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부화된 새로운 세상 —김나영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김나영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1
시란 무엇인가? 때로 시인의 시가 그에 대한 답이 되어줄 때가 있다. 김나영의 세 번째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에서도 그러한 시를 만날 수 있다. 시는 “계란이 부화하면 닭밖에 안 된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우리의 일반적 인식 속에서 계란은 부화하면 닭이 된다. 부화로 맺어지는 그 둘의 인과관계가 시인에게선 계란의 가능성에 대한 제한이 되고 있다. “닭밖에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가능성이 계란에 있다는 말인가.
시는 그 가능성의 예를 말해주고 있다. 매개가 되는 것은 언어이다. 시인은 “프라이팬 밖에서 계란은 깬다 깨진다 터뜨린다 등의 서술어와 만나서 닭 아닌 그 무엇이 된다”고 말한다. 수긍할 수 있다. 김나영에게선 계란이 계란을 고집하지 않고 계란을 버릴 때 무수한 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계란은 계란을 버리고 이름을 버리고 껍질도 벗어버리고

계란은 쥔다 던진다 겨냥한다 등의 결의와 목적과 의기투합할 때 날개가 돋는다 하늘을 난다 프라이팬보다 더 뜨거운 광장의 불타는 주먹이 된다 고소한 주먹이 된다 자동차 건물 검은 머리 철면피 양복 넥타이를 타고 비릿하게 흘러내릴 때쯤 들끓던 공분(公憤)이 숨을 고른다
—「이것은 계란이 아니다」 부분

시인은 계란의 부화를 생물학적 차원에 묶어두지 않고 언어적 차원으로 옮긴다. 그러자 우리들이 붙여먹던 계란 프라이가 계란의 또다른 부화가 되고, 어느 철면피를 향하여 던지던 계란 또한 공분으로 부화하여 또다른 세상을 연다. 계란은 더 이상 깨지지도 않는다. 다만 껍질을 벗어던질 뿐이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시란 언어를 매개로 계란을 수없이 다른 모습으로 부화시키는 일이 아닐까. 시인이란 그들의 체온으로(아마도 언어의 부화에 필요한 그 체온은 시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세상을 품어 다른 모습으로 부화시키는 사람들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김나영의 시는 그가 부화시킨 세상이다. 그 세상은 계란이 닭밖에 되지 않던 생물학적 세상의 한계를 넘어 새롭게 열린다. 그의 시를 살펴본다는 것은 그 새로운 세상을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그 세상으로 걸음해본다.

2
아주 평범한 풍경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는 풍경이다. 흔하고 익숙한 풍경이다. 무슨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풍경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변화가 없다는 측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은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굳어 있다. 이 굳어있음은 이중적이다. 풍경 자체도 큰 변화가 없지만 풍경을 전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렇질 않다. 김나영의 시에선 이 무료하고 반복적인 풍경을 두고 끊임없는 변화가 이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떨어진다 춤을 추며 떨어진다 발가락을 꼿꼿이 세우고 떨어진다 알록달록 떨어진다 한 잎 두 잎 피날레를 날리며 떨어진다 허공을 무대로 사용하며 떨어진다 가장 화려할 때 떨어진다 흔적을 남겨놓고 떨어진다 바닥을 환하게 일으켜 세우며 떨어진다 최선을 다해서 떨어진다 추락의 자세가 저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사람들 눈길을 싹싹 발라내며 떨어진다
—「떨어진다」 부분

