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은 2022년 7월 23일 토요일, 먼 길을 다녀왔다. 거제였다. 그곳에선 대우조선의 하청 노동자들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를 세상 모두에게 물으며 회사측을 대상으로 파업을 벌였다. 협상은 타결되었다. 이날은 뭉쳐 싸웠던 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한 금속노조가 대우조선 옥포조선소 서문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련한 날이었고 이소선합창단은 노래로 이 대회에 함께 했다. 이소선합창단만 거제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전국에서 희망버스의 이름으로 하청 노동자들과 마음을 나누려고 많은 사람들이 거제로 모여든 날이기도 했다.
합창단이 서울을 출발한 것은 오전 7시반이었다. 방향을 가늠하며 운전대를 잡은 손과 엑셀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올린 발의 노동이 우리를 거제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들이 타고 간 버스를 운전하신 분이 5시간반의 시간에 걸쳐 제공한 노동이었다. 올라오는 길에도 그의 노동은 반복되었다. 합창단은 산청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합창단의 점심은 식당 노동자가 감당해 주었다. 30명에 가까운 인원의 점심을 모두 감당한 노동이었다. 오고가는 동안 합창단은 세상의 노동에 감사했다.
거제에선 유최안 노동자가 스스로를 쇠창살에 가두고 파업을 벌였다고 했다. 윤석열은 이 파업에 불법행위의 꼬리표를 붙이고 강경 진압을 협박했었다. 그가 온갖 왜곡된 언어로 가득찬 자본가의 사전을 들춰 그속에서 언어를 골라낸 탓이다. 그러나 세상을 볼 때 자본가의 사전이 아니라 노동자의 사전에서 언어를 골라내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그렇다. 그가 이 파업의 현장에 있었다면 그의 저서 『프롤레타리아의 밤』에 새겨놓았던 말, 바로 “삶을 잃어버리는 이 노동을 하루하루 구걸해야만 한다는 부조리를 더 이상 견디지 않겠노라”는 선언이 이들 노동자의 파업을 말하기 위해 예비된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동자의 사전에서 언어를 고르면 유최안이 스스로를 가둔 쇠창살은 일하면 일할수록 일에 갇히는 이땅 노동자의 부조리한 삶이 된다. 따라서 어떻게든 그 속의 사람을 꺼내는 것이 이 세상이 해야할 일이 된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곧 해방의 다른 이름이다. 해방은 인간의 인간 선언이다. 예를 들자면 해방이란 연세대 청소노동자의 외침을 수업을 방해하는 소음이라면서 고소를 한 학생과의 싸움과 같은 것이다. 랑시에르는 청소노동자의 시위가 소음으로 들리는 것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인간으로 보면 청소노동자들이 시위를 할 때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시위는 단순히 임금을 올려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 또한 말을 가진 인간이므로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인간 선언이다. 랑시에르에겐 그것이 해방이고 민주주의이다.
거제의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도 인간 선언이다. “이렇게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의 앞에는 인간으로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때문에 그 물음은 곧 인간 해방의 선언이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것 같지만 그들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보자면 인간 해방을 위한 싸움이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거제의 집회 장소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아준 것은 바람이었다. 깃발을 펄럭이며 바람은 말한다. “대우조선이 해결하라”고. 자본은 노동자의 땀으로 벌어들인 돈을 털어가면서 노동자에 대한 책임은 방기하려 든다. 그 무책임이 하청을 만들고, 하청에 또 하청을 낳는다. 대우조선은 원청이고 원청의 대주주는 산업은행이다. 바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바람이 깃발을 펼쳐드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외면하고 있을 뿐. 무책임한 자들이다.
집회 장소인 옥포조선소 서문앞의 다리 난간에는 하얀 글자가 새겨진 빨간 리본이 무수하게 걸려 있었다. 리본은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앞에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좋게 말할 때.
싸움을 벌인 하청 노동자들이 총파업의 세 글자가 선명한 깃발을 앞세우고 집회 장소로 들어왔을 때, 내가 받는 느낌을 언어로 요약하면 야생의 노조가 될 것 같다. 노조도 자본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상태 그대로의 노조였다. 나는 윤석열이 강경하게 나온 것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노동자들은 눈빛이 살아 있었고 보는 사람의 본능마저 자극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만 가질 수 있는 놀라운 생명감이었다. 심지어 맹수마저도 길들여지면 생명감을 잃는다. 그런데 여기 거제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노조가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이들 노동자들에게서 자본의 탐욕, 그 목덜미를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을 공포를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합창단은 모두 두 곡의 노래를 불렀다. 첫 곡은 <해방을 향한 진군>이었고, 다른 한 곡은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였다. 보통 두 곡은 연대의 노래였으나 이날은 인간 해방을 위해 자본과 싸워준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감사의 노래였다. 해방은 또다른 해방을 부른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작더라도 희망이 되겠다고 내려간 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왔다. 안개가 잔뜩낀 이른 아침에 시작된 길은 저녁에 서울로 돌아왔을 때 비가 세상을 적시는 늦은 밤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 밤도 이제 어둡지 않았다. 우리들에겐 주고 받으면서 부푼 우리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혐오와 차별, 굴종없이 모두가 해방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2 thoughts on “야생의 노조에게 바친 두 곡의 노래 – 이소선합창단의 거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노조 결의대회 공연”
눅눅한 여름 공기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기분 좋은 글입니다.
수고 많으셨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먼길이었지만 뭉클한 감동으로 채워진 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