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 가서 파도를 보던 날

올해(2005년) 2월 16일날, 나는 속초를 다녀왔다.
동해에 많은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눈이 내린 풍경을 찍을 목적으로 나선 길이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눈이 왔을 때는
백담사를 지나고 나면 어디나 눈시린 풍경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백담사 들어가는 입구인 용대리쯤에서 내려 마냥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으로만 눈을 실컷 보고 돌아왔다.
그날 속초 바다에선 파도가 무섭게 일고 있었다.
혼자 여행다니면서 그녀의 차가 아쉬웠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그날은 그녀의 차가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눈온 날은 극히 운전을 꺼린다.
올해는 어찌되려나 모르겠다.
딱 한번 체인을 감고 미시령을 넘은 적이 있다.
미시령 꼭대기에서 그녀가 차를 내리자
그곳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뒤로 그녀는 다시는 눈길에 운전을 하려들지 않는다.
그때 나는 미시령을 올라가는 내내 어린애처럼 좋았는데
그녀는 무서웠다고 한다.
올해 그녀가 그 무서움을 털어버렸으면 좋겠다.

Photo by Kim Dong Won

눈이 오면 산의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옷도 그렇다.
때로 옷은 몸의 윤곽을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내곤 한다.
눈은 마치 몸에 착달라붙는 옷과 같아서
눈이 내리면 산은 그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버스가 소양호를 지날 때 차창으로 찍었다.
아마 신남리가 아닐까 싶다.
매년 여기서 빙어 축제가 열리며
얼음이 두꺼워 겨울에는 차가 얼음 위로 강을 건너간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인제이다.)

Photo by Kim Dong Won

산이 제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듯
눈온 날 눈을 뒤집어쓰고 다니면
나도 내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Photo by Kim Dong Won

사실 우리가 사는 집은 굳이 새단장할 필요가 없다.
그저 겨울이 왔을 때 눈이 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날 집은 깨끗하게 새단장을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오늘은 버스의 차창으로 온통 하얀 풍경이 지나간다.
원래 버스는 한계령을 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눈이 길을 막고 있었다.
속초로 가는 길은 오늘 진부령 뿐이다.
버스가 체인을 감고 진부령을 넘어가는 것은 내 생전 처음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버스에서 내려 하염없이 그 순백의 설경을 바라보며 서 있고 싶었다.
그러나 버스는 엉금엉금 거리면서도 끊임없이 길을 간다.
차창으로 나무들이 하얗게 손을 흔든다.

Photo by Kim Dong Won

사실 마음과 달리 그 눈길에 버스를 내렸다고 해도
내 길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차가 다니는 길을 제외하면
세상의 모든 길이 눈에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눈을 파내 겨우 뚫어놓은 버스의 길옆으로
세상의 모든 길이 얼마나 눈 속 깊이 묻혔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드디어 속초에 도착했다.
눈발은 여전했다.
터미널 건너편에서 버스 한대가 머리에 눈을
털모자처럼 뒤집어 쓰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러나 속초의 기온은 따뜻하여
눈은 내리면서 곧바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진부령을 넘어오는 동안 길을 우리의 키높이로 묻어버렸던 눈이
동해에선 타이어의 검은색마저도 다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밧줄 위에도 눈이 내리고, 또 녹는다.
감았다 풀리는 밧줄의 삶처럼
눈도 내리고 녹는다.

Photo by Kim Dong Won

파도가 하얗게 영금정의 바위를 넘는다.
파도의 그 강력한 위세는 멀찌감치 서 있는 내가 갑자기 움찔할 정도였다.

Photo by Kim Dong Won

오늘 파도는 마음먹고 달음박질을 하는 것 같았다.
간만에 불어온 강한 바람을 타고
등대를 뛰어넘기로 내기를 한 것이 틀림없다.

Photo by Kim Dong Won

파도가 높이뛰기를 할 때
바닷가의 철재 난간에선
눈이 난간을 부여잡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이었으나
스스르 힘이 풀리면서 아래쪽으로 손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인연을 붙잡아 주고 싶었지만
때로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달리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삶이란 그런 거다.
그래서 삶은 슬프고도 또 아름답다.

Photo by Kim Dong Won

몇 명의 녀석이 한꺼번에 뛰어오른게 틀림없다.
녀석들의 높이뛰기 놀이에 오늘 등대가 몸살을 앓는다.