“떨어진다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진다”고 했으니 나뭇잎이 그냥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리듬을 타고 떨어지고 있다. 떨어진다는 반복된 언어가 그 리듬을 만들어낸다.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고 있으니 아울러 나뭇잎은 때를 맞춘 절묘함과 함께 떨어진다. “알록달록 떨어진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가을이었던가 보다. 잎은 떨어지면서 계절을 알린다. “허공을 무대로 사용하며 떨어”지고 있으니 떨어지는 잎들은 공연에 방불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공연이 어떤 공연인지는 먼저 내민 ‘춤’이라는 말이 알려주고 있다. 잎이 떨어진 바닥은 환하다. 잎의 색으로 바닥이 덮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색으로 인하여 마치 바닥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마저 불러온다.
나는 잠시 혼란에 처한다. 혹시 잎은 잎이면서 동시에 언어인 것은 아닐까. 잎은 언어일 때 잎이라는 언어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언어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떨어진 잎들이 쌓여있을 나무밑을 살펴보면 혹시 잎이 아니라 언어가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고착된 일상의 언어를 뒤흔들어 새롭게 열어놓은 세상을 체험하는 일이다. 그 세상에선 나뭇잎이 언어의 반복을 따라 리듬을 타고 춤을 춘다. 그 세상에 일상의 지루함은 없다.
일상의 세상에선 언어와 함께 세상에 대한 인식들도 고착화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잡초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잡초는 흔히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예찬과 함께 우리의 입을 오르내린다. 잡초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시각은 너무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고 지속되었다.
김나영이 전하는 잡초의 세상은 좀 다르다. 시인은 “지난여름 기습적 폭우가 한강 산책로를 짓밟고 지나”간 뒤 “낭창낭창한 꽃대를 자랑하던 꽃길이 곤죽이 되”고 “구청 관리들이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매복하고 있던 야생이 먼저 숟가락을 꽂”는 것으로 그곳을 점령했다고 전하면서 잡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의 잡초는 끈질긴 생명력이 아니라 불량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고 그 모습의 뒤로 치밀한 조직을 숨기고 있다.

강아지풀, 돌피, 개밀, 가는털비름, 털빕새귀리가
‘인디언 사회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다’는 전언 앞세우고
낡음 낡음한 멜빵바지에 손가락 삐딱하니 찔러 넣고서
동네 건달처럼 짝다리를 짚고서 건들건들 헝글헝글
그 행색이 하나같이 시시하고 껄렁껄렁해 보이지만
트릭이다, 저들은 야생당(野生黨)이 키우는 비밀병기다
봐라, 강아지풀 외엔 암호 같지 않은가, 저 이름들
화가 폭발하면 아스팔트도 씹어 먹는 녹색 괴물들이다
조명발 한번 받아본 적 없지만 저 분야의 베테랑들이다
끝났다 싶을 때 Coming Soon을 외치고 다시 돌아오는
어디에 던져놔도 누대를 거둬 먹이는 튼실한 흙수저들이다
—「내 이름은 파랗게 일렁이는 발목」 부분

잡초의 세상이 이렇게 열렸을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재미이다. 시 속의 잡초는 “껄렁껄렁해 보이”는 모습으로 불량기를 흘리지만 그 불량기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뒤에 ‘야생당’의 조직이 있다는 얘기도 우리에겐 또다른 재미가 된다. 시는 매번 잡초만 보면 끈질긴 생명력만 말하던 하품나던 세상을 좀더 재미나게 바꾸어 놓는다.
잡초에 이어 이번에는 “테니스장 담장 틈”에 “잉여처럼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거의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꽃이 흔하고 흔하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에 피어 있어 “환호작약”과는 인연이 먼 것이 그 꽃의 삶이다. 그 때문에 꽃이 “핀 줄도 모르고 피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시인이 그 꽃을 시의 세상으로 데려온다.

수백 근의 적막을 머리에 이고
별들의 기울기에 눈빛을 맞추려고
온몸 혹독하게 뒤척였겠다
테니스공에서 튕겨져 나온 햇살을 젖을 빨듯 끌어당겼겠다
비바람과 천둥이 건달처럼 다녀갔겠다
화려함과 향기가 부실해도
사람들 눈길이 닿거나 말거나
누가 이름을 불러주거나 말거나
제가 주인인 줄도 모르는 꽃이
최선을 다해 피어 있다
—「길 가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 부분

