짊어지고 갔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갈 것이라는 미래형으로 읽었다. 입을 닥치고 남자라는 정체성을 지운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면 그림자로 살면서 남자와 유리되었던 그림자가 남자 자체가 된다. 우리는 그림자처럼 산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말은 내가 나를 잃고 살며, 그 잃은 내가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경우라면 나를 지우고 그림자를 일으켜 세워야 제 자신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남자가 고요 속으로 들어가 지워지면 그때부터 그의 그림자가 일어나 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시는 그림자를 말하지만 우리의 길을 연다.

3
언어는 단순히 표현에 그치지 않고 인식의 틀을 형성한다. 인식의 틀은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우리의 머리 맡에선 여전히 태양이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사실은 태양이 한 자리를 지키며 멈춰서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과학이라 부르는 인식이 세상을 바꾼 좋은 예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하여 시인마다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최형심은 “여름이 가자 나의 빈 껍질 속으로 크고 작은 문장들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보리멸의 여름」)”고 말한다. 시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비워 언어의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세상을 보는 것. 최형심과 장이지의 시에서 잠시 빈자리에 구축되는 또다른 세상을 보았다. 언어로 재편된 세상이었다.
(『시와사상』, 2020년 겨울호,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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