Photo by Kim Dong Won

바닷가에선 널어놓은 생선이 눈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밤을 넘기고 있다.
겨울 생선엔 바다 내음뿐만이 아니라
눈의 향취와 겨울밤의 정취가 함께 스민다.
그 모두를 한꺼번에 맛보고 싶다면
겨울 바닷가에 들렀을 때
잊지 말고 생선을 사들고 오시라.

Photo by Kim Dong Won

바닷가의 허름한 횟집에서 회 한접시를 먹었다.
혼자 먹는 저녁은 서글프다.
수염까지 시커멓고
앞에 찌그러진 그릇하나 내려놓으면
누군가 영락없이 동전을 떨어뜨리고 갈 나같은 용모면
더더욱 서글픈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횟집 아줌마가 피워준 숯불 난로가
저녁을 먹는 동안 내내 내 곁에 함께 하며 따뜻함을 나눠주었다.
저녁을 다 먹고 은근히 배가 불렀을 때쯤
서글픔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등따시고 배부르고의 행복은 무엇 못지않게 중요하다.

11 thoughts on “속초에 가서 파도를 보던 날

  1. 에구…눈길에 미시령을 넘으시다니 너무 위험해요.
    전 통통이님이 더 무서워하셨음 좋겠어요.^^
    근데 바다가 시간에 따라서 저렇게 다른빛을 낸다는게 참 아름답네요.^^

    1. 체인을 안감은 차량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중간쯤에 경찰차 한대가 옆으로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보더니 여자라는 걸 알고는 마구 웃으며 지나갔었죠.
      그렇게 위험하진 않은 것 같아요.
      차도 안다니기 때문에 도로 한가운데로 가거든요.

    2. 쯧쯧… 가을소리님만도 못하시기는…ㅎㅎ
      중간에 휴게실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니까 곁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셨어요…
      아무래도 소형차에, 아줌마의 통큰 운전에 박수를 쳐준거겠지요…
      눈길 운전은 별 어렵지는 않은데 얼어붙은 길 운전은 정말 아찔해요…
      약간만 핸들을 꺾어도 차가 한바퀴 휙~ 돌아버리니까요… 아찔~

      그나저나 올 겨울 눈이 많다고 하더니 정말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에요. 아랫지방은 온통 눈이라고 하고 서울은 꽁꽁 춥고^^

    3. 통통이님 정말 대단하세요.^^
      왠만한 남자들도 겁나서 운전 못할텐데말예요.^^
      지금 여기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방금 남편 고교동문 송년회 갔다가 아이들이 지루해해서 먼저 택시타고 왔는데 멋지게 내리고있네요.^^
      근데 오다가 승용차랑 오토바이 사고난 장면 보니 즐거워만 할수도 없네요. 오토바이가 완전히 박살났어요.ㅡㅡ;;

  2. 지난번 큰 눈올때 집 근처 한강엘 가려고 했었지요
    사진은 엄두가 안나구요 그저 눈에 담아두려고…
    감기로 실컷 앓느라고 무위에 그치긴 했지만요…
    참 사진이 정갈하고 좋습니다…사진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많이 담아두고 있는 것 같네요…염치없이 청해도 좋을런지요
    출처 밝히고 사진과 글 빌려가도 좋을런지…좋은 사진 한장 얻기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고생이 뒤따르는지 알면서도 욕심부려 봅니다 . 날이 오래 춥네요. 영,육간에 건강 균형잃지 마시길….

    1. 그냥 물어보지 않고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냥 찾아주시는게 고마울 따름이죠.
      사진 밑에 찍은 사람 이름자나 밝혀주시면 더욱 고맙구요.

  3. 눈덮인 산과 숲의 모습은 마치 동양화처럼 아름다워요
    혼자서 떠난 여행의 쓸쓸함과 낭만이 물씬 느껴집니다.
    참으로 부지런하세요. 날씨가 추워서 저는 근처의 극장에 가는것 조차도 망설여지던데…
    눈이 또 온다던데 언제올려나.. 이번엔 사진을 찍으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거든요. ^^

    1. 지난 해는 눈사진이 처음이라 좋은 걸 많이 못 찍었어요.
      올해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방수되는 스키 장갑까지 샀지 뭐예요.
      나의 그녀가 차 운전을 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강원도 깊숙이 들어가야 멋있거든요.
      버스로는 무리라서… 특히 눈올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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