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나무 – 양평 용문사에서

이상하게 인연이 없는 곳이 있다.
바로 양평의 용문사가 그곳이다.
그녀는 대학 다닐 때 한번 그곳을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기억 속엔 절 앞의 은행나무가 지금도 노랗게 남아있다고 했다.
양평에 있으므로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다.
어느 날 우리는 차를 몰아 그곳을 찾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입장료가 1000원이었는데 우리는 2000원이 없어서 그냥 차를 돌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어느 날 다시 용문사로 차를 몰아간 적이 있다.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 그때도 우리는 정문에서 멀리 산봉우리만 한참 노려보다 돌아오고 말았다.
아마도 그날은 너무 늦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우리는 용문사를 우리의 한이 서린 용문사라고 불렀다.
두번을 지척까지 가서 번번히 발길을 돌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난 달 12일(2005년 11월), 우리는 다시 그 한의 용문사를 가보기로 했다.
나는 주머니 속의 돈부터 확인하고, 손전등까지 챙겼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은행나무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선 길이라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그곳에 도착했다.
그간의 한풀이라도 하듯 어둠이 밀려든 것도 개의치 않고 밤늦게까지 그곳에 머물다 돌아왔다.

Photo by Kim Dong Won

저녁 다섯 시의 하늘은 아직 밝다.
밝은 시간의 하늘은 구름이 채운다.
구름이 없을 때는 푸른 빛 일색이 된다.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간 자국이 하얗게 꼬리를 끌며 남아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절 입구의 찻집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하늘엔 달이 떴다.
손톱만한 달이었지만
이제 하늘은 달이 채우고 있었다.
거짓말 같다면 달을 쏙 빼버린 하늘을 상상해보면 된다.
그 순간 하늘은 텅비어 보인다.

Photo by Kim Dong Won

여름내내 저 곳에선 초록이 일렁였을 것이다.
그러다 가을 한철 저곳에서 노란빛이 범람했다.
오늘 저녁 저 자리는 저녁 하늘이 밀려드는 자리이다.
겨울이면 그렇게 저녁마다
하늘이 나무 속으로 속속들이 스민다.

Photo by Kim Dong Won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찻집 위로 머물고 있던 달이
발걸음을 옮겨 은행나무의 가지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가지 사이에 하늘이 차고, 또 달빛이 가득 찬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줄기를 타고 물이 오른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일까.
그럼 정말이지.
벌써 모양도 분수처럼 보이잖아.

Photo by Kim Dong Won

달이 뜨면 내 시선은 절로 달로 향한다.
그녀도 달을 본다.
나무들도 모두 달을 향하여 목을 빼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주변이 모두 어둠으로 물든 시간에
절 뒤의 작은 전각에선
목탁이 휴식을 청하고 있었다.
목탁은 두드리면 소리로 전각을 가득채우고
쉴 때면 고요로 전각을 채운다.
나는 고요가 목탁의 휴식이란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Photo by Kim Dong Won

달도 제 갈길이 있는데
나는 달을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 계속 붙들어 두었다.
때되면 가는 것이 자연이지만
또 그 가는 걸음을 붙들어두고 싶은게
우리의 자연스런 마음이기도 하다.

Photo by Kim Dong Won

달빛은 손톱만하다.
분명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그 손톱만한 빛으로는 사실 제 앞가림을 하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도 달은 그 손톱만한 빛을 세상에 골고루 나눈다.
그래서 달이 뜨면 그때부터 마음이 각박하지가 않다.
한낮은 빛이 지천이지만 세상이 각박하다.
풍요 속에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 속에서 손톱만한 빛을 나눌 때 마음의 여유가 생기나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가 내게 말했다.
“이상해, 언제부터인가 날이 어두워지면
달빛이 땅에서 피어오르고 있어.”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 정말 이상하다.
그래서 나도 지금 열심히 사진찍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짐짓 모른척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렇지만 나무를 마냥 속일 수도 없어서
나는 시인 송찬호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며
실마리를 흘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송찬호가 내게 이렇게 말했어.
“우리가 보는, 달은 인공 정원
한꺼번에 수백만을 집단으로 수용할 수 있는
말의 조작으로 만든 인공 정원”(송찬호의 시 <인공 정원>)이라고.
한때는 말의 조작으로 상징과 비유의 옷을 입혀 달을 만들었는데
요즘은 물리적 조작으로 그 달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그날 나무는 눈치채었을까.