꽃이 “머리에 이고” 있는 “수백 근의 적막”은 하늘일 것이다. 지상에 사는 모든 식물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하늘로부터 배제되는 식물은 없다. 하늘만이 아니다. 별빛과 햇살, 비바람과 천둥이 그 꽃과 함께 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연의 그 어느 것도 구석진 곳에 피었다고 꽃을 외면하진 않는다. 시의 세상에선 외진 곳에 핀 꽃도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며 “최선을 다해” 그 자리에 핀다. 꽃은 “제가 주인인 줄도 모르”고 피어 있지만 그 꽃의 주인이 꽃 자신이란 사실을 시인은 알아보며, 그때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 그 자신인 세상이 열린다. 그것이 시의 세상이다.
시인은 꽃이 감당했던 하늘과 별빛, 햇살을 알아보는 한편으로 그 꽃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흔하게 있다는 것을 안다. 시의 마지막엔 아파트로 들어서는 장사 트럭이 자리하고 있다. “목울대 힘껏 뽑아 올리고/아파트로 진입하는 확성기 소리”가 그 장사 트럭이 왔음을 알려준다. 그 트럭의 자리엔 시인이 지금까지 말한 이름없는 꽃이 중첩된다. 하늘과 별빛, 햇살, 비바람과 천둥을 감당하며 살아온 꽃의 세상이 비슷한 위치의 트럭 장사로 확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의 세상에선 외진 곳에 핀 꽃과 가끔 아파트를 찾아와 무엇인가를 팔고 가는 트럭 장사가 모두 제 삶의 주인이 된다.
이번에 조금 더 널리 알려진 과일 얘기로 옮겨가 보기로 한다. 그 과일은 무화과이다. 대개 무화과는 사람들 사이에서 꽃이 없는 과일로 알려져 있다. 김나영은 그 사실이 놀랍다. 시인은 그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꽃 피는 시절을 건너뛰고 과일에 도착할 수 있다니
—「무화과」 부분

대개의 사람들에게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지만 시인은 그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무화과를 “꽃 피는 시절을 건너뛰고 과일에 도착할 수 있”는 과일로 변환한다. 이는 단순한 변환이 아니다. 이 변환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개 모든 과일은 꽃피는 시절을 거쳐 과일이 되며, 꽃은 그 꽃에서 영글 과일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가령 감꽃이 피면 감이 열리고, 배꽃이 피면 배가 열린다. 그러나 무화과는 과일을 짐작하게 해줄 수 있는 꽃이 없다.
사람은 꽃이 있는 과일보다 꽃이 없는 무화과에 가깝다. 성으로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짐작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인은 그런 경우를 “뒤엉켜버린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바지 안에서 여자가 돋아”나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치마 안에서 남자가 돋아”나는 경우이다. 무화과는 그런 면에서 “밖으로 한 번도 발설하지 못했던 꽃”을 갖고 있는 독특한 과일이다.
무화과를 과일로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무화과가 과일이라면 소수의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모두 사람이다. 사람들의 세상에선 성소수자가 차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자주 벌어지지만 시 속의 무화과 세상에선 그들도 모두 다를 것 하나 없는 똑같은 사람이 된다. 혹시라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무화과는 과일이 아니라는 얼토당토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에는 이름은 있으나 너무 흔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꽃으로 넘어가본다. 민들레가 그런 꽃 중의 하나이다. 시인은 그 민들레를 “톱니처럼 생긴 꽃”이라고 말한다. 민들레는 여러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시인에겐 톱니처럼 생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꽃이 그런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자 꽃은 톱니처럼 맞물린다. “민들레가 맞물려서피어나고맞물려서피어난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민들레에 대한 시각은 그 다음 인식을 제어한다. 시각과 인식의 전후 관계는 그 순서의 우선 순위를 정확히 가리기는 어렵다. 맞물린 모습이 먼저 보이고 그 모습에서 톱니가 보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또 민들레를 가리켜 “꽃이 꽃을 길어올린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지면 가까이 붙어있다가 꽃대를 길게 빼면서 날아갈 준비를 하는 민들레의 속성에 주목한 결과로 보인다. 민들레의 왕성한 번식력은 “아무 곳 아무 데로 전투적으로 번 져 간 다 번 져 간 다”는 말 속에 요약되어 있다. 이러한 민들레의 번식력에 인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진다. 인간과의 비교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번식력에서 민들레 못지 않은 인간은 그 번식력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킨다. 그런데 민들레는 그렇질 않다. 민들레는 그 왕성한 번식력에도 불구하고 “대기에 미세먼지 하나 남기지 않”으며 “석유 한 방울 사용하지 않”는다. 번식력을 말하면서 시인은 민들레를 인간과 구별한다. 인간이 이 지구를 점령하다시피 번식한 뒤끝에선 온갖 전쟁과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나 민들레는 그 전쟁의 상처를 봉합한다.

