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서 쓸모 없어지는 꿈 — 유이우의 시 「녹는 꿈」

Photo by Kim Dong Won

시인 유이우는 그의 시 「녹는 꿈」에서 이렇게 말한다.

얼음 하나가
착각 속에 정지한다

구르지 않는
선명함으로

어떤 노래여도 상관없다는 듯이
—유이우, 「녹는 꿈」 첫 절반 부분

시는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이우의 시는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이 시도 마찬가지이다. 다행이 이 시에는 작가노트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 작가노트에서 유이우는 “최근에 읽은 것 중 좋았던 구절은 이렇다. “우리는 이미지 위에 글을 쓰는 셈이지, 글에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적어놓고 있었다. 이미지는 시각적 대상이다. 눈에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인가를 보고 쓴 것이다. 나는 “이미지 위에 글을 쓰는 셈이”란 얘기를 그렇게 이해했다. 시가 어려운 것은 시인이 시를 쓸 때 무엇을 보았는지 시의 텍스트만으로는 금방 짐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를 쓸 때 유이우는 무엇을 본 것일까.
내가 상상한 것은 떨어뜨린 얼음이었다. 나는 시의 첫부분을 읽으며 얼음이라는 말과 정지, 착각, 구르지 않는다와 같은 표현을 묶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다 바닥에 떨어뜨린 상황을 상상했다. 떨어뜨린 얼음은 구르다가 멈춘다. 얼음을 왜 꺼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이스커피를 타기 위해 꺼냈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사람에 따라 얼음의 용도는 얼마든지 달리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얼음은 원래의 용도와는 다르게 바닥에 떨어졌다. 원래 사용하려던 목적을 생각하면 얼음은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얼음은 떨어져 구를 때 잠시 바닥을 커피잔 속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 그러다 멈춘다. “구르지 않는/선명함”은 이런 상상 속에선 멈추었을 때 얼음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다음 구절의 “어떤 노래”는? 나는 그것을 얼음을 원래 용도로 사용했을 때의 상황이라고 보았다. 아이스커피 속에서 녹아 커피를 시원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때 얼음은 사실은 얼음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가 감지하는 아이스커피의 시원함은 얼음의 노래를 입으로 듣고 있을 때의 느낌이다. 용도에 따라 다르긴 하나 얼음의 노래는 항상 시원하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졌으니 그간의 노래는 아니다. 우리에겐 아이스커피를 시원하게 해주어야 들을만한 노래가 되지만 그건 우리의 입장일 뿐, 얼음으로선 바닥에 떨어져 부르는 노래도 상관이 없다.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아이스커피에 넣으려고 냉장고를 열고 얼음을 꺼내다 떨어뜨렸다. 떨어질 때는 커피잔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떨어져서 구르다 멈추어보니 그곳은 바닥이다. 멈춘 얼음의 형태가 선명하다. 이제 원래의 용도는 잃었지만 얼음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시의 나머지 절반을 읽어본다.

작은 기쁨으로 녹아
표면을 부드럽게 하면

높이가 없는 미래에서는
파도를 피할 수 있지

바다가 되지
않을 수 있지

오래오래
사라질 수 있지
—유이우, 「녹는 꿈」 나머지 부분

보통 아이스커피에 넣으려고 얼음을 꺼내려다 떨어뜨렸다면 떨어진 얼음을 아까워했겠지만 나는 시인이 그 얼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고 상상했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혹시 얼음의 꿈은 무엇일까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사이에 얼음은 서서히 녹고 있었다. 그리고 녹고 있는 얼음에서 얼음의 꿈을 보게 된 시인은 녹는 얼음을 치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기로 했다. 물론 내 상상이다.
나는 시인이 바닥에서 녹고 있는 얼음에게서 “작은 기쁨”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작은 기쁨으로 녹아”가고 있었다고 시인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은 왜 기뻤던 것일까. 혹시 그것이 얼음의 꿈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또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성공이라고 말하는 어떤 궁극에 닿으려고 한다. 물은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이 그 궁극이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녹고 있는 얼음은 물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흘러 바다까지 갈 수도 없다. 바닥에 떨어졌으니 이제 쓸모도 없다. 시인은 바닥에 떨어진 얼음이 처한 시간대를 “높이가 없는 미래”라고 말한다. 쓸모도 없고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곳도 모두 상실한 장소이자 시간이 얼음을 기다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갈 뿐이다.
쓸모는 우리들의 꿈이 되기에 충분한 것일까. 쓸모는 이중의 얼굴을 갖고 있다.쓸모는 우리로 하여금 쓸모를 가지도록 끊임없이 억압하고 쓸모 없는 것을 쓸모없다 경멸하게 만든다. 성공의 궁극에 도달하는 일은 또 어떨까. 그것 또한 이중의 얼굴을 갖고 있다. 그곳에 도달하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파도와 싸워야 한다. 궁극이란 없다. 바다에서, 혹은 취업한 대기업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어가야 하는 싸움이 있을 뿐이다.
정말 좋은 세상이라면 쓸모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쓸모 없는 사람도 가치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궁극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공존하는 세상이 아닐까. 그냥 쓸모나 성공의 궁극 같은 것을 꿈꾸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오래오래” 지키며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혹시 우리의 꿈이 될 수는 없을까.
시를 읽고 난 끝에서 나는 시인이 문득 떨어진 얼음 하나에서 시인 자신을 겹쳐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쓸모나 성공과는 관계없는 시를 쓰며 살아가지만 그 쓸모없음의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일 것이다. 나도 다음에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다 떨어뜨리면 그 얼음이 녹고 말라서 사라질 때까지 그냥 그대로 둘 생각이다.
(2021년 9월 9일)
(인용한 유이우의 시는 ⟪현대시⟫ 2021년 9월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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