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시인 오규원의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시가 시집 속에 머물질 않고,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마치 읽는 순간 내게 마음을 뺏긴 어느 보이지 않는 영혼처럼 나를 따라 나서 바로 내 곁으로 슬쩍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곁으로 온 그의 시는, 그의 시를 고집하지 않고 세상을 시로 물들인다. 가령 그의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에서 아무 시나 하나 골라 읽어본다.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눈송이가 몇 날아온 뒤에 도착했습니다
편지지가 없는 편지입니다
편지봉투가 없는 편지입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입니다
발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수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한 마리 새가 날아간 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돌멩이 하나 뜰에 있는 것을 본 순간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돌멩이와 편지」 전문
편지지도 없고, 편지봉투도 없고, 언제 보냈는지도 모르고, 발신자도 없고, 수신자도 없는 편지라고 했다. 그러니 사실 왔다고 해도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편지이다. 그 편지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날아든 눈송이 몇 개, 어디엔가 앉았다가 날아가 버린 새 한 마리, 그리고 뜰에 놓여있지만 눈여겨 보지 않아 있는 줄도 몰랐다가 어느 날 문득 눈에 띈 돌멩이 하나이다.
시를 읽고 난 뒤, 나는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에 선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새벽잠에서 이제 막 몸을 일으킨 아침 해가 곧장 잠을 털어내지 않은채 마치 학교 가기 싫어 꼼지락대고 있는 아이들처럼 그 환하게 빛나는 몸을 아파트 앞쪽의 골목으로 길게 뻗고 있다. 그 순간 나는 놀란다. 나도 오규원처럼 “편지를 한 통 받”아든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직 편지가 배달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누가 배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편지이다. 오규원의 시에 세상이 물든 순간이기도 하다. 오규원의 시를 읽고 나면 아침이 아침이 되어 밝는 것이 아니라 아침이 마치 편지처럼 우리에게 배달된다. 아니, 세상이 모두 우리에게 배달되는 편지가 된다.
시가 아침 골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통해서도 느닷없이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가 있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편지가 또 도착한 것을 알게 된 것은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통해서였다. 여자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고, 꼰다리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채 책을 읽고 있었다. 여자의 치마는 위는 모두 덮어주면서도 옆은 모두 드러내주고 있었다. 드러난 맨살은 시선을 곧바로 그녀의 허벅지로 끌어갔다. 침대 위로 올려놓은 다리 끝에선 겹쳐진 두 개의 발이, 마치 위아래로 유난히 긴 얼굴처럼, 두 발을 모두 세우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은 편지가 도착했다는 느낌이었다. 편지지도 없고, 편지봉투도 없는 편지를 용하게도 뜯어본 나는, 슬그머니 내 발을 뻗어 그녀의 발에 발을 비볐다. 이번 편지는 아주 섹시한 편지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그 순간, 다시 세상이 시에 물들었다.
오규원의 시는 시집 속에 머물러 있질 않는다. 그의 시는 읽는 순간, 시집을 나와 우리의 곁으로 오며, 와선 세상을 시로 물들인다. 그의 시는 시집 속에 있으나, 동시에 세상 어디에나 있다.
(2015년 9월 10일)
(인용한 시는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지성사, 2005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