인조석과 활주로를 가볍게 넘는다 총 칼 없이 미사일 없이 드론 없이 국경과 바다를 건너

방글라데시 로힝야족 난민들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발아를 기다린다 시리아 홈스 주택가 주인 잃은 신발 안에도 뿌리를 내리고 상처 난 대지를 꽃으로 봉합한다
—「원정」 부분

민들레가 인간이 남긴 전쟁의 상처를 봉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들레를 상처를 봉합하는 “비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이 시인이 할 수 있는 평화의 걸음일 것이다. 시인이 여는 시의 세상에선 민들레에 대한 부분적 시각이 인간과의 비교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고 그런 확대된 인식이 평화의 걸음이 된다. 그러면 민들레가 퍼져갈 때 세상의 평화도 기대할 수 있는 괜찮은 세상이 온다.

3
김나영이 시를 통해 여는 새로운 세상을 주로 자연을 통해 살펴보았다. 자연이 잠언을 발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많은 시간을 인간과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김나영의 시에서도 때문에 인간과의 관계를 다룬 시들이 자주 눈에 띈다.
노숙인에 대한 두 편의 시를 먼저 살펴본다. 우리에게 노숙인은 집에서 쫓겨나거나 집을 나와, 혹은 집이 없어 거리에서 살게 된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이 “쇠할 대로 쇠한 그의 남루한 행색을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한 노숙인을 말할 때 우리는 또다른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이라는 처소에 세 들어 살다가 서서히 망가져가는 그 모습이 귀환의 신호인지 소멸의 자세인지 알 수 없지만
—「시베리아 숲에서 온 사람」 부분

시인은 노숙인이 “사람이라는 처소에 세 들어 살다가 서서히 망가져”버린 사람이란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일종의 집이 된다. 허물어진 집에는 사람이 거처할 수 없다. 노숙인의 몸은 허물어진 집과 같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두 가지의 집에 산다. 하나는 몸이 기거하는 주거지로서의 집이며, 아울러 몸 자체 또한 집이다. 그 둘 모두에게 쫓겨났을 때 우리는 노숙인이 된다. 몸은 우리의 것 같지만 우리는 몸에서도 쫓겨날 수 있다.
또다른 노숙인을 만나본다. “<24시 편의점> 붙박이 탁자 구석에서”에서 “복권을 긁”고 있는 “한 노숙자”가 그이다. 시인은 그 노숙자의 꿈을 “포르말린 같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방부제가 된 희망이니 오래 전에 썩어 사라졌을 희망을 방부제를 통해 지탱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 희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기적에 가깝다. 그런데 사실 그의 세상에선 기적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놀라운 일을 시인은 이렇게 전한다.

머릿니가 득시글득시글 댈 것 같은 그의 머리와 거무튀튀한 손가락 위로 수 천키로의 허공을 통과한 햇빛이 쏟아진다 창밖에는 노오란 국물 같은 산수유가 팡팡 터지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계절」 부분

놀라운 일이란 편의점 바깥에 가득한 햇살과 만개한 산수유꽃이다. 말하자면 노숙인의 바로 눈앞에 눈부신 봄이 와 있다.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들이다. 노숙자가 복권을 통해 복권하고 싶은 삶이 있다고 해도 그 삶이 그보다 더 눈부실 수 있을까. 실상 세상에는 기적같은 일이 일상의 이름으로 벌어진다. 그렇지만 복권에 대한 희망은 세상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시는 기적을 바라며 복권을 긁는 사람의 옆에서 매년, 그것도 바로 우리의 곁에서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는 기적같은 봄을 전한다.
보통 우리는 아는 사람이 많아 인간 관계가 넓은 경우,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김나영의 시속에선 험담을 해도 아는 사람들이 험담을 한다. 하긴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험담을 하겠는가.