Photo by Kim Dong Won

나뭇가지가 없었다면
빛은 허공으로 까맣게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있어 빛은 그 줄기를 타고
하얗게 우듬지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 그만 내려오지 그래, 밤도 깊었는데.

Photo by Kim Dong Won

빛은 나무를 오르는게 신이난 모양이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내려오라고 얘기했지만
내 얘기에는 아랑곳이 없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현대를 살아간다는 예전과는 사뭇다르다.
예전에는 동쪽 하늘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마무리되는 달의 길이 어김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빛이 지상의 한자리에 붙박이로 자리를 차지하고 꿈쩍 않는다.
나무도 그런 세상에서 살아간다.
밤마다 불을 밝히고 12시 넘기기를 밥먹듯이 하는 우리들처럼.
사는게 다 그렇구나.
나무나, 우리나.
에휴, 우리나 그렇게 살 일이지.
그러나 하늘의 달은 까만 하늘을 남겨둔채 오늘도 제 갈길을 가버렸다.

8 thoughts on “달과 나무 – 양평 용문사에서

  1. 참 오래된 은행나무인가봐요. 가을에 찍었어도 무지 멋졌을것같아요. 은은한 달빛을 같이 바라보면서 사랑을 속삭였을 부부의 모습도 그려보고갑니다.^^

    1. 아는 사람들은 거의 용문사하면 이 은행나무를 떠올릴 정도로 아주 유명한 은행나무죠. 절보다 은행나무가 더 유명하니까요. 저는 사진찍느라고 괜찮았는데 그녀는 추워서 날 기다리며 덜덜 떨었어요.

  2. 우와~ 사진 멋져요. 밤에 찍으신듯 한데 나무에 비친 저 빛들은 어떻게 나온거랍니까? 셔터속도를 길게??? 그리고 삼각대??

    ‘달빛이 땅에서 피어오르고 있어’
    시적인 멋진 표현을 기계적으로 궁금해하니 좀 머쓱하긴 하네요. ^^;;;
    그래도 궁금해요

    1. 짐작하신 그대로 삼각대와 거의 20~30초에 가까운 셔터 속도로 찍었죠. 용문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나무 아래쪽에 모두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요. 조명의 색깔도 변하더군요.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차가지고 밤에 가서 데이트하기도 좋을 듯.

    2. 20~30초. 후아~
      전 이번 디카사면서 삼각대(접사용이긴하지만)는 샀는데 카메라에 B셔터가 없어요. 최장 8초. 뭐… 똑딱이로 이 정도도 감사해야하겠지만…

      용문사.. 기억해두겠습니다. 기억을 써먹을 날이 너무 늦게 오지만 않기를 바래야죠. 훙…

    3. 아무래도 제 카메라는 DSLR이다 보니까. 30초까지는 수동으로 조정되고 B셔터도 있어요. 대신 엄청 무겁죠. 벌써 렌즈도 다섯 개나 되고. 무선 릴리즈를 살까도 생각해 봤는데 30초 넘게 필요한 경우엔 카메라가 표시는 안해주는데 알아서 자동으로 길게 가더라구요. 요즘 카메라는 성능이 너무 좋아요. 그냥 대상을 포착하면 그 이후에는 카메라가 다 알아서 해주는 느낌이예요. 좀 회의가 들기도 하죠. 이거 뭐 내가 찍는 건지, 카메라가 찍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1. 서울에서 워낙 가까운 데다가 이제는 뭐 아주 인기높은 관광지가 돼나서 사람들이 많이 붐벼요.
      이건 비밀인데 늦게 가면 차갖고 절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지키는 사람들이 다 퇴근하거든요. 물론 들어가면 안되는데 눈치보다 들어가는 차를 몇대 봤어요. 요즘은 6시 30분 정도면 깜깜합니다. 하지만 내 말 듣고 들어가다 걸리는 건 책임 못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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