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무소유마저 가지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 가 닿을 때 — 백무산의 시 「무무소유」

때로 어떤 말 하나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널리 알려질 때가 있다. 무소유라는 말도 그렇다. 겉으로만 보면 그것은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액면의 의미로만 본다면 없는 사람들은 버릴 것도 없이 무소유의 상태가 될 듯 싶다. 그런데 그렇질 않다. 시인 백무산은 그의 시 「무무소유」에서 없는 자들은 심지어 무소유도 가질 수가 없다고 한다. 말을 바꾸면 무소유도 가진 자의 것이다.

가진 것이 넉넉해야 무소유를 맘껏 가질 수 있다
—백무산, 「무무소유」 부분

단어의 뜻으로만 보면 무소유는 가진 것이 없는 것인데 시인은 그 무소유마저 “가진 뒤의 자유”이며, “무소유는 소유라는 단어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라고 지적한다. 제목인 무무소유는 무소유마저 가질 수 없는 없는 자들의 처지를 가리키고 있다.
언듯 생각하면 가진 것이 없으면 달리 가진 것을 내려놓을 노력을 하지 않아도 곧바로 무소유의 상태가 될 것 같은데 백무산은 그렇지 않은 정황을 “없는 사람”의 무소유에 대한 이해는 “굶주리는 사람”이 “건강 단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잃은 것은 사슬뿐인 사람들은/자유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날 거”라고 말하지만 “그들도 잃을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해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자신이 가진 그 작은 소유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이다.
시인의 예는 우리들의 수긍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그 예는 바로 “가진 것 아무 것도 없는 거지”이다. 시인은 거지마저도 “동냥 구역을 잃을 게 있”으며, 그 때문에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동냥 구역을 잃은 거지는 그의 유일한 생계 수단을 잃게 된다.
그 때문에 무소유는 없는 자들은 가질 수가 없는 말이다. “거액의 자산가”나 “좀 살 만한 자”나 무소유를 가질 수 있다. “어디 가나 밥과 집이 넉넉한 스님이라야/무소유를 제대로 설법할 수 있다.”
나는 이 말이 널리 알려지게된 계기가 되었던 한 스님이 넉넉하여 이 말을 설법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스님이 무소유를 말했을 때 그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필요한만큼만 가지고 그 이상의 집착은 거두자는 뜻이었다는 것으로 들었다. 이 말이 유행을 타게 된 계기가 되었던 스님의 설법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 더 이상의 구체적 언급을 하긴 어려우나 아마도 스님이 소유를 바탕으로 무소유를 말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다. 하지만 스님의 무소유가 세상에 무소유마저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는 가 닿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무무소유라는 말로 스님이 말한 그 무소유마저 가지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 가 닿는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엔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세상이 있다. 무소유마저 닿을 수 없는 그 세상에 가 닿는 것, 그것이 시인의 미덕이다. 백무산에게 그 미덕이 있다.
(2021년 10월 8일)
(인용한 시는 백무산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2020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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