어떤 허물이 실 뭉치처럼 함부로 부풀 때까지 지척에서 신물 나게 맛보고 즐기고 뜯더군 팔천구백칠십이만 칠천칠백이십팔 개의 내 털이 오싹해지도록 그가 돌아오는 순간 재빨리 바꿔치기하는 미소란, 내 매끄러운 허리도 저보다 유연하지는 못하지 안 그런 척 입을 씻고 돌아가며 화장실을 가고 너덜너덜한 귀를 1/N씩 나눠 갖더군
—「아는 사람」 부분

우리는 궁금해진다. 아는 사람이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은 어떨까. 모르는 사람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 그렇질 않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시인은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서정과 서사가 끼어들지 않아서 깔끔하지
서로 표정을 갈아 끼우지 않아도
평생을 함께 하지 반복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권리를 위하여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서로 헐렁헐렁한 고무줄 바지가 되지
어떤 좌석에 앉아서 굵고 짧은 잠에 빠져들 때
입을 벌리고 자도 보자마자 잊히니까
평화롭지 정면이나 측면이나 측백나무처럼
한결같지 동일하게 지루해도 숨통이 트이지
—「모르는 사람」 부분

모르는 사람과는 정을 나눌 일도, 이야기를 나눌 일도 없다. 모든 일은 관계를 맺고 아는 사람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된다. 모르는 사람과는 그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과는 관계가 깔끔하다. 모르는 사람과는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나도 뒤끝이 없”다. 세상의 모든 모르는 사람들이 뒤끝없는 관계로 나를 스쳐간다. 시의 세상에선 세상의 모든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된다.
시는 때로 슬픈 죽음을 구해내기도 한다. 시인이 전하는 그 죽음은 이렇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한 소녀가 죽기 하루 전 하얀 시트 위에 초경을 쏟아내고 죽었다
—「극」 부분

시한부 삶을 살다가 초경을 하고 죽었다고 했으니 대개 사람들의 반응은 슬픔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그 삶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스러진 삶이 된다. 하지만 김나영에겐 그렇질 않다. 시인에게 그 삶은 “남미 안데스산맥에 서식하는 칼렌드리라 꽃씨”에 비유된다. 시는 그 꽃씨가 “10년 동안 말라비틀어진 채 사막의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도 비가 한번 내리면 일제히 피어나 사막을 온통 붉은 꽃으로 뒤덮는다”고 알려준다. 또 그 삶은 “셀레니세레우스 선인장의 꽃”에 비유된다. 시인은 그 꽃이 “1년 중 단 하룻밤” 피어나서 아침에 지긴 하지만 “진한 바닐라 향을 분출하며 밤새 생식 활동을 한”다고 알려준다. 우리의 세상에선 어떤 죽음이 꽃도 피우지 못한 삶을 살다 스러지지만 시인의 세상에선 기적처럼 꽃을 피운 삶이 된다.
우리의 인생에선 때로 아주 사소한 일이 삶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열어주기도 한다. 시인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내 사진이 거울 속으로 보”였던 순간이 그런 경우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이미 많은 시간을 흘러온 자신이란 측면에서 시인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는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그런 측면에서 나의 한순간을 잡아놓겠다는 욕망의 결과물이다.

사진을 찍는 것은 표류하는 나에게
닻 하나 내리는 일
미끄러지는 나의 초상을 꼭 붙들어 보겠다는 말
—「차연에게」 부분

이러한 사고는 인생의 다른 부분에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그렇다”고 시인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네가 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을 때도/우리는 미끄러지고 있었을 뿐/우리가 하나 된 적 있었을까”를 묻는다. 사랑의 행위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하나되는 순간이 아니다. 그 순간의 사랑은 “점액질로 미끄덩거리는 미꾸라지”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것을 시인은 언어의 착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말의 굴레에 잠깐 머물러 있었을 뿐/사랑이라는 말의 감촉에 깜박 속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 속에 머물 뿐이다.
사람들은 시인에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상에 사랑은 없다는 말인가라고. 왜 사랑이 없겠는가. 다만 시인은 집착이 된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의 세상에선 그런 반문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여자의 경험이 투사된 시도 있다. 하지라는 절기를 통해 우리는 그 경험의 하나를 만난다. 이때부터 더위가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하지 때부터 계절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김나영에서 그 뜨거움은 몸의 뜨거움으로 전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하지의 뜨거움은 관능적 뜨거움이다. 하지라는 절기가 몸이 관능을 사는 시기가 된다.

비릿한 밤꽃 냄새가 나를 덮쳤다

능소화 진홍빛 입술이 담장을 넘었다

화단의 으아리 꽃들이 쩍쩍 벌어졌다

후텁지근한 흙내가 목덜미를 휘감고 올라왔다

벌과 나비의 날갯짓에 허공이 빨갛게 부풀었다

여자의 치맛단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추가 여물었다
—「하지」 부분

시가 전하는 하지의 이미지는 관능적이다. 관능의 이미지는 위험한 측면이 있다. 그것을 남자가 말하면 여성에게 덧입히는 억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가 말하면 달라진다. 그것은 관능의 즐거움에 대한 능동적 수용이 될 수 있다. 나는 관능이 김나영에게선 능동적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보았다.
화장에서도 여자의 경험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종로3가역 공중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껏 차려입은 노파”를 만난다. 노파는 “내가 올해 여든다섯이”라며 스스로의 나이를 밝힌다. 그 노파가 화장을 한다. 시인은 노파의 화장을 이렇게 말한다.

노파는 분첩을 열어 여자를 불러낸다 검은 머리끄덩이를 사정없이 끌어당긴다 주름 사이에서 볼그레한 화색을 끙끙 길어올린다
—「모란」 부분

화장은 이중적이다. 여자에게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억압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화장은 여자의 즐거움일 수 있다. 김나영에게선 그것이 여자를 불러내는 행위이며, 그 행위가 즐거움일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가 알려준다. 억압의 시대가 가고 여자가 여자를 즐겁게 향유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4
나는 김나영의 시가 언어를 부화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다고 했다. 세상이 언어를 통하여 다시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이다. 시인은 그 언어의 위력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가령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꿈”이나 “여행 가방을 잃어버리는 꿈을 연거푸” 꾸고 “조금 우울해졌을” 때 시인은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운다. 주문은 꿈이 몰고 온 우울과 공포를 몰아내준다. 언어는 위력적이다.

내 우울을 잡아먹고 공포를 잡아먹고 나는 곧 아무렇지가 않아진다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하루하루가 아무렇지가 않아진다 꿈은 꿈이야 꿈쯤이야 이를 꽉 물면 너끈하게 잊어버릴 수 있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정말로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은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를 위한 시퀀스」 부분

그렇다고 시인이 문학을 맹신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언어를 부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열면서도 동시에 문학의 한계에 대해 선을 그어놓고 있다. 문학은 배고픈 자의 허기를 채워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무기력하다. 하지만 인간은 묘한 존재이다. 어떤 기름진 것으로 배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갖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먹을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그 어떤 기름진 소출(所出)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남으니까
—「문학」 부분

김나영에게 문학의 자리는 그 허기가 남는 곳에서 비로소 보장된다. 구체적으로 그에게 있어선 시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시의 언어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 세상에 대한 동력을 시에 대한 시인의 열정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인의 전언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냥 가만히 방에 숨죽이고 있는 일 그러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철삿줄 같은 개념이 연기처럼 실실 빠져 나가지 개념을 연기(演技) 하지 않아도 돼 그냥 즐기면 돼
—「환한 방」 부분

나는 이를 시인이 새로운 세상을 열 때의 태도로 받아들였다. 뜻밖에도 시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구속되지 않을 때일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시인이 언어를 품고 부화를 기다릴 때 시인이 갖고 있는 비밀 같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도 깊은 내막은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세상을 새롭게 여는 일은 시인이 해야할 일이다. 시를 읽을 때, 우리들이 새로운 세상의 향유를 위하여 해야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 시인의 방에 놀러가면 된다. 물론 시가 시인의 방일 것이다. 시인이 말한다.

나는 이 방이 좋아 내 방에 놀러 올래?
—「환한 방」 부분

시인의 시집을 펼치고 시를 읽는 것으로 누구나 그 방에 놀러갈 수 있다.
(김나영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천년의 